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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어떤 다큐멘터리 영화에 인터뷰이로 우연히 출연하게 되었다고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가 완성이 되어서 상영회를 가지니 꼭 보러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초청을 받고 지난주 토요일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차마 바쁘다는 핑계를 대진 못하겠더군요. 게다가 자기가 출연한 영화를 자기가 보러 갈 일이 저같은 일반인에게 얼마나 또 있겠어요.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가본 적 없는 경기도 모 대학까지 가는 길은 멀었고 그 다음날 조카 돌잔치를 가야 해서 좀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뱉은 말에 몸을 싣고 상영하는 곳까지 갔습니다. 오랜만에 대학교 건물을 가니 뭔가 어색하더군요.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농구를 하고 있고.


감독님과 인사를 나누고 학교 소극장 같은 곳으로 안내를 받아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변덕이 요동치더군요. 사회자의 인삿말과 함께 상영회가 시작되자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제가 나온 영화를 차마 못보겠는 겁니다. 너무너무 싫더라고요. 상영회는 학생들의 단편 영화들을 연달아 상영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한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 곧바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제가 찍힌 영화가 그 다음 영화일까봐요. 그렇게 혼자 긴장했다 혼자 힘을 빼는 바보짓을 몇번 거듭한 후에 상영회 1부가 끝났습니다. 2부에 해당 영화가 나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으면 그래도 마음 졸이는 일은 없었을텐데.


마침내 2부가 시작되고 감독님의 나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실성 직전의 상태가 되어 엄지와 검지로 이마를 짚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고뇌하는 시늉을 하면서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심정은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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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와도 같았습니다. 한명 두명 인터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1초 1초가 스크린 속 제 이미지를 효수할 시간을 앞당기는 것 같더군요. 마침내 제 모습이 나왔고 저는 그 순간 손에 힘을 더 주고 힘껏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이렇게 눈썹을 찡그러트리면 고통일 덜 할까 싶어서요. 그런데 귀를 막을 수는 없어서 제 목소리는 그대로 들려왔습니다. 아마 녹음한 자기 목소리에 진저리를 치신 분들이라면 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실 겁니다. 그런데 전... 녹음한 자기 목소리를 쌩판 모르는 삼십명과 함께 듣고 있었습니다. 아주 살짝 손가락을 벌려서 스크린을 봤다가 0.1초만에 제 손가락 커텐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인터뷰이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두번이나 나왔습니다. 정말 미칠 것 같던 ㅎㅎ 갑자기 그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자기 촬영분을 모니터링하는 배우들도 어지간히 멘탈이 세다... 


찾아보니 헐리우드의 명배우들도 자기가 나온 영화를 못보는 경우가 꽤 있더군요. 메릴 스트립이나 호아킨 피닉스 등... 자기가 나온 영상을 보면 자신의 어색한 부분이나 이상한 부분들만 눈에 들어와서 다른 작품에서 그걸 의식하며 부자연스럽게 연기할까봐 아예 안본다고 합니다. 하기사... 그러고보니 예전에 대학교 연극부 활동을 하던 제 친구 생각도 납니다. 그 친구는 되게 열심히 연기를 하는데 그 친구의 실제 모습을 알고 있는 저는 그게 어딘지 귀엽고 좀 이상하게 보였지요. 


영화 도중에 몸에 열이 올라오고 땀도 나고 당황한다는 신호를 전신으로 발산했습니다. 정말 아무리 뜻깊고 신기한 자리여도 이런 촬영에는 응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정말 진이 빠진 채로 박수를 치며 다음 영화들을 편히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들은 어떻게 자기 영화가 끝난 다음에 그 영화를 본 관객들과 함께 GV같은 걸 하는지 모르겠어요 ㅎㅎ DVD 코멘터리 같은 걸 하는 것도 신기하고... 직업이 되면 괜찮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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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는 영화과 학생들이 만든 과제? 시험? 같은 느낌의 작품을 다같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이제 슬슬 고전 명작들만 보는 게 좀 지쳐서 독립영화를 한두편 봐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딱 그 타이밍에 독립영화들을 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그 저예산 특유의 생생한 느낌이 있죠. 얼굴 가까이에서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라든가 너무 특별하지 않아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의 평범한 출연자들이라거나. 특히나 학생들이 만든 작품이다보니 아무래도 상업영화들에 비해 완성도는 조금 아쉬운 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더군요. 보면서 편집이 왜 이렇게 튀지? 라든가 연기가 조금 찝히는데? 라든가.


그런 부분들이 단점이라기보다는 그런 점들까지도 포함해서 영화들이 다 사랑스러웠습니다. 뭔가를 하나 완성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하다못해 방구석에서 키보드만 두들기는 이런 게시글도 완성을 미처 못해서 도중에 폐기하는 일이 생기는데, 실제로 사람을 쓰고 카메라와 여러 엔지니어링 장비를 쓰면서 마음에 드는 장면을 건지려고 없는 시간과 돈을 쪼개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특히나 영화과 학생들이라면 근사하고 아름다운 영화들을 얼마나 많이 봤을지요. 이미 위대한 역사에 놓일 작품들과 한없이 괴리감이 도는 본인들의 촬영분을 두고 편집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고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아마츄어 티가 날 수 밖에 없는 그 장면들을 있는 힘껏 기워내며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박수받아야 마땅하죠... (저는 예전에 시나리오 수업에서 시나리오를 쓰다가 엎은 적이 있습니다...)


모든 작품들에서 예외없이 용기를 느꼈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이제 막 첫발을 내딛어서 아쉬움 가득한 장면들로 기어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 그걸 공유한다는 게 말이죠. 그래서 잘 찍힌 장면들에서는 보통 상업영화들보다 더 감동받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되게 매끄럽다, 저 장면은 꽤 위험해보이는 어떻게 찍었지, 배우들의 연기가 장난 아닌데, 소재가 굉장히 좋은데... 


영화들이 다루고 있는 재료들이 다양해서 또 좋았습니다. 총 쏘고 때려패거나 아주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추적하는 그런 메이저 영화의 느낌이 아니라서 좋았어요. 대로변의 간판들이 아니라 굽이굽이 골목길을 돌아야 찾을 수 있는 작은 가게나 드럼통 위에서 하품 하는 고양이 같은 인상을 영화들이 줬으니까요. 그 안에는 게이 친구와 이성애자 친구의 어색한 하룻밤 이야기도 있었고 이별을 하는 시간부터 그 전의 행복하고 고집셌던 연애시기를 회상하는 이야기도 있었고, 아빠의 무좀을 옮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중학생의 이야기도 있었고, 남자 농구부 부원들끼리의 성폭력을 공론화한 이후 생기는 파장을 그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대자본이 들어갈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진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라 느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누군가는 해줬으면 좋겠죠.


제가 찍힌 영화는 멀티플렉스 시대에도 굳이 발품을 팔아서 소규모 극장들을 찾는 사람들과, 그 극장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인디스페이스에 대해 떠들었는데 이제 그곳은 원래 있던 종로에서 홍대 쪽으로 그 터를 바꿨습니다. 저의 애정과 기억들이 더 이상 현재진행형이 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로 나아가야하는 상황에서 영화를 보니 그 영화를 찍어준 감독님께 감사한 마음도 들더군요. 마음이 영상의 형태로 기록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래도 보진 못합니다 ㅋ)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감독님의 영화와 다시 한번 연결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씨지브이나 메가박스가 아니라 어느 대학교의 소강당에서 이렇게 영화를 본다는 게, 저만의 기억이 서린 특별한 공간을 하나 만들어낸 것 같아서요. 굳이 어떤 곳에서만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 다른 어떤 곳에서 본다는 그 경험 자체가 영화와 현실이 이어진 것 같았습니다. 영화가 다 상영되고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제가 나온 영화의 감독님도 상을 받았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분들'이라고 수상의 영광을 나누는 경험까지 하게 되서 굉장히 신기했어요. 보람차기도 하고.


상을 받은 감독님들은 거의 다 울먹거리면서 감사를 전하더군요. 정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는데 자신을 도와준 피디나 엔지니어, 스텝들에게 너무너무 고마웠다고. 그걸 보면서 영화라는 게 얼마나 협동의 결과물인지 실감했습니다. 조금 부러운 기분도 들었어요. 누군가와 저렇게 고생하고 서로 응원하고 고심하면서, 하나의 결과물을 내고 그 성취를 또 본다는 것... 너무 로맨틱한 결과물이지 않습니까. 이들의 이 열정과 아이디어가 현실의 단단한 벽을 뛰어넘어 결실을 맺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함께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만큼은 다들 가지고 갈 수 있길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기를.


@ 무려 졸업작품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를 찍은 윤종빈은.... 진짜 천재입니다. 이건 진짜 대한민국 모든 영화과 학생들에게 레전설로 남을 작품입니다. 그날 영화들을 보면서 새삼 진가를 확인했습니다. 


@ 저는 학생들끼리 막 어설프게 찍은 작품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성배우들이 나오는 작품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윤가은 감독을 연상케 하는 작품도 있었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찌질한 기자 구남친으로 나오는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좀 신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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