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추억

2022.04.14 20:02

Sonny 조회 수:689

대학교 때 등록금 제값한다고 느낀 수업 중 하나가 토론 수업이었습니다. 그리스의 토론을 짧게 흝아보고 조별발표 형식으로 의제를 하나 정해서 발표를 하면 그 다음에 토론을 해보는 건데 정말로 현실 키배를 하는 기분이라 좀 즐겁기도 했죠. 그리스 로마 신화 전공을 하신 교수님께서 당시 수업을 맡으셨는데 강의 자체가 재미있어서 이 교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강의는 항상 인기폭발이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키가 굉장히 크시고 안경을 쓰고 다니시던 분이셨는데 훈훈한 이미지만 머릿 속에 남다보니 이제는 김영하 소설가의 이미지와 좀 뒤섞여버렸네요.


토론 수업의 의제들은 의외로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노키즈존을 발표한 조가 있었는데, 그 때는 이 이슈가 핫하지 않아서 노키즈존을 반대한다는 그 조에게 상당히 많은 공격들이 쏟아졌고 그 조는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트위터에서의 노키즈존을 보면 참 상전벽해다 싶은... 저는 '일본 포르노의 수입 합법화'를 발표했었는데 데빌스 애드버킷을 해야하는 남학생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반발을 했던 게 생각이 납니다. 합법화되면 비싼 돈 내고 봐야하는데 뭐하러 하느냐, 한국 에로비디오의 규제부터 파는 게 순서 아니냐 등등... 저 때 저는 극히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만 저 이슈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요.


그 당시 저희 조의 가장 큰 논거는 금주법이 실패했듯이 이미 유통되고 있는 포르노는 사회적으로 근절할 길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저작권 침해이며 합법화를 통해 더 확실한 관리를 할 수 있으니 이걸 제대로 논의해봐야한다 이런 시각이었습니다. 발표를 듣는 학생들이 이 논지에 다들 공감했는지 좀 변죽만 때려댔는데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이 저희 조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논지도 일관성 있게 잘 세웠고 질문에 대답도 잘 했다, 다만 포르노라는 영상매체는 성기에 성기를 삽입하는 행위를 찍는 영상인데 그 행위를 영상에 담아서 유통시키는 게 과연 윤리적으로 허용해도 되는 것인지는 더 생각해봐야한다고요. 이건 저한테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시각에서 말을 해주지 않았거든요. 이 때의 답변이 하도 인상깊어서 저는 종종 영화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윤리에도 같은 질문을 적용해보곤 합니다. 이 전에 여성인권영화제에서 본 '시체가 된 여자들'이란 영화도 여자 시체를 연기하는 여자 배우들을 보면서 윤리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작품이었기도 하고...


그 때 토론은 저에게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무엇에 찬성하고 반대하냐는 입장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르노를 하나의 영상물로만 취급한다면 그것을 유통시키자는 데 반대할 논리가 별로 없어질 겁니다. 하지만 그 영상물을 만드는 여자배우들을 생각해본다면, 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가 될 겁니다. 그 당시 여자, 남자 조원들 다 밤 늦게까지 반대 입장을 스스로 말해보면서 논리를 세워나갔는데 끽해야 이십대 중반이다 보니 다들 생각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슈를 다룰 때 그 이슈의 한복판에 끼어있는 사람을 놓치면 토론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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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인상 깊게 남았던 또 다른 토론 수업의 기억은 법학개론 시간이었습니다. 강의가 오후 늦게 열려서 좀 널널하기도 했고 경찰공무원이나 법쪽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학생들이 슬렁슬렁 듣는 수업이라 아주 타이트하진 않았습니다. 교수님은 이제 막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오신 분이셨는데 가끔씩 학생들을 원으로 모아서 토론을 열곤 했습니다. 그 때의 토론은 그렇게 재미있진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좀 뻘쭘해하면서 의견 표현을 잘 안했거든요.


어느 날은 무려 '동성애자를 우리는 찬성해야하는가 반대해야하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이 열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되게 황당한 주제인데, 교수님이 인권의식이 그러신 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해 반대가 너무 일상적으로 박힌 학생들에게 이 이슈를 조금이라도 더 공적으로 생각하고 말해보게끔 하는 기회를 주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이 날 토론은 생각보다 조금 더 뜨거웠고 저는 이 날 말을 되게 많이 하게 되었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들이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뻔하디 뻔한 편견들을 근거로 반대의 의견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섭리 등등... 그 중 되게 조용하고 순하게 생긴 어떤 남학생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는 동성애자들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군대에 가면 다른 사람을 강간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백퍼센트 실화입니다. 그 당시 동성애자를 찬성(?)하는 사람은 저와 어떤 여학생밖에 없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그 동안 조금 온건하게 토론을 하던 찬성파 학생이 "말도 안돼~~!!" 하면서 거의 토론을 포기하는 혼잣말을 뱉었기 떄문이죠.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긴데, 그 당시 저는 너무 황당해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아마 그 때 그 학생이나 저의 표정을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면 저는 유튜브 썸네일로 "한방 먹고 당황하는 쏘니!!" 이런 식으로 편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지는 비논리에 대한 경악과 논리적 패배로 인한 침묵을 구분하지 않으니까요.


그 토론을 통해서 반대자들이 과연 생각을 바꾸었을까? 혹은 자신의 비과학적인 편견을 폐기했을까? 좀 회의적입니다. 애초에 찬성과 반대의 입장 차이를 설정해둔 토론의 구조 때문에요. 세상에 어느 사람이 아, 그래? 그럼 이제부터 동성애자에게 찬성해야겠군~! 하고 자기 입장을 바꾸겠습니까. 차라리 동성애자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말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차례대로 해보게끔 하면서 교수님이 명확한 방향을 설정했다면 더 좋은 시간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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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과연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가. 어떤 의제를 찬반의 입장 차이로 이미 전제를 세워두는 것 자체가 이미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좀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함정이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 차이의 선해를 낳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방송국이 너무 흥행 욕심에 빠져 이런 불필요한 토론을 내보낸 건 아닌지 좀 슬프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밖에 마이크를 쥐어주지 못할만큼 공론장 자체를 기울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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