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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장국영의 기일이었죠. 딱히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그런 날에 장국영의 영화를 보니 어쩐지 그를 기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일렁였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왕가위의 영화를 다 볼 계획이었으니 어제 딱 시간이 맞아 보러갔습니다. 다행히 동사서독보다는 영화가 훨씬 덜 지루하더군요. 아니, 사실 박진감이 넘친다고 해야할까요?


이 영화도 저에게 조금 늦게 도착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들볶여본 경험이 있어서 그 시간이 낭만적일 수 없다는 걸 몸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그렇고, 한편으로는 왕가위의 스타일이 여전히 저에게 좀 빛바랜 느낌이어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아휘가 그 스탠드를 보는 샷의 구도나 왕가위 특유의 프레임 조절 같은 것들 말이죠. 저는 해외에서 막노동으로 고생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보면 자동적으로 저의 워킹 홀리데이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그런 게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 아르헨티나라는 지역이 저에게 너무 이국적으로 다가와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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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중간중간 이 영화의 로케이션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저 좁은 방에서 맨날 지지고 볶고 싸울거면 대체 아르헨티나는 왜 간 것일까... 이 의문은 영화 마지막에 좀 풀렸습니다. 아휘의 대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서요. 오로지 이 지리적 특징을 화면에서 실현하기 위해 왕가위가 또 폼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좀 귀엽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와닿지 않을 그 지리적 거리감을 어떻게든 담고 싶어서 아르헨티나까지 갔다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같은 영화도 좀 생각이 나고 말이죠. 그냥 외국이 아니라 지구반대편이라는 단어가 엑조틱하고도 한없이 멀게 느껴지면서도 막상 영화에서는 살이 부대끼고 침이 튀는 너무나 밀접한 그런 관계가 꽉 채워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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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전엔 연인들이 다투기만 하는 내용인줄 알았습니다. 다 보고 나니 이 영화는 "정떼는" 이야기로 정리되더군요. 영화 시작, 가장 격정적이고 농밀한 이들의 육체적 뒤엉킴조차 이미 몇번이나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 이후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나옵니다. 그 다음 씬은 이과수 폭포에 가다가 둘이 싸우고 헤어지는 씬입니다. 그리고 조금 성급하게 붙인 듯한 버즈아이 뷰의 이과수 폭포 씬이 나옵니다. 조금 뜬금없었습니다. 이 커플은 이과수 폭포에 가지 못했는데 왜 이들이 볼 수 없는 그 폭포의 장엄함을, 누구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는 것일까.


전 이 장면을 약간 소설의 한 챕터처럼 이해합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고장난 차를 두고 또 콩볶는 소리를 서로 쏟아냈다, 그들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헤어졌고 이과수 폭포는 잃어버린 길에서 그들에게 다가올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한 챕터가 끝나면 다음 챕터에서 이과수 폭포는 무심하고도 거대한 구정물들을 토해내고 있다, 절벽 아래로는 감히 폭포수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마저 삼켜버릴듯이 물줄기가 쏟아지고 튀어오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과수 폭포가 어떤 곳인지 따로 할애해서 설명하는 씬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씬은 영화 후반부에 아휘 혼자서 폭포에 도착했을 때 반복됩니다. 이과수 폭포는 아휘가 도착했을 때 비로서 그의 심정을 정확히 대변하는 하나의 언어가 됩니다.


폭포 앞에서 헤어졌지만 아휘와 보영은 재회하고 또다시 연애를 시작합니다. 아휘가 보영에게 퉁명스레 대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증오를 표현할 때, 보영을 지워내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갈등이라는 걸 보는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영이 손이 피투성이가 되서 아휘의 집을 찾을 때 다들 이 징그러운 연애가 다시 시작되고 말거라는 걸 직감합니다.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 찾는 다른 누군가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이 꼴이 되어도 받아주리라고 확신할만큼 엇비슷한 비참함을 가진 사람이죠. 아휘도 그걸 압니다. 보영의 손이 오랫동안 안나았으면 좋겠다고 그의 나레이션이 나오죠. 의존을 사랑으로 그나마 착각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몸살로 앓아누은 아휘에게 밥해주라고 칭얼대는 보영을 보고 있으면 영화 속 대사가 그대로 나옵니다. "너도 인간이냐!" 보영은 의존을 사랑으로, 혹은 자신을 돌봐주는 걸 타인에게 준 권리처럼 여깁니다. 줄 수 있는 것도 받을 수 있는 것도 남을 외롭게 할 뿐인 그런 사람이죠.


역시나, 보영은 손이 낫자 외출도 자주 하고 점점 아휘를 불안하게 합니다. 이런 걸 자유라고 할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쪽지라도 써놓고 나간다면... 이런 배려는 그저 아휘 입장에서 속썩이는 관객들의 몫입니다. 여권 문제로 둘은 크게 다투고 결국 보영은 아휘의 곁을 떠납니다. 다른 나라로 떠날 수 있는 그 최소한의 조건조차 돌려주고 싶지 않았던 아휘의 마음을 모를 수 없습니다. 부엌에서 추던 탱고도, 다정스레 차려오던 닭고기요리도 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왕가위는 또 다시 시간의 무상함을 설파합니다. 쌓이는 건 없다. 스러져가거나 날려갈 뿐. 또 싸우고, 또 헤어지고의 반복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계속 부숴지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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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는 두 남자의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아휘의 1인칭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휘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나며, 아휘의 시야에서 사라진 보영의 행방을 관객인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보영이 아휘의 삶에 어떻게 들어갔다 나오는지, 이미 금이 간 관계가 어떻게 완전히 깨지는지 아휘의 입장에서 관객은 목격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휘의 삶에서 보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이 영화가 실질적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홀로 남아 독백하는 아휘를 보여줘도 그건 그 지난한 연애의 에필로그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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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는 새로운 인물인 장을 등장시킵니다. 그래도 아직 아휘와 보영이 다정하던 시절, 식당에서 보영에게 걸려온 전화를 장이 수화기를 들고 반응합니다. 그 둘만의 비좁은 세계와 갈라져있는 틈으로 장이 들어옵니다. 장은 무언가를 예민하게 잘 듣는 사람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전화를 붙들고 있던 아휘가 언제부턴가 통화를 하지 않게 된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 둘은 특별히 뭔가를 이야기나누진 않습니다. 그러나 보영의 공백을 장이 채웁니다. 아휘와 장은 함께 바에 가서 놀기도 하고 축구를 하면서 같이 몸도 부대낍니다. 그렇게 아휘와 보영의 이야기는 아휘와 장의 이야기가 되어갑니다.


그렇기에 아휘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보영과 함께 했던 공간이니까요. 장이 가려고 하는 곳이 지구의 끝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끝을 가본 사람은 무조건 돌아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지구의 끝을 가본 장은 아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보지만 그저 우는 것 같은 소리밖에 듣지 못합니다. 그게 실제로 아휘가 녹음한 소리이지만 장은 분명히 아휘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그 때 무슨 말을 녹음했는지 물어봐도 되냐고. 아휘의 행복한 순간과 불행한 순간 모두를 눈치챈 사람은 장 뿐입니다. 그리고 장은 지구의 끝에서 가장 먼저 아휘를 찾으러 함께 가던 바에 갑니다. 딱히 가족에게 큰 그리움이 없던 장에게 돌아갈 곳은 대만의 부모님 집이 아니라 아휘라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보영과 함께 있을 땐 하염없이 멈춰있는 것 같던 아휘의 시간도 마침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고, 돌아갈 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가 도축공장에서 일을 할 때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는 피는 씻겨나갑니다. 더러웠던 기억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냉동해 저 멀리로 보내버리듯, 그동안 흘렸던 피눈물도 노곤한 새벽에 씻겨가듯 그렇게 시간은 하나둘씩 흘려보냅니다. 보영은 뭘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아휘가 화장실에서 그를 스쳐갔다고만 언급하죠. 그래서 더 애처롭기도 합니다. 여권을 잃어버린 보영은, 영화에서 딱히 무슨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그 보영은 뭘 하면서 살고 어떻게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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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를 떠나기 전 아휘는 혼자서 그 이과수 폭포를 찾아갑니다. 이과수 폭포의 그 광대한 광경이 자연풍경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흙탕물같은 몇갈래의 넓다란 폭포줄기가 끝도 없이 흘러내립니다. 마치 아휘의 속을 게워내고 게워내는 것처럼, 계속해서 폭포수는 밑바닥으로 떨어져내립니다. 징글징글했던 그 모든 추억과 시간들이 자비없이 그저 흘러내려갑니다. 왕가위가 멈춰놓았던 시간은 둑이 터지듯 다 쓸어내려가버립니다. 어쩌면 이과수 폭포는 이별에도 그만큼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끊어내면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그리고 막대하게 쓸어내야 그것들은 간신히 떠내려간다는 것일까요. 장이 녹음기를 통해 듣지 못했던 그 절규와 천마디 말들이 폭포수의 그 웅장한 소리가 대변하는 듯 합니다. 쏟아지고 쏟아질 뿐, 마치 무저갱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무시무시해보이기까지 하는 풍경은 애정을 퍼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구멍나버린 아휘의 속앓이 그 자체 같습니다.


우연히 들린 식당에서 아휘는 장의 사진을 찾아냅니다.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반대편에서는 외로울 수 밖에 없던 곳에서 지독하게 매달려있던 그런 사랑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과 닮아있어 정겨운 그 사람들 속에서 아휘는 덜 서럽고 더 따스한 사랑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Turtles의 원곡보다 훨씬 더 강하고 휘몰아치는, 그 시원한 목소리가 이과수 폭포의 바람같습니다. 아휘는 이제 흉터를 걷어내고서 보영과의 과거를 추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행복했지. 동시에 장과의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행복하겠지. 저조차도 그 악에 받힌 경쾌한 노래에 후련섭섭해졌습니다. 장국영의 팬인 지인이 느꼈다던 그 전율이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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