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잊혀졌다 싶을때만 한번씩 글쓰는 멀고먼길입니다.


물론 누가 저를 기억하겠냐 하는 문제도 있고 니가 뭐 게시판 네임드냐 하는 문제도 있지만, 말하자면 딱히 서두에 치고 들어갈 멘트가 없다보니 

'말하자면 뭐 그렇다는 겁니다'류의 멘트를 적고 넘어가는 거죠, 음하하!


(...)


네, 뭐, 아무튼...새벽에 잠을 깼더니 잠은 안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려니 그건 그것대로 심심해서 의식의 흐름에 손가락을 맡기고 이래저래 키보드를 두드려 보는데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보고 나와서 뜬금포로 '영화보고 질질 울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글을 썼던 적이 있었죠.

아마 제목을 보고 들어오신 분들은 '뭐여, 네깐놈이 새벽에 깬거랑 허세랑 뭔 상관이여'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뭐, 원래 슈퍼-바낭이란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생각나는 대로 중얼중얼하다보면 뭔가 야마가 나오게 되어있는. 음하하!


(...)


아...아무튼 각설하고 저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독일밴드 메콩델타의 [전람회의 그림]을 듣고 있습니다. 

제가 간간히 지금처럼 새벽잠을 깰때가 있는데 그때 마저 자지 않으려고 듣는 몇몇 레퍼토리 중의 하나죠. [전람회의 그림]이라고 하면 클래식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음 [전람회의 그림]이라고 하면 그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실 텐데, 네, 님들이 생각하시는 그거 맞습니다. 메콩델타는 빡세고 어려운 연주를 하는 밴드고, 이 형들이 뭔 바람이 들었는지

앨범 하나를 통으로 [전람회의 그림]을 리메이크(라고 해야할지 편곡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했더라구요. 저는 [전람회의 그림]을 이 버전과 오리지널과 에머슨-레이크-앤 파머의 버전 세가지를 들어봤는데

아무래도 [핫-뮤직]세대라서 그런지 완성도는 논외로 하고 이 버전이 귀에 가장 짝짝 달라붙더군요. 뭐, 그런 연유로 알람 이전에 잠을 깰때면 몇몇 다른 곡들과 함께 로테이션으로 돌려듣곤 합니다.


여하튼,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서 뭔가 하고 있으려니 불쑥 '아, 그래 내가 한때 이걸 가지고 멍청-허세질을 그렇게 하고 다녔었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계기는 멀고먼 어느날 은하계 깊숙한 곳...아 아니 이게 아니고, 아무튼 갑자기 '그래, 이제 프록을 한번 들어봐야겠어!'라는 생각을 하고

프록-아트락에 대해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던 중 'ELP의 앨범중에 [전람회의 그림]이라는게 있는데 그게 그렇게 명작이다더라'하는 이야기를 들어서입니다.

물론 당시만 해도 -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 그쪽 음악에는 문외한이나 다름 없던 제가 들으면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알겠습니까. 

그냥 올타임-베스트라는 이야기만 듣고 넙죽 산거죠. 역시나 처음 들었을때 제 감상은 '...음...엄...호...아하...으흠...' 뭐 이따위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 제가 학교에 가서 멍청-허세질을 하고 다녔다는 거죠. 

'야 너네 ELP라고 들어봤음? 아니, 레골라스말고 멍청아, 야겜도 말고 빠가야' 뭐 이런식으로 말이죠.

더 문제는, 하다 못해 앨범속지만 한번 읽어봐도 알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은채로 카더라통신레벨의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녔다는 겁니다.

'야 이 형들이 엄청 존잘님들인데, 어느 날 무소르그스키의 전시회에 가서 무슨 그림을 딱 보고 영감을 윽수로 받았더랬어. 그래서 그걸 앨범으로 만들었는데, 그 그림이 앨범 껍데기에 있는 그거야.'

...아아 기억을 떠올려 볼작시니 겟 수어사이드 하고 싶어지는군요(...) 다행히 그때 제 주변에는 프록이나 클래식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없어서 대부분 '아 이 형 또 음덕질 해쌌네.' 하고 말았는데 

프록은 그렇다치고, 클래식애호가가 있었으면 이 미천한 닝겐을 두고 뭐라고 생각했을까 상상해보니 새삼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점점 나의 멍청-허세력에 대해 되짚어보게 되고, 새삼 인생이 멍청-허세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드로리안을 타고 냅다 과거로 날아가서

그 시절 그 때의 내 명치를 매우 쎄게 때려주고 싶은 순간이 몇번 있더군요. 그 중의 하나는 언제인고 하니...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핫-뮤직] 끝물세대라 [핫-뮤직]이나 [서-브], 혹은 [GMV]같은 해외음악전문잡지들을 끼고 살던 세대인데요.

빼갈것만 빼가고 올바른 인성을 지닌 음덕계의 꿈나무로 자란게 아니라, 어디서 뭐가 잘못 되었는지 호환 마마보다도 답이 없다는 음부심에 푹- 절여진 닝겐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때 그 시절 제가 친구들과 나눴던 주옥같은 대화들 중에는 "야, 락도 아니고 메탈도 아닌데 음악이야?" 라거나 "쓰레기 아이돌이 내 고막을 좀먹는 한국에서 살수가 없다!"라거나 혹은

"붕어들을 몰아내고 한국에 다시 한번 락의 중흥기를! 락 윌 네버다이!" 같은 멍청멍청한 이야기들이 있죠. 

각설하고, 이런 락뽕주의자로 살다가 어느날 불현듯 '그래, 나도 이제 쟈-즈를 들어봐야 겠어, 쟈-즈'같은 생각이 들지 뭡니까. 왜냐고는 묻지 마세요. 제 취향의 상당수는 '어느날 불현듯' 찾아오는 거라서(...)

아무튼 그래서 모종의 루트로 여기저기 찔러보니 마일즈 데이비스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영 제ㄷ...아 아니 젊은 락뽕이스트, 마일즈 데이비스의 최고 걸작을 듣기 위해 단골 음반가게로 향합니다.

"누나 안녕하세요."

"어, 너 또 왔니"

"누나 혹시 재즈에 마일즈 데이비스라고 아세요?"

"아니, 나도 재즈는 잘 몰라서" (여기서 뽕쟁이의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재-즈 하는 사람들 중에 최고라는데요, 혹시 [킹 오브 블루스] 카섿-트 있나요?"

"음 잠깐만...아니 없는데"

여기서 뽕쟁이의 허세력에 불이 붙어서, 알바누나를 세워두고 왜 음반가게에 마일즈 데이비스가 없는지, 킹 오브 블루스가 없는지 미칠듯한 108 훈계질이 들어갑니다. 

훈계질의 끝은 도매쪽으로 연락해 일주일안에 앨범을 꼭 넣어두겠다는 알바 누나의 준엄한 자기반성으로 마무리되죠 (...)


물론 재즈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때쯤 눈치를 채시고 오그라붙은 손발을 군불에 때고 계시겠지만, [킹 오브 블루스]라는 앨범은 없습니다. 적어도 마일즈 데이비스 커리어 안에서는 말이죠.

이게 뭔 소린고 하니, 원래 제가 의도했던 앨범은 [카인드 오브 블루]였는데, 그걸 기본적인 팩트체킹도 하지 않고 대충 귓구녕에 들어오는대로 '이~ 킹 오브 블루스? 그려'하고 주워 들었으니

없는 앨범을 내놓으라고 닥달을 해봤자 나올리가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때 거기에 알바누나가 아니라 사장님이 있었다면, 그리고 사장님이 리스닝에 조예가 깊...아니 그냥 기본적인 사전정보확인을 하시는 분이라면

제 귓방맹이를 찰지게 올려붙이고 '어디서 이 쪼렙이 깝쳐'와 같은 가열찬 훈계를 하셨겠지만 그 당시는 마치 하늘이 제게 '자, 내가 판을 깔아놓았으니 마음껏 부심-허세질을 해보렴'과 같은 타이밍이라...

불쌍한 알바누나는 포항으로 - 대구로 - 다시 울산으로 - 부산으로 - 그리고 서울로 전화를 해봤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존재하지 않는 앨범을 유통할 루트는 세상 어디에도 없지요.

그걸 알리가 없는 어린 뽕쟁이는 결국 한달뒤 학교에 마타도어를 퍼트리기 시작합니다.

"야, 굴다리 건너서 길건너면 바로 나오는 xxx있재, 거 가지 마라. 뭔 음악장사한다는 사람들이 마일즈 데이비스도 모르고 [킹오브블루스]도 모르고..."

물론 그때도 반친구들 중에 재즈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면 "이 멍청멍청이가 뭐라 씨부리싼노"라고 외쳤겠지만, 앞에도 말했다시피 이때는 신이 허락해준 부심-허세질의 타이밍이라...

그리고 아주 가볍게 쟈-즈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저는 대략 2-3년쯤 후 '사실은 그게 그게 아니고 이거란다 이 멍충멍충아!'라는 팩트를 알고 또 다시 겟 수어사이드 하고 싶어집니다.

고향에 내려갔을때 아무렇지도 않은척 가게에 찾아가서 슬쩍 말을 꺼내고 '에이 그때는 뭐 어려서 그랬죠.'라는 식으로 말해볼까 하면서 찾아가봤는데

가게가 없어졌더라구요 (...)


그 외에도 몇번 멍청-부심-허세력이 폭발한 적이 있었죠.

예컨대 [지구를 지켜라]시사회에 갔었다가 장준환감독 면전에서 이태리 공포영화감독의 이름을 줄줄 읊으며 이사람은 이렇고~ 저사람은 저렇고~ 질을 하다가

마무리로 "감독님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세요."와 같은 응원을 가장한 미친듯한 훈계질로 끝냈다던가 (...)

쓰다보니 자꾸 스스로가 부끄러워져서, 더 썼다간 아침부터 할복이라도 해야하는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여기까지만 씁니다. 밥도 먹어야 되고(...)

혹시 여러분들도, 소싯적에 미칠듯한 부심-허세질을 했다가 훗날에 이를 돌아보고 으아 부끄러워, 으아 내 손발, 내가 나를 선캄브리아기로 퇴화시키는구나!

라고 외쳐본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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