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있음] 셀마

2015.07.28 20:10

잔인한오후 조회 수:1327

예고편만 봐서는,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하는 인권운동의 승리를 장엄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줄지 알았어요. 제게 마틴 루터 킹이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하여, 한국에서는 원래 꿈이란 명사를 장래희망이나 소원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은 이루워진다' 같은 형용을 하도록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헛된 추측을 하도록 만든 사람 정도였습니다. ("넌 꿈이 뭐니?"라는 어색한 질문은 현대에 와서야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변혁을 위한 실무적 과정과 그 승리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에 (미국의 동성 결혼 법제화 같은 느낌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이런 마음으로는 이 영화를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랬다간 매우 고통스러울테니까요.

 

영화는 인권운동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비경제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인지를 낱낱히 보여줍니다. 누구도 그것을 이득을 보기 위해서 장기간 거기에 매진할 수 없음을 수많은 사례들로 가득 채워 보여줘요, 심지어 인격자라 할지라도. 평소의 신랄함을 챙겨 갔다면 별 타격 없었겠지만, 선례를 보일꺼라는 안일한 생각에 그만 마음을 놓았던게 잘못이었죠. 그래도 적어도 미국의 60년대에는 비이성의 공백에 신앙이라는 기둥을 집어넣어 인권운동의 천막을 펼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 과연 현대 한국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사실상 아무 이득 없이 총대 메는 사람들이 따 모은 체리를 빼먹는 것일진데, 그조차 진행될 것 같지가 않아요.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투표를 위한 일체의 등록이 완전히 사라졌고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는 법안이 나왔다는 거겠죠. 거기에 필요했던 것들은, 1. 대통령과 독대를 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 2. 믿을 수 있는 실무자 넷 이상, 3. 시위대의 심각한 탄압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매체(거기에 시위의 이유를 설명하며 1면에 실는 신문), 4. 시위 합법을 판결하는 주법원, 5. 시위자들 (6. 총선이 다가오거나, 대통령이 번혁에 호의적이거나), 정도가 있겠죠. 한국으로 치면,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와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동성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과격한 주장을 하는 종교지도자가 있고, 퀴어축제가 취소되어 동성애자들이 서울에서 천안까지 걷기 운동을 하는데 시청광장에서 시작한 행진이 한강대교에서 크게 막히고 (제가 서울 지리를 잘 몰라 말이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연일 TV매체를 타면서... 동성애 말고 다른 걸로 바꿔봐도 먼 세계 일이겠죠. 애초에 시위가 막히고 정리되어버리는 일이 하루 이틀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도 그다지 체감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요. 


살해, 폭력,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한) 협박, 분열, 탄압... 하루하루 한 둘이 죽어나가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었는지 저는 머리로는 이해가 가질 않아요. 현대에는 그것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상에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압박이 기다리고 있겠죠. 최근에는 거시적으로 쌓여있을 해결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조차 보이지도 않고, 그것이 어떤 충돌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도 없구요. 대부분을 포기하고 그냥저냥 살아남는 것만 집중하게 되는거죠. 다음 세대가 제 세대를 욕할지라도, 딱히 반박할 말도 변명할 말도 없이 그냥 살았어, 란 말 정도만 할 수 있겠죠. 


정리하자면, 어떻게 하면 원하는 식으로 일이 굴러가게 될까?라는 질문에 '(거시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을 탔기에) 상황도 좋고, 인물도 좋은데다가 따르는 사람도 있지만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거기에 또 고생을 해야만 조금 진척이 된다'란 답변을 얻은 거죠. 심지어, 구심점인 사람이 노년에 편하게 살다가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 이런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결국 누군가는 갈려들어가야 문제 해결로 한발짝 정도 움직일 수 있는 거겠죠. (거기에다 악도 무지 부지런하고 꼼꼼하다는 것까지 얹고요.) 


언젠가 정치가 예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지젝 봇에서 "발터 벤야민이 말한 바와 같이 정치를 문화화하는 것에서 문화를 정치화하는 것으로 그 초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정치가 문화화되는 퇴행적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직접적인 정치적 해결책을 통해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던 기획들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라는 인용문구를 봐버렸어요. 아냐, 그렇지 않을꺼야, 많은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알게 되는게 퇴행이 아닐꺼야, 라고 생각했었지만, 현 종편 3사를 보면서 정치의 예능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참혹하게 체험할 수 있었죠. 결국에 문제해결을 위한 단계는, 고통스럽고 힘든 계단일 뿐이고 그 자체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거죠.


제가 믿을 수 있는 단 하나는, 한국은 방향이 어느 쪽이든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거에요. (다른 식으로는 굉장히 극단적이라는 거에요.) 망해도 엄청 빨리 망하고, 흥해도 엄청 빨리 흥하겠죠. 느려질 틈도 없이 많은 것을 즐길 수 있을 거라는 거요. 생각도 못할 형태로, 예상도 못한 결과가 다가올 것이라는걸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있죠. 20 ~ 34세가 '붕괴, 새로운 시작'을 42%나 선택하는 세계라니.


P.S. 마지막의 통계치가 어떻게 나온지 궁금해서 확인을 해봤는데.. 아래의 링크에서 발표문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대답한 사람들은 5대 광역시의 202명. 시나리오는 아래의 그림 4개 중에 선호하는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녹색은 듀나님의 소설에도 나오기 힘들 정도의 설정 아닐까 싶군요)

http://futures.kaist.ac.kr/data/articles/view/tableid/data/id/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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