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7 19:04
하나.
작년 여름에 선물이는 갑자기 이상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고생을 했다. 온 몸에 두드러기 나듯이 뭔가 나서는 아이가 간지럽다고 그러는데 원인이 뭔지, 병원에 가 여러번 검사를 해도 알 수 가 없었다. 결국 의사 선생님이 자기가 뭐에 반응하는 지 모르는 알레르기 환자가 많다면서 반응이 일어나면 약을 계속 먹는 수 밖에 없다고 하셨다. 이번 여름이 다가 올때 또 작년처럼 아이가 고생할 까 걱정했는데 전혀 아무 반응없이 지나간다. 나도 작년에 갑자기 헤이즐넛에 알레르기 반응을 해서 기도가 막힌 경험을 한적이 있다. 그만큼 힘들었다. 아, 아이도 그만큼 스트레스 받았던 거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작년 이맘때엔 선물이랑 나는 아침마다 싸웠다. 선물이는 아침도 안먹겠다, 유치원도 안가겠다, 다 안한다고 하는 아이를 끌고 옷을 입히고 싸우다 이기면 입에 빵조각 넣어주고 지면 그래 먹지라 라고 하고 그러면서 출근을 했었다. 지금은 소리 높이는 일 없이 웃으면서 밥먹고 잘먹었습니다, 인사하는 아이한테 접시 가저다 놓으라고 하면서 아침을 마무리 한다. 우리 아침 먹는 걸 스카이프로 보는 친구가 가끔 다행이야 라고 말해주는 데 정말 다행이다.
조금만 일에도 까르르 웃는 아이. 며칠전에는 떡복이를 보더니 엄마 불났어, 여기 불난것 처럼 매워 라고 말하는 말할 줄 아는 아이. 말을 못하던 안하던 때에도 얼마나 큰 심장과 이해심과 아량을 가졌는 지 보여주었던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의 아이라니.
둘
지난 토요일, 스웨덴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오늘이 여름 마지막 화려한 날이라는 걸. S와 나는 내가 이제서야 발견한 시를 가로지르는 개울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갔다. 여름이 시작하던 때 이 카페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형을 만나러 미국에 가있었다. 당신이 돌아오면 여름이 가기전에 꼭 같아 가고 싶은 카페가 생겼어요 라는 문자랑 함께 사진을 보냈었는데 내가 보낸 사진은 얼마나 이곳이 아늑하고 아름다운지 보여주지 못했다. 이 카페는 1800년대의 작은 오두막과 그에 딸린 아름다운 정원으로 되어있다. 들어서자 마다 와 좋은데 라고 말하는 S보고, 그러니까, 오늘이 이런 날씨 마지막일텐데 여기 오고 싶었어 라고 말하고 살짝 손을 잡았다. 오두막은 정말 너무 좋은데 우리랑 같이 생각한 사람들은 많아서 그 안이 붐비었다. 나는 자리 잡을까? 라고 말하는 그한테 뭘 먹고 싶냐니까 자긴 물외에는 마시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나한테는 커피를 그에게는 물과 블루베리 파이를 사서 나오니 그 넓은 정원, 큰 배나무 밑 벤치에 그가 앉아있다. 내가 가져온 것을 보더니 내가 가서 스푼 하나 더 가져올께요 라고 말하는 그. 스푼 밑에 하나 스푼이 더 있는 걸 못본 모양이었다. 말없이 보여주면서, 나 생각하는 사람인데 라고 말하니까 이 별 재미없는 말이 뭐가 재미있다고 크게 웃는다. 내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동안 그는 파이와 바닐라 소스를 섞어 한 숫가락을 내입에 가져다 대었다.
지지난 주에 에밀리와 S 이야기를 하는데 시리가 끼어 들어와 누구 이야기 해요?라고 묻는데 에밀리가 응 커피공룡 남자 친구 라고 말했다. 남자 친구이구나.
우리 주위에는 노부부 한쌍, 팔에 깁스를 한 긴머리 여성을 중심으로 앉아서는 큰 사진기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던 친구들 한 무리, 아직 십대가 되지 않은 어린 딸과 같아 온 엄마, 데이트 하는 한쌍들이 이 화창한 오후를 함께 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마네의 피크닉 그림 같은, 정원에 앉아 커피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얼굴위에 떨어지는 배나무 그늘도 초록으로 느껴졌다.
셋
이렇게 힘든 일이 지나면 누가 진실한 친구인지 누가 아닌지 알 수 있다. 거짓된 모습에 괴로워 했던 나날들. 다시 생각하면 지금 나는 덕분에 누가 나의 친구인지 알고 있다. 울면서 보내던 그 날들을 같이 견디어 준 사람들이 있다. 가족도 아닌데 나와 선물이를 소중히 여긴 사람들. 나한테 소중한 사람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넷
난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모든 주어진 일들을 해가고 있다. 참 감사하다. 지난 주에 우리 리서치 세미나에 논문 텍스트를 가지고 참가했던 박사과정중 한명이 나보고 내가 지적해준 것이 자신한테 굉장한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별말을 하고 웃는데 아니 정말, 내가 뭔지 모르게 명확해 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는데 당신이 지적해준게 아 이게 뭐다를 볼 수 있게 했다니까요. 라고 말해주었다. 다행이다. 감사하다.
완벽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 어느 순간 작은 일 큰 일로 나는 또 울지 모른다. 내가 아는데 나는 약한 사람이라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The hours의 클라리사는 아름다웠던 어느 날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그때 아 이게 행복의 시작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시작이 아니었다. 행복이었어. 순간이었다고. 나는 지금 그 순간에 있다. 행복하다. 많이 감사하는 순간이다.
2015.08.27 20:22
2015.08.27 21:28
작년에 힘들 때 힘내라고 해주신거 늘 기억합니다.
2015.08.28 08:04
저말고도 많은 분들이 커피 공룡님이 행복해지라고 기도하셨을겁니다. 마침내 행복해지셔서 다행이고.. 앞으로도 잘 지켜 나가시길 바랍니다. 스케쥴이 안맞아 아쉬웠지만 언제든 기회가 되면 맛있는 초밥 한번 대접하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선물이도 초밥을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2015.08.27 21:15
인세-수입의30% 주시면 출판사 연결해 드리고 원고 정리 해드리겠습니다
2015.08.27 21:29
뭐 이런 글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있다면.....
2015.08.27 21:18
2015.08.27 21:31
그런 거 볼때 이 나라가 지난 200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제 동료가 사는 집도 200년이 넘은 집이에요. 방하나는 오리지널 그대로 입니다.
2015.08.28 08:31
스웨덴…러시아와의 북방전쟁을 마지막으로 200년간 평화로운 나라였죠. 2차 대전 전 바로 이웃인 핀란드가 소련과 겨울전쟁을, 대전 중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독일 점령지였던거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듯 합니다. 전쟁 끝나고 이웃인 두 나라는 전후 나치 청산하느라 난리였는데 스웨덴은 물론 평온…멋진 나라네요.
2015.08.28 15:14
스웨덴 지금 왕비의 아버지가 나치 였다는 ... 사실 나치들 많았어요. 아마 그래서 독일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봅니다.
2015.08.28 16:49
그랬었군요…@_@ …그 동네 근현대사도 제대로 파보면 진짜……-_-;;
2015.08.27 22:30
와...가끔씩 스웨덴에 가보고 싶어지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어요 ㅎㅎㅎ
행복하시다니 다행이에요. 참 다행이고 고맙네요.
2015.08.27 23:11
곧 오늘 동료가 해준 무서운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요즘 영국에 유행한다는 nordic noir 가 왜 있는지 이해가 가요...
2015.08.27 23:20
여름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궃은 날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걸 마시고 녹아드는 기분입니다. 아늑합니다.
2015.08.28 00:05
딴이야기, 요즘 선물이가 좋아하는 단어가 아늑하다 입니다. 엄마 아늑해 그치?
2015.08.27 23:39
2015.08.28 00:06
벌써 가을인가요?
여기도 이번 주 아침 공기가 찹니다.
2015.08.28 00:42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궁금한 게 있어요. 선물에게 말 할 때는 한국말로 하나요? 아님 그 동네 말로 하나요?? 쓰신 에피소드 보다 보면 그쪽 말인 것 같다가도 오늘 같은 건 한국말 표현이 아닌가 싶고, 양쪽 다 쓰신다면 바이링구어가 되는 셈인라 말이 더 어렵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그렇네요.
2015.08.28 00:58
어렸을 때는 두나라 말을 다 했는 지 선물이 말이 늦어지고, 시작한 말이 스웨덴어라 스웨덴어로 말합니다.
그런데 선물이는 이상하게 바이링구어입니다. 영어 프로그램들으 보고는 영어도 좀 하고, 한국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고 한국어도 조금 합니다. 저는 아이가 영어로 말하면 영어로 대답하고 한국어로 하면 한국어로 하고 하는데 제일 많이 쓰는 말은 역시 스웨덴어입니다.
2015.08.28 09:08
저는 커피공룡님 글을 읽으면서 좀 행복해져요. 선물이와 따뜻한 주말 보내시길.
2015.08.28 12:50
제글을 읽으면서 행복하시다니 기분 좋네요
2015.08.28 09:49
저는 한국 사람이라 읭? 왜 스푼이 두개나 필요하지? ㅋ 그랬네요.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2015.08.28 12:50
하하, 두사람입니다.
2015.08.28 14:16
아니 저기..(소곤소곤) 스푼 한 개로 두 분이 같이 드셔도 될 것 같아서(부끄부끄)
양치질은 한 칫솔로 못하겠지만 케익 먹기는 스푼 한개로 먹겠더라고요 *^______^*
찌개 하나 놓고 숟가락 여러개 들락날락하는데 너무 익숙해졌다 싶었네요. ㅋ
이성의 사랑과 일에서 존경을 다 가진 인생이라니~ 부자시네요. 거기다 선물까지 받으셨고요. ^^
행복하십시오~
2015.08.28 15:18
아... 사실... 하하.
그런데 일에서 존경이라니, 아닙니다. 제가 겉으로 남들이 보기에 점수 높아지는 일에는 그렇게 잘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마음이 많이 급합니다. 그런데 그런식으로 보기에, 점수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이지만 이렇게 누구의 박사 논문에 도움을 주었다는 말은 참 좋아요. 제가 논문을 써봐서 그게 얼마나 떄로는 외롭고 힘든일인지 아니까요.
그렇게 잘나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2015.08.28 10:14
앞으로도 쭉 이러셨으면 좋겠어요.
2015.08.28 12:51
저도요. (아 머리 아픈 거 빼고요)
2015.08.28 16:21
안녕하세요, 커피공룡님
며칠 전 몽블랑 에피소드가 담긴 글을 읽고 부럽기도 하고 찡하기도 해서 댓글을 달려다 말았는데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이 그 글의 주인공인 걸 알고 오후 내내 스토커(?) 마냥 공룡님 글을 검색해서 읽었답니다. 그리곤 이따금씩 인상깊게 읽었던 글을 쓰셨던 분이라는 것도 이제야 알게되었어요. 심지어 그 몇 시간 사이에 주책맞게 티슈를 꺼내들고 안구의 습기를 찍어낸 타이밍도 몇 번 있었답니다.
좀 늦은 나이에 직장일과 대학원을 병행하느라 심신이 지쳐 이번 방학에는 어떤 단행본도 사지 않고 글자란 글자는 원래 싫어하던 사람인것처럼 지냈는데 순수하게 글자에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했어요. 케익과 음식 관련글을 보면서는, 지난 휴가를 같이 보낸 엄마처럼 먹을거리를 챙겨주는 제 친구가 떠올라 더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제게는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운 상대가 있는데, 어른의 만남을 이어가시는 솔직한 모습이 보기 좋네요. 선물이랑 친구들이랑 동료, 이웃, 새로운 인연과도 좋은 날과 추억들 듬뿍 쌓아가시기를 응원할게요! 다음주면 개강이라 또 전쟁같은 넉 달을 보내야 하는데 감성에 배터리를 충전한 기분을 선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힐링받고 갑니다^^
2015.08.28 17:07
제가 너무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문장을 읽는데..참 멋진 그리고 아름다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행입니다. 행복하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