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기_1

2016.08.24 22:21

사팍 조회 수:2016

이 글은 2015년 1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0.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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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이를 재우고 연말 기분에 아내와 함께 맥주를 먹었다. 피곤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점심시간에 가족모임이 있기 때문이다. 아기 짐을 챙겨 자동차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 운전은 내가 했다. 운전 중에 졸려서 DMB를 틀었다. 연말 시상식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관심이 있어서 볼륨을 한단계 높혔다. 뒷자리에 아이와 아내가 자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보는데 아내는 시끄럽다며 꺼달라고 짜증을 냈다. 스피커가 뒤에 달려 있기 때문에 내가 듣는 것 보다 더 시끄럽게 들렸나 보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DMB를 껐다.

가족모임은 아버지 형제자매가 모인 남매계다. 작은 아버지 환갑을 겸해서 고양시에 있는 한우 고기집이 모임 장소였다. 핏기가 가지지 않은 등심이며 안심이며 육회며 잔뜩 먹었다. 자리가 무르익고 술도 좀 마셨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마셨고 우리들은 사촌들끼리 마셨다. 꼰대 같은 이야기도 했고 우스개 소리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작년에 취직 하고 연말에다 뭐다 술자리가 많았고 직장생활 적응을 하느라 약간 피곤하기는 했지만 즐겁게 놀았다.

고종사촌 누나 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집에 왔다. 누나 집은 우리 집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알았다고 한들 잦은 왕래는 없었겠지만 알고 나니 앞으로 한두 번 정도는 들려 차 마시며 이야기하자는 생각을 하였다.

집이다. 아내도 아이도 모두 피곤하였지만 그 중에 내가 가장 피곤하였다. 감기 기운이 느껴졌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푹 자면 나아지겠지란 생각을 했다.

밤에 계속 코 안에 뭔가 큰 덩어리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면서 생각했다. 코감긴가? 항상 나는 코부터 감기가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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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이 까끌까끌하다. 손을 넣어 잇몸을 훓어보니 선지가 딸려 나온다. 화장실에 가 거울을 봤다. 잇몸에 온통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기 때문에? 혹은 스케링을 안해서? 일단은 칫솔질을 하고 입을 행구었다.

직원회의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나른한 출근길. 과학관 사진업무가 내 임무이기 때문에 직원회의 사진을 찍었고 점심때에는 시무식 겸 다른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코스요리처럼 해물파전과 두루치기, 버섯순두부 등등 많은 음식이 나왔다. 밥과 함께 막걸리 한사발도 먹었다. 밥맛은 꿀맛이었다.

이를 닦았다. 입을 행구고 물을 쏟아내니 선지와 피가 묻어 나왔다. 별일이다. 계속 코 안에 뭔가 큰 것이 뭉쳐 있는 느낌도 남아있었다. 감기다. 피곤해서다.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과천과학관은 주말 손님이 더 많다. 주중에는 현장학습 초중고등학생 뿐이다. 주중에는 오전을 노리고 주말에는 점심 이후에 사진을 찍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래서 첫 토요일 근무를 신청했다. 다행히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행사도 있어서 함께 사진을 찍기로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 피곤감은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잠을 푹 자면 괜찮아 질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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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쯤 일어나 과천과학관에 출근을 하였다.

주말 오전 사람이 별로 없다. 과학관 전시물 사진은 관객이 많은 사진도 필요하지만 관객이 없는 사진도 필요하다. 전시물을 잘 찍기 위해서는 전시물을 잘 이해해야 한다. 아니면 계속 찍으면서 전시물을 관찰하면 된다. 오늘은 촬영이 중심이 아니라 관찰이 중심이다. 여러 전시물을 슬렁슬렁 구경하듯 보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90%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전시물을 잘 찍을 수 있을까에 대한 자료가 될 것이다. 전시물 공간은 대체적으로 너무 어둡다. 그래서 셔터스피드와 감도, 조리개를 잘 조절해야 한다. 흐르는 사진, 포커스가 맞지 않은 사진이 나올 확률이 높다. 그래서 감도가 높게 조절이 되는 내 사진기 7d를 가져다가 시험적으로 촬영을 해봤다. 회사 사진기도 좋지만 옛날 기종이여서 약간 불편함이 있다. 그래도 회사사진기로 못 찍을 사진은 없다. 전임자도 그 사진기를 가지고 충분히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고 이를 닦았다. 선지와 피는 아직 입안에 있었다. ... 코가래가 나왔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피딱지였다. 500원 동전보다 조금 큰 피딱지였다. 노란색은 하나도 없는 검붉은 색의 피딱지. 놀랐지만 이게 내 병의 전조현상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밥을 먹고 쉬는 시간. 안선경 감독에게서 긴급 문자가 왔다. 노트북 수배에 관한 것이었다.

안감독은 연극 연기를 하다가 영화감독이 된 분이다. 영화 매니아라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표현하는 분이다. 연극 연기를 전공했기 때문에 연기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계신 분이다. 어떡하면 극 중 인물을 연기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떡하면 연기연출을 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안선경 감독은 영리하고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다. 작년에 서울영상미디어센터에서 수강했던 연기연출1에 감명 받아 연기연출2를 수강하였다. 오늘 오후 연기연출2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이다. 지금까지 찍은 결과물들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술자리를 가질 것이다. 몸이 약간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 쯤 이야라는 생각을 하였다.

회사 노트북을 잠시 빌리기로 생각했다. 월요일에 갖다 놓으면 괜찮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일이 끝나고 노트북에 내 카메라에 바리바리 싸들고 정릉으로 향하였다.

7시에 도착을 해야 하는데 성신여대입구역에 도착하니 710분 전이었다. 약속 장소에 가려면 버스로 3정거장 정도 가야하고 초행이니 한 2~30분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남겼다.

버스에 탔다. 옆에서 누군가 아는채를 했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ㅌㅁ씨다.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만나 좋기는 한데 서먹함이 좀 있다. 무례한 내 기질과 우아한 그녀 기질이 잘 맞지 않는 건지. 말을 시켜도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인지. 궁금하다.

정릉 공작소에 도착했다. 노트북 말고는 모든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2기의 갖 30살이 된 첫만남에서 보인 수즙음에 비해 의외의 연기 내공을 가지고 있던 이ㄱㅎ, 진학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기자의 꿈을 꾸고 있는 21살 방황하는 청춘 변ㄱㅁ, 그냥 사차원 최ㅇㅅ이도 왔고 연기연출 1기와 2기를 같이 듣게 된 로봇과 애니메이션 전공인 강ㅅㅎ님도 왔고 1기 때 같이 강의를 들은 미술선생님 서ㄴㅅ, 이성적 컷트바리를 중시하는 정ㅇㅂ이도 왔다.

지금까지 찍은 영상을 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중간에 입안에 피 고름이 너무 차 휴지로 몰래 닦아 냈다. 영상을 보면서 코를 조금 팟는데 코피가 났다. 나는 오늘 이후에는 절대 무리한 스케줄을 잡지 않기로 결심했다.

술자리에서 속 이야기들이 나왔다. 감독님에게 각자 자신과 감독님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감독님은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감독님의 말에 공감이 갔다.

술자리가 2차로 넘어가고 필름이 끊기었다. 중간 중간 기억 나는 것은 ㄱㅎ이가 나를 부축해서 택시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술에 취해 관헌이에게 계속 다음에 같이 작업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집에 왔고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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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아내와 함께 육아를 나눠야 한다. 아내도 육아 때문에 피곤할 거니까. 11개월이 된 아이는 점점 더 씩씩해지고 호기심과 운동신경이 늘어갔다. 그만큼 아내도 힘들거다. 게다가 지난해 8월부터 4개월을 쉬었던 동안 어느 정도 육아를 분담했던 상황에서 갑자기 내게 직장이 생긴 상황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내 입장에서는 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주말 육아 분담은 중요하다. 근데 내가 너무 피곤하다. 핑계는 어제 주말 근무와 술자리다. 아내는 시어머니를 불러 나를 쉬게 해주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푹 꺼저 잠이 들었다. 낮에도 잘 자고 밤에도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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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잠은 잘 잤는데 피곤함은 가시지 않고 입안의 선지는 계속 나온다. 아내는 특단의 조치로 어머니를 하룻밤 더 우리집에 있게 하기로 하였다.

회사에 출근했다. 월요일은 과학관 휴관일이다. 하지만 업무가 떨어졌다. 작년 한해에 있었던 행사를 정리하는 연보를 발간할 건데 거기에 들어가는 사진을 골라 놓으라는 것이다. 작년 전임자에게 2주 동안 인수인계를 받았다. 나는 재수가 좋은 편인데 전임자는 그 전임자에게 2시간 인수인계를 받았단다. 아무리 인수인계가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남이 찍은 사진 그것도 컴퓨터 안에 그 사람의 체계로 되어 있는 폴더에서 파일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파일을 찾지 못하면 찍어야 한다. 나는 하루 종일 사진을 찾고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을까 계획하였다.

남들이 내 입안에 피를 볼까 조금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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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집에 도로 가신단다. 아버지가 혼자 있는게 여간 걱정스러운 듯 했다.

출근을 해서 오전에는 과학관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는 광각렌즈를 이용해 전체가 한눈에 보이고 역동적인 모션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무실에 들어오는데 오후 출장을 가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지하철 안에 과학관홍보영상이 상영이 되는지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그것도 출장인가? 하여튼 지시에 따라서 2시부터 8시까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돌며 동영상 광고를 보았다. 계속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광고. 광고를 보기 위해서 빳빳이 들어야 하는 고개 때문에 힘이 들었다. 결국 과학관홍보영상이 제대로 상영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담당자에게 보고를 하고 집에 돌아갔다.

제대로 일이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무리를 해서 인지 집에 가는 길이 무거웠다. 가는 길에 약국에 들려 잇몸질환 약을 샀다. 처음에는 인사돌 같은 것을 사려 했는데 먹는다고 금방 낫는게 아니라는 소리에 싼 약을 샀다. 집까지 긴 거리를 걸었다. 점점 처지는 발걸음에 중간에 마을버스를 탈 껄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반 이상 걸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 했다. 무거운 발걸음. 이런 게 직장생활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집에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아이가 나를 향해 기어 왔다. 내가 재롱을 피우는 아이는 그런 재미를 아는 듯 웃었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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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에 출근해서 오전 한가한 시간에 여러 사진을 찍었다. 오후에는 광고 담당 주무관과 광고협력업체 직원과 함께 2호선을 돌며 과학관홍보영상이 나오는지를 확인하였다. 협력업체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어제 내가 왜 그 광고를 보지 못했는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운행하는 차 중에서 편성차량이란게 있어서 그 차량에서는 특정 광고만 나온다는 것이다. 어제 골라도 그런 차량만 탔던 것이다. 그러니 광고를 볼 수 없지.

하여튼 짧은 40분 동안 광고가 두 번 방영이 되는 것을 봤다. 시간이 잠깐 남아 사당역에 있는 커피숍에서 차를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담당 주무관에게 부부가 10년을 같이 살면 전우애로 사는 것이 맞냐는 질문을 하였다. 그 분은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니라며 자기 부부 관계는 친한 친구처럼 산다고 말했다. 나도 그 분의 말처럼 내 아내와 오래오래 친한 친구처럼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주무관이 내 얼굴을 보고 좀 피곤해 보인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회사에 돌아와서 양치를 했다. 다시 피덩이가 나왔다. 때마침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묘역 근처에 사과나무라는 치과가 있는데 수요일에 야간진료를 한다며 가보라고 말했다. 나는 어떻게 야간진료가 있냐는 것을 알았냐고 물었고 엄마는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서 알았다고 말했다. 지금껏 컴맹인 줄 알았던 엄마였는데 아들이 아프다니 별거별거 다 신경을 쓰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화로 치과예약을 했다. 퇴근을 해서 치과에 갔다. 치과 선생은 내 입안을 보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치아 엑스레이를 찍고 치아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양쪽 어금니는 발치를 해야 하고 이 중간에 충치와 치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잇몸에 피가 나는 증상은 내과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내과 치료가 끝난 다음에 치과에 오라고 말했다.

나는 집에 가면서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아내는 동네 내과는 진단을 할 수 없다며 차라리 큰병원 응급실에 가자고 말했다. 입원하면 직장에 병가를 내야 하는 거며 목요일마다 있는 시나리오 모임 생각에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아내 말을 듣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떡볶기를 만들어 먹고 기저귀며 분유며 아기용품을 챙기고 차를 타고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차를 몰고 가면서 우리는 간만에 가족 외출이라며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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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습니다.

이 병이 걸리고 내 눈 앞에 죽음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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