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

2016.10.26 22:30

여은성 조회 수:890


 1.요즘은 Q의 가게에 안 가고 있었어요. 가고 싶은데 못 가는 거니까 못간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요. 약간 삐진 일이 있어서 말이죠. 플러스인 상태의 나를 유지하는 건 힘들지만 마이너스 상태의 나를 박제해서 무한히 유지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예요. 상대가 먼저 다가와서 마이너스 상태를 해제해 주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곤 해요.



 2.옷을 10벌 산다면 그 중 한벌정도가 내 옷이고 9벌은 남의 옷이예요. 남의 옷과 내 옷을 사는 건 완전 달라요. 남의 옷을 살 때는 그냥 멋진 옷을 사면 되거든요. 누군가에게 입혀지지 않아도 옷 자체가 멋진 옷 말이죠. 그리고 그 옷이 선물할 사람에게 걸쳐졌을 때 여전히 멋질지 어떨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애초에 그런 걱정을 해야 하는 상대라면 옷 선물을 안하겠죠. 아니, 옷은커녕 어떤 선물도 안하겠죠. 


 한데 나는 옷이 별로 필요가 없어요. 정확히는, 좋은 옷이 필요가 없어요. 나는 좋은 옷보다 편한 옷이 낫거든요. 흔히 좋은 옷이라고 여겨지는 옷은 편한 것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고요. 좋은 옷을 사오면 입으려다가도 '그냥 오늘은 편하게 나가자'하는 날이 반복되어서 장롱에 넣어둔 채로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고...하다가 결국 3년이 지나갈 때쯤 '어차피 버려질 옷인데 마구 입는 옷으로 하자'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요즘은 옷을 살 때 첫 쇼핑에서는 어지간하면 사지 않아요. 돌아와서 그 옷이 자꾸 생각나면 다시 가서 입어보고 사는 편이예요. 어쨌든 기본적으로 옷 쇼핑에 있어서만큼은 내 것을 고르는 것보다 남의 것을 고르는 게 더 즐겁기도 하고 보람있기도 해요.



 3.저번 주에도 그렇게 눈에 밟히는 옷을 사러 갔는데 사실 30%정도는 Q의 생일선물을 사고 싶다는 핑계로 나간 거였어요. 하지만 나는 삐진 상태니까요. 옷가게까지 가더라도, 삐진 상태의 나도 선물 구매에 동의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삐지기 싫어하는 내가 만들어내야 했어요. 


 그리고 여성매장 쪽을 걷다보니 삐진 상태의 나를 설득할 만한 명분이 떠올랐어요. '공정함'이요. Q보다 훨씬 덜 특별한 인간들에게도 선물을 했거든요. Q보다 내게 훨씬 고기를 덜 사준 인간들에게도 선물을 했고요. 생일 선물도 아니고 그냥 선물을요. 그러니까 Q에게 생일선물도 안 주고 넘어가는 건 너무 공정하지 않은 거죠. 이건 삐진 나도 공감할 만한 이유여서 선물을 하나 사기로 했어요. 정확히는, 내 옷을 사고 다시 다음날 수선맡긴 옷을 찾으러 갈 때 사게 됐어요.



 4.휴.



 5.드레스를 사는데 직원이 '선물하실 거예요?'라고 물었어요. 평소엔 그냥 넘기곤 하는 말인데 그날은 약간 신경이 긁히는 것 같았어요.


 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죠? '네'라고 대답할지 '제가 형상변환자인걸 용케 알아보셨군요. 다음 주의 제가 입을 드레스 맞아요.'라고 대답할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까요? 왜 옷가게 직원은 이런 무의미한 질문을 해서 우주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걸까요? 이걸 선물로 사는 게 아니면 대체 다른 경우가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옷을 샀어요. 뭐...약간 신경질적인 상태여서 들은 생각이었어요. 



 6.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만 문제는 Q가 언제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거였어요. 물론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무작정 가게에 가 보면 되는거지만...없으면 어쩐지 스스로가 처량할 것 같아서요. '이봐! 저 사람 사장님 선물을 사왔어!' '꽃다발 사오는 것보단 덜 찐따같네.'라고 수군거리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 것 같아서 말이죠.  


 어쨌든 서프라이즈를 시전하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커서 오늘 가게에 나오냐고 전화해 봤어요. 고양이가 상자에 들어있는지 알려면 상자를 열어봐야 하니까요. 선물을 샀는데 주려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하니 가게로 오라고 했어요. Q가 뭘 샀냐고 물어봐서 '2류 브랜드'라고 대답했어요. 이건 관점에 따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Q의 시점을 고려해보면 이게 맞는 것 같아서요. 그야 브랜드를 물어본 게 아니라 어떤 물품을 샀는지 물어보는 거란 건 알았지만...그냥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겠어서 그렇게 대답했어요.



 7.지금 생각해 보니 72%정도였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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