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의 원작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을 듣고 의아하셨을 겁니다. 외계인의 문자 언어를 연구하는 과정과 사고의 변화 양상이 1인칭의 서술 방식을 따라 굉장히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소박하지만 놀랍고 깊은 그 작품을 영상으로 옮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니까요.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북미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전 이 영화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원작이 '글'이기에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요소들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변용할지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연구 내용은 생략되거나 영화라는 매체에 어우러지지 않게 설명조의 대사로 처리됩니다. 아예 중간에 남성 캐릭터의 나레이션에다 한 씬을 통으로 할애하는 부분까지 있는데, 원작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이렇게 중간에 시점을 바꾸어 버리는 시도가 얼마나 작품 내 일관성을 깨고 주제를 망가뜨리는지 안 봐도 예상 가능하시리라 봅니다.
게다가 단편 소설을 장편 영화로 바꾸다 보니 스케일을 키워 놓았는데 그게 상당히 우스꽝스럽습니다. 클라이맥스의 교차편집은 (나쁜 의미에서) 인터스텔라 속 클라이맥스 교차편집을 연상시키더군요.
봉준호가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이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영화화 감독을 제안받았는데 각본이 원작의 매력을 죄다 날려먹고 저메키스의 '콘택트'스럽게 만들어 놨길래 자기가 각본 다시 쓰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아예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된 일화를 밝힌 바 있습니다. 완성본도 봉준호가 각본에서 느꼈다는 딱 그 정도의 느낌입니다. 무난한 방향으로 괜찮은 완성도의 느낌이지만, 그 원작의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무난하다 종종 낯간지러운 SF 영화를 만드는 건 여러 모로 낭비입니다.
봉준호가 어떤 식으로 각본을 다시 쓸 예정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원작을 읽어보지 않은 1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어불성설일지라도 영화를 괜찮게 봤고 이 영화를 통해서 원작이 궁금해진 1인으로서 그래도 이렇게나마 영화화된 게 안 된 것보단 낫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