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와 '반도', 창작의 태도와 실종된 형식에 관하여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대족장 실바나스가 “호드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외치는 순간 바보 취급 받은 것 같았다. 그간의 플레이를 배신하는 그 한마디에 이 게임에 대한 애정을 접었다. 최근 게이머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유의미했지만 불편했다. 영화 <반도>에 관한 혹평 속에서 또 한번 기시감에 사로잡힌 후 평자로서의 나와 대중으로서의 나, 그 간극을 좁혀보려 이 글을 쓴다.

너를 이해한다, 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함부로 입에 올리기 두렵다. 스스로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히 타인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이해해”라는 단어에 담긴 온기와 선의를 넉넉히 짐작함에도 직접 그 말을 들으면 도리어 마음이 차게 식어버리는 기분이다. 내가 가까스로 받아들이고 건넬 수 있는 건 너를 이해하기 위해 애써보겠다는 다짐 정도다. 언어는 대개 진실의 주변부를 맴돌 따름이고, 말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더듬고자 이야기를 짜낸다.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이하 <라오어>)가 걸작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큰 부분은 아름답고 강렬한 15분간의 오프닝 덕분이다. 이건 픽사의 애니메이션 <업>에서 칼과 그의 아내 앨리의 여생을 압축한 5분의 무성영화 오프닝에 비견할 만한, 게임사에 남을 오프닝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 조엘의 심정은 감히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라오어>는 게이머들이 잠시나마 조엘이 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들려주고 체험시킨다. 이후 조엘이 퉁명스런 얼굴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앨리를 지키고자 하는 조엘의 모든 행동을 납득할 수 있다. <라오어>의 엔딩에서 세계의 구원 대신 앨리의 목숨을 택한 조엘의 거짓말을 들은 앨리는 짧게 답한다. “알겠어요.” 조엘이 무슨 선택을 했건,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받아들이겠다는 침묵의 긍정. 함부로 설명하지 않는, 언어 바깥의 교감을 통해 <라오어>는 그렇게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이하 <라오어2>)와 <반도>를 둘러싼 반응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좀비가 원인이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지만 좀비 자체보다는 이후의 상황, 살아남은 인간들의 반응과 선택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무엇보다 유난히 겹쳐 보이는 건 콘텐츠 자체보다 이를 소비하는 대중의 반응이다.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두 작품을 두고 플레이어와 관객은 일제히 반발 중이다. 둘 다 성공한 전작을 등에 업은 기대작이었지만 기다렸던 게이머와 관객에게서 쏟아지는 혹독한 평가는 게임과 영화라는 형식적인 차이와 거리마저 건너 두 작품간에 유대감을 만들어낸다. 다만 <라오어2>와 <반도>에 대한 낮은 평가와 불만의 양상은 조금 결이 다른 것 같다. 전자는 게이머를 불편하게 만들어 모독하고, 후자는 관객을 무시하며 불쾌감을 유발한다. 한쪽은 게이머들을 지나치게 믿고 있고, 다른 한쪽은 관객을 너무 낮춰 보고 있다. 그 결과 <라오어2>에 쏟아지는 건 제작자를 향한 분노인 반면 <반도>를 향해선 실망과 조롱, 체념이 이어진다. 특히 <라오어2>의 경우 평단의 우호적인 반응과 게이머들의 분노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사례를 통해 흔히 ‘대중’이라 지칭되는 모호한 대상의 윤곽과 불분명하게 유통되는 믿음에 대해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창작자의 태도와 수용자의 반응,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잃은 고유한 형식에 대한 탐색과 반문이다.

영화 같은 게임 <라오어2>, 사라진 플레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오어2>는 빼어난 작품이다. 공들인 그래픽과 향상된 조작성은 물론 게임 디자인 면에서도 치밀한 구성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체험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이 속편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어2>가 좋은 게임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긴 어렵다. 창작자 닐 드럭만의 의도와 의지는 충분히 전달되지만 그것이 온전히 납득이 가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있는가. 개인적으로 사실상 이미 예술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닐 드럭만은 이 오래된 명제를 꺼내 새삼스레 도전장을 던진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술이 무엇인지부터 정의내릴 필요가 있는데, 닐 드럭만은 실로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룬다. 소비자의 기대와 쾌락에 봉사하는 대신 고통과 불편을 안겨줌으로써 플레이어와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충돌 끝에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새로운 체험을 도출해내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 도전은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이것이 ‘플레이’를 기반으로 한 게임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혹은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오어2>의 정서적 핵심은 자기부정과 파괴에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묻도록 유도하는 것, 게이머를 밀어내고 몰아붙여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끝내 실패를 통해 여기 있음을 감당하게 하는 것, 압축하면 실존적인 서사라고 해도 좋겠다. <라오어2>는 전작이 쌓아올렸던 것,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체계들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를 뒤흔든다. 좁게는 전작의 주인공인 조엘을 죽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구성이 그렇다. 전작 주인공의 머리를 골프채로 깨부순 후 싸늘하게 식은 시신에 침을 뱉는 행위는 앨리에게 복수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게이머에게 모욕감을 안긴다. 애정을 쏟고 감정이입했던 전작의 모든 플레이와 고뇌(세계를 포기하고 앨리를 구했던, 이기적이고 애틋하며 인간적인 조엘의 선택)를 부정당한 당혹감 뒤로 이 이야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불안이 파도처럼 밀어 닥친다.

<라오어2>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앨리의 시점으로 플레이를 시키다가 별안간 적인 애비의 시점으로 전환하여 다른 각도에서 플레이하도록 강요한다. 이건 단순히 애비의 사정에 면죄부를 주고 복수의 허망함을 깨닫게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라오어2>는 도덕적인 명분과 당위를 찾는 서사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다. 실패 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를 지키는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탐구라 해도 좋겠다. <라오어2>의 모든 인물들은 실패한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인류의 절멸을 앞두고 각자도생하는 그곳은 애초부터 불가항력적이고 부조리한 세계다. 게임은 인물들의 행동동기마저 부정당하는 세계에서 끝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되묻는다. 사실 이건 전작에서 앨리의 목숨을 택했던 조엘의 선택과도 맥을 같이한다. 지옥같은 세상, 옳고 그름으로 가를 수 없는 문제들, 최악의 상황과 들끓는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분노와 허탈감, 탈진 상태의 고통을 겪은 후에 지옥 속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무게를 절감한다. 여기까지가 닐 드럭만의 고매한 의도다.

닐 드럭만의 스토리텔링은 합리적이다. 관객은 ‘나’라는 세계를 부수는 폭력적인 작업을 통해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앨리의 선택을 목격한다. 실패를 통해 실존을 증명하는 건 그리 드문 서사가 아니다. 문제는 <라오어2>가 영화가 아닌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라오어2>에는 플레이와 게이머는 없고, 이야기와 이를 목격하는 관객만이 존재한다. 오픈월드처럼 디자인되어 있지만 플레이는 완벽히 제한되어 있어 유저들은 선택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한다. 물론 메인 서사와 엔딩이 결정되어 있던 건 <라오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오어2>의 경우 플레이어가 쌓아온 체험과 지나온 시간에 대한 해체까지 강제한다는 점에서 사뭇 결이 다르다. <라오어2>에서 가장 폭력적인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다. 플레이어는 객석에 몸이 묶인 관객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창작자의 의도를 강제로 수용해야 한다. 요컨대 이 게임의 공격대상은 게임을 하고 있는 플레이어다.

“논란의 핵심인 애비에 대한 플레이는 결코 그가 조엘을 죽이고 앨리와 싸우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그러니까 그래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게임이 보여주는 것은 전자까지다.”(‘<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비극적 아이러니를 담아낸 위대한 속편’, 위근우 칼럼니스트) 스토리텔링 단위에서 위근우 칼럼니스트의 지적은 정확하다. <라오어2>의 스토리텔링은 정당성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유를 말해주는 것에 머문다. 하지만 여기에 게임 플레이라는 행위가 더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영화처럼 단지 이야기를 ‘목격’할 땐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이건 플레이어가 직접 손으로 시간을 들여서 행위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오어2>는 애비를 위한 변명의 내러티브를 만들진 않는다. 대신 게이머를 향한 창작자의 공격에 대해서는 그래도 된다고 정당화시킨다. 이 게임의 진짜 폭력은 거기서 시작되고, 대중(게이머)의 불쾌도 거기서 발생한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가장 오래된 숙제 중 하나는 게임 플레이와 이야기의 불일치다. 스토리가 전하고픈 메시지와 플레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예컨대 대상을 쏘는 ‘행위’를 주축으로 디자인된 게임에서 폭력은 일종의 당위이다. 아예 작정하고 모든 걸 부수는 데 매진하는 스토리라면 관계없겠지만 스토리의 폭을 넓히고 깊이 있는 메시지를 넣으려고 할 때 여지없이 이러한 플레이의 한계에 의해 제약당한다. <언차티드> 시리즈를 예로 들자면 주인공의 정체성은 사람 좋고 유쾌한 보물사냥꾼이지만 실상 그가 벌이는 행위는 학살이나 다름없다. 개발자들은 이른바 ‘루도 내러티브’라 불리는 이러한 부조화를 줄이고 플레이의 목적과 서사의 방향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라오어2>에서 발생하는 결정적인 부조화는 조엘과 애비, 어느 쪽으로 플레이하든 살인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생존을 위해서건 복수를 위해서건 행동에는 명분과 목적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게임 스토리란 플레이를 위한 동기 제공이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라오어2>의 스토리텔링은 플레이 자체를 동의할 수도 없고 하기 싫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불쾌한 고문으로 바꿔버린다. <라오어2>의 플레이 디자인은 전작, 아니 대부분의 AAA게임과 유사하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죽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는, 쏘고 베고 찌르는 살육의 쾌감을 바탕으로 한다. 거기에 생존을 위한 다양한 행동과 퍼즐들이 더해져 살육보다는 생존을 위한 긴장감이 주를 이루면서 변주를 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앨리가 애비를 향해 복수의 행보를 걸을 때 관객은 응당 함께 분노한다. 상대의 몸에 칼을 쑤셔넣는 불쾌함을 감수하는 건(혹은 이를 쾌감으로 소비하는 건) 오직 내 행동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별안간 애비의 시점에서 긴 설명과 함께 그동안의 행위들이 의미 없었음을 설교 들을 때 플레이어의 긴 행위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다.

그 부정과 자기 파괴야말로 이 게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자기 해체의 체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이 게이머를, 그리고 게임을 한층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극장을 나온 뒤에 비로소 다시 시작되는 영화들처럼, 플레이가 끝난 후에 손끝에 남은 불쾌함을 곱씹어보는 게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일방적이며 모욕적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닐 드럭만의 메시지에 공감하겠지만 어떤 이는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라오어2>는 거부라는 선택지마저 차단한 채 실패의 체험이라는 정해진 답을 강요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실패를 통한 실존의 자각인지, 실존을 위한 실패의 강요인지 헷갈린다. 요컨대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태도다. <라오어2>에는 플레이어에 대한 공감이 완전 생략되어 있다. 플레이의 감각과 스토리의 결과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이 게임은 게임이라기보다는 관람을 강요하는 영화에 가깝다. 게임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방식이 이렇게 플레이라는 본질을 외면하고 스토리텔링이라는 결과물에 집착하는거라면 나는 차라리 오락과 유희의 영역에 남는 걸 택하겠다.

게임 같은 영화 <반도>, 대중에 대한 오해

한편 철저히 오락과 유희에 맞춰 기획된 <반도>를 보면 다시금 생각이 복잡해진다. <반도>를 둘러싼 아쉬움의 대부분은 개연성의 부족, 그리고 신파로 대표되는 지나친 감정의 강요에 쏠린다. 정석(강동원)은 왜 굳이 매형을 따라 반도로 다시 들어가는지, 유진(이레)은 뭘 믿고 일면식도 없는 정석을 도와주는지, 황 중사(김민재)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정석 일행을 쫓는지, 유진의 가족들은 지옥 같은 반도에서 어떻게 그렇게 해맑고 순수할 수 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질문들이 납득되지 않을 때 <반도>는 액션의 전시만을 위해 어설픈 이야기와 억지스런 상황을 이어 붙인 영화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들어가보면 <반도>가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공백들, 인물의 행동 동기와 캐릭터는 설명이 가능하다. 다만 어떤 지점에서는 시간 관계상 설명하지 않고, 어떤 지점에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넘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관객이 <반도>의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느낀다면 그건 이야기의 구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영화와 연출자가 취하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말하자면 <반도>에서 지적되는 개연성은 이야기의 논리적 공백이라기보다는 무시당했다고 느낀 관객의 심정적 결과에 가깝다.

<반도>는 어디서부터 관객으로부터 거절당하는가. 이 영화는 명백히 대중이라는 집단의 평균치를 낮게 잡고 있다. 강력한 심리적 동기만 제공해주면 더이상 요구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 아래 액션과 볼거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반도>가 택한 심리적 동기화의 방식이 낡고 편의적인 연출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슬로모션의 경우 문자 텍스트로 바꾼다면 밑줄 치고 동그라미 그리는 표시나 다름없다. 전통적인 영화연출 문법 중 가장 비현실적이고 강력한 왜곡을 세 가지만 꼽자면 포커스인, 클로즈업 그리고 슬로모션을 들 수 있다. 셋 다 관객에게 지금 이걸 보라, 여기에 집중하라 하고 직접 지시하는 신호다. 이중 포커스인과 클로즈업의 경우 실은 우리가 실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왜곡이지만 영화적 시선에 익숙해진 지금, 대다수 관객은 구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슬로모션은 상황이 다르다. 여전히 작위적이고 이질적이다. 슬로모션이 펼쳐지는 순간 대체로는 이야기로부터 간격이 멀어진다. 상황에 빠지는 대신 거리를 둔 채 창작가의 의도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슬로모션은 일종의 접신 상태에 가까운 체험이다. 하지만 꽤 많은 슬로모션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환상이 아니라 감정이입이 깨어 ‘나를 무시한다’는 불쾌감으로 연결되는 연출로 전락했다. 관객과 동화되어 함께 접신하지 않고 혼자 스타일로만 남는 것이다. 스타일만 남은 연출은 신호로서 기능한다. 지금부터 감정적인 고조가 시작되니 받아들이라는 신호. 연상호 감독은 이를 대중을 위한 쉽고 직관적인 연출이라는 믿음 아래 남발한다. 남발되는 만큼 관객의 불쾌감도 쌓여간다. 관객의 감정을 무시한 채 영화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기 때문이다. 기능적으로 배치된, 결이 다른 연기들 역시 같은 맥락이다. 권해효 배우가 맡은 김 노인의 과장되고 연극적이며 겉도는 연기는 이 정도는 양해하겠지라며 넘어간 감독의 책임이 크다.

연상호 감독은 디테일에 약하다. 아니 무관심하다. “제가 있던 세상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라는 유진보다 훨씬 낙관적인 시선으로 빳빳하게 버티고 선 사람은 다름 아닌 감독 자신이다. 뼈대가 되는 블록들만 안전하게 고정되어 있으면 나머지 부분들은 기능적으로 납득하고 넘어갈 것이라는 낙관은 부정적으론 관객의 관람 방식과 위치까지 멋대로 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오락영화에서 이런 부분의 디테일은 차라리 쉽고 직관적이며 과장되게 묘사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이건 대중이라는 불분명하고 모호한 테두리에 대한 감독의 판단일 것이다. 누군가는, 아니 나를 포함한 상당수는 감독의 의도대로 어트랙션의 연장에서 쉽게 납득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러한 낮은 눈높이의 태도가 불쾌감으로 작동해 종국엔 감정적인 밀착을 방해하고 액션의 쾌감마저 관객으로부터 분리시켜버리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반도>의 문제 역시 창작자의 판단에 따라 관객의 위치를 임의로 지정해버리는 태도에 있다. 정해진 액션들로 조립된 이 영화의 감각은 놀이기구나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게임에 가깝다.

영화나 게임은 물론, 대다수의 미디어가 뒤섞이고 있는 흐름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경계가 얇아지고 서로를 닮아갈수록 당부하고픈 것이 있다. 함부로 관객을 상상하지말 것. 멋대로 대상을 판단하지 말 것. 무엇보다 주어진 형식의 가능성을 먼저 고민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챙길 것.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태도로부터 싹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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