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2021.10.26 14:38

어디로갈까 조회 수:603

미궁과 미로는 다른 것이라죠. 미궁이 '질서정연한 카오스'라면 미로는 '길을 잃어버리도록 설계된 흥미위주의 게임'으로 정의되더군요. 이 주장은  보르헤스의 단편소설과 에세이 모음집 [미궁 Labyrinth]에서 연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20대 청춘기는 미궁을 통과해가는 거대한 어둠의 터널과도 같았습니다. 아무 지침도 없이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곳을 지나며 겪는 체험이란 게 모호함 투성이었죠. 무명 삼베 일곱 겹을 눈에 두른 듯, 일곱 명의 난장이도 대동하지 않은 백설공주가 된 듯,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지만 결코 북두칠성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았어요. 미궁은 하나의 통과의례이며 누구나 겪는 체험의 도해라는 걸 인식했으니까요.

하지만 훌쩍 나이 든 지금,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다수의 이익으로 환원되는 프로젝트와 씨름할 때마다 미궁의 터널을 지나며 때때로 불안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논리적 사고는 약해지고, 이미 경험해봐서 익숙할 법한 것들이 낯설고, 질료적 상상력도 줄어들고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에요. 또한 행운이란 게 단지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일곱 겹'이라는 소수와 미궁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절감하게 돼서요.

제 경우, 일상에서의 미궁 체험은 바둑을 둘 때입니다. 세계적 바둑의 신과 몇 점 깔고 둔다면 지지 않을수도 있지 있을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 그렇습니다. 바둑의 무궁무진한 수 역시 미궁과 같은 길처럼 수순이란 전제 하에 논의되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은 조금은 의외의 미궁입니다. 왜냐하면 보통의 미궁이 대지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간다면, 바둑은 하늘에서 하나의 결정이 떨어져 비로소 미궁을 만들기 때문이죠. 일종의 돌을 다듬는 미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개념은 바둑을 거의 최고의 질주적 세계로 만들었죠. 저는 그 조성된 세계가 미궁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바둑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 수집을 하느라 수많은 기록과 스크랩북 그리고 백과사전이 너저분하게 나열되어 있는 책상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앗상블랑주 assemblage'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평면적인 회화에 삼차원성을 부여하는 기법인데, 현재는 넓은 의미로 기성품이나 자질구레한 것들을 조합해서 만들어내는 여러 종류의 일에도 사용됩니다. 앗상블라주를 그냥 꼴라주 같은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죠. 백날 자료 수집하고 그걸 뇌의 전두엽에서 잔치 벌여봐야 소용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제 보스가 물었습니다. "왜 그 방법만 길이라고 믿고 애쓰는 거요? 그것이 컨벤션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은 검토해봤소?"
- 길없는 길을 찾아가는 메소돌로지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중도작파는 안 해요.
그러나 포기는 않더라도,  퇴행해서 저차원의 삶을 살고 싶은 가슴 속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다른 것을 향해 제 힘의 방향을 옮겨주는 행위는 필요합니다. 가령 고즈넉한 듀게라는 강물 위에 이렇게 낙서라는 나룻배 하나 띄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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