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jpg


윌 스미스가 본인의 행동에 공식적인 사과를 하면서 (사과의 수신인에 크리스 락까지 포함시키며) 해당 논란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윌 스미스가 "사람을 때린 건" 잘못된 일이며 폭력적 응징이 어떤 사태에 대한 모범적 답안이 아니라는 것은 다시 한번 확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선 많은 사람들이 윌 스미스를 지지하긴 했지만 미국 내 여론은 윌 스미스에게 굉장히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저도 해당 사건을 실시간으로 반응하면서 윌 스미스에게 감정적 동조를 보이긴 했지만 좀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니 윌 스미스의 폭력이 크리스 락의 농담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좀 위험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외국인들보다 자국민들이 로컬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성은 분명히 또 다른 게 있겠지요. 한국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같은 곳에서 50대 이상의 남자 배우가 동년배 코메디언에게 주먹질을 했다면 그게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을 해보니 윌 스미스의 행동이 굉장히 반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50대 남자배우는 이병헌, 코메디언은 김구라로 해서 상상을 해보니 뭔가 저희만의 로컬한 분위기가 또 적용되면서 부정확한 감상이 이어지더군요)


저는 윌 스미스가 나빴다고 해당 사건을 결론짓는 대신, 윌 스미스는 나쁘다는 전제 하에 다른 이야기를 더 하고 싶습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제가 가장 먼저 심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반응은 '그래도 이성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입니다. 아마 이런 반응을 여러 시위나 집회를 비하하는 그런 반응들에서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전장연 시위를 두고 그런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게시판지기인 듀나님께서는 윌 스미스는 남성이자 헐리웃 슈퍼스타로서 굳이 공개적으로 누군가의 뺨을 때리지 않아도 다른 대처가 가능하다고 지적하셨고 저 또한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사전에 있었던 폭력에 대해 끝까지 이성적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좀 불편하긴 합니다. 만약 모욕, 언어적 폭력이 질서의 범주 안에 있다면 그 질서를 지키며 끝까지 이성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어쩌면 제가 개인적으로 저런 모욕적 언사들에 조금 지쳐서 그런 건지도 모르죠.


이번 사건에서 마초적 폭력만을 쟁점으로 둘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약자에 대한 언어적 폭력과 그에 대한 이성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죠. 윌 스미스의 폭력은 당연히 잘못되었으나, 왜 그가 그렇게까지 격앙됐는지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 락은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을 두고 지아이제인 조크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삭발을 한 이유는 그가 투병 중 탈모가 부작용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크리스 락의 삭발 조크는 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의 맥락이 있습니다. 아픈 사람의 신체적 변화를 놀림거리로 삼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 누구도 암이 아니더라도 어떤 병 때문에 삭발한 사람을 두고 머리 빠졌다면서 낄낄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존엄을 표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그가 겪는 가장 치명적인 고통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크리스 락은 이 부분에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더욱이 그가 평상시 흑인인권이라는 정치적 소재를 두고 풍자개그를 주로 선보였던 코메디언입니다. 약자로서의 자신을 강조하는 코메디를 하면서도 타인의 약자성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크리스 락의 농담은 모순적입니다.

 

이런 발언들에 대해 과연 쿨하게 웃고 넘어가야하는지, 아니면 '그건 몹시 나빴다'고 사후대응만 해야하는지 좀 의문이 있습니다. 무대 위의 크리스 락에게만 발언권이 있는 상황 자체가 이미 공정하지 못한 상황이 아닐까요. 그 상황에서 다들 참고 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크리스 락의 발언은 일단 농담으로 소비가 되고, 수많은 군중이 그 농담에 합류해 같이 웃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청자들이 그 농담에 합류합니다. 실시간 모욕이 한바탕 지나간 후에야 인터뷰로 저항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이미 누군가 일방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입니다. 모욕의 권리만 있고 저항의 권리가 없는 이 오스카 시상식에서, 사후반응을 했어야 한다는 의견은 어찌됐든 그 모욕을 모조리 겪으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윌 스미스의 주먹질은 굉장히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는 그러면 안됐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즉각적인 난입은 크리스 락의 모욕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모욕에 모두가 합류해서 낄낄대는 분위기를 곧바로 덮어버렸죠. 웃으면 안되는 말에 모두가 웃지 못하게 하는 선언적 효과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제3자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크리스 락의 마이크를 빼앗아서 내 아내를 모욕한 것에 당장 사과하라고 화만 냈어도 결과는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도 사후약방문이죠.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정확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윌 스미스는 오죽했겠습니까.


폭력은 나빴지만 모욕은 중지되었다, 저는 그 상황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모욕을 중지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아카데미 시상식 주최자들을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단지 윌 스미스와 크리스 락 두 사람만의 다툼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양인 비하로 실패한 전적이 있는 크리스 락을 굳이 또 호출해서, 그에게만 일방적인 발언권을 준 주최측의 책임 또한 아주 큽니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와 윌 스미스 부부는 크리스 락하고만 싸운 게 아니라 그런 모욕에 공식적인 권력을 준 아카데미 주최자들의 권력과도 부딪히고 있었다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어떤 폭력도 불허한다며 윌 스미스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트윗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당한 모욕은 무엇인지, 그 모욕을 마련한 주최측으로서 어떤 미안함을 느끼는지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윌 스미스는 약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모욕하는 걸 농담으로 즐기고 있는 그 상황에서, 그가 여전한 강자이며 움츠리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모욕을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어떤 항의수단도 주어져있지 않다는 점에서, 모욕을 준비한 쪽이 '상을 수여하는' 권력자라는 측점에서 스미스 부부가 얼마나 침착하게 반응했어야하는지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어설프고 비격식적인 반응은 단지 개인의 품성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구도가 저항의 방식을 투박하게 만드는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


농담의 권력이 잘못 행사될 때, 어떻게 저항해야할까요. 윌 스미스가 정확한 저항을 하는데 부분적으로 실패하면서, 이 문제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추가로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왜 당사자인 제이다는 무대 위로 올라가지 못했을까. 아마 어떤 모욕은 당사자들을 아예 움츠러들게 만들기 때문이고, 어렸을 때부터 감히 그런 반항을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럴 때는 대리자가 나설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직도 아카데미는 사과하지 않았고 크리스 락 또한 조용합니다. 그리고 윌 스미스가 크리스 락을 때리는 그 장면은 이제 짤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크리스 락에게도 개운한 장면은 아닐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2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8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80
122044 [티빙바낭] 제목에 혹해서 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잡담입니다 [10] 로이배티 2023.01.06 526
122043 프레임드 #301 [4] Lunagazer 2023.01.06 115
122042 퍼스트 슬램덩크 1감 소감 [3] 라인하르트012 2023.01.06 506
122041 뒤늦게 보는 가족 영화 패딩턴 [7] Kaffesaurus 2023.01.06 534
122040 [왓챠바낭] 영화 '꽃잎'을 보다가 만 짧은 잡담 [17] 로이배티 2023.01.05 804
122039 '바바라'와 넷플릭스 '이 세상의 한구석에' [9] thoma 2023.01.05 540
122038 슬램덩크 신극장판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4] ND 2023.01.05 686
122037 (노스포) [더 퍼스트 슬램덩크] 보고 왔습니다 [10] Sonny 2023.01.05 774
122036 프레임드 #300 [8] Lunagazer 2023.01.05 152
122035 유튜브 조회수 올리려고 쌩사람을 죽었다고 [2] 가끔영화 2023.01.04 745
122034 Vanessa Carlton - A thousand miles [1] catgotmy 2023.01.04 176
122033 4월 부활절 계획 [6] Kaffesaurus 2023.01.04 354
122032 프레임드 #299 [4] Lunagazer 2023.01.04 122
122031 펌글-손흥민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걸까?/케인-맨유/호날두 [2] daviddain 2023.01.04 465
122030 더 퍼스트 슬램덩크 짧은 감상 [5] 예상수 2023.01.04 676
122029 합스부르크전 다녀왔습니다 [4] Sonny 2023.01.03 724
122028 프레임드 #298 [4] Lunagazer 2023.01.03 142
122027 Led Zeppelin - Whole Lotta Love catgotmy 2023.01.03 135
122026 새해 첫 영화로 ‘코다’ 를 봤어요. [6] soboo 2023.01.03 683
122025 [일상핵바낭]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16] 로이배티 2023.01.03 83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