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최선입니다.

2013.10.18 03:12

라곱순 조회 수:9272

퇴근길에 예전 친구를 만났습니다.
저는 남들과 출퇴근 시간이 달라서 아무리 동네지만 지인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특별합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같은 반이었던 적도 많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야 하는 그런 친구입니다. 저와 저의 가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도 그 친구에 대해 그렇습니다.
친구는 무난히 전문대학 졸업을 하고, 무난히 작은 회사에 들어가고, 무난히 연애를 하고, 무난히 결혼을 하고, 그렇게 예쁜 아들을 둔 엄마가 되어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결혼후 남편 회사 근처로 이사가서 옛 동네에는 병원때문에 들렀다가 이렇게 널 만났다면서, 정말 반가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회사에 취직을 한 이후의 이야기는, 오늘 만나서야 들은 이야기 입니다.
대학 졸업 후 우울증으로 죽지 못해 겨우 살 때
그런 저와 마지막까지 연락을 놓으려 하지 않다가,
도저히 절 견뎌하지 못하고, 절 질려해서, 그렇게 완전히 연락이 끊어진, 마지막 친구였거든요.

결국 저의 모든 문제는
저의 못난 외모도, 연애를 단 한번도 못 해본 것도, 작년 짝사랑에 처절하게 실패한 것도, 큰 돈을 지인에게 빌려준 것도, 아무리 지금처럼 감기몸살로 온 몸이 쓰러질듯이 아파서 눈물 콧물 계속 범벅으로 흘리면서도 휴일 전혀 없이 매일 열 시간 넘게 일 해야 하는, (사장도 가게 따로 하고 있어서, 당장 일 대신할 사람이 없네요..) 사회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는 저임금의 서비스직 직업도, 이 모든것이 합쳐져서 생긴 낮은 자아도 아닌,
이렇게 인간관계입니다.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도 힘듭니다.
언제나, 파국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파국을 겪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새 인간관계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파국을 예상하는 것도 힘듭니다.

오늘처럼 옛 친구가 오랫만이라며 반갑게 인사해도, 당시 제 인생 전체를 함께 공유했던 저의 마지막 친구와 파국을 맞을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생각나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언제까지 게시판이랑 연애할 생각이냐고, 어떤 분이 말씀하셨지요.
게시판 사람들은 언제나 바뀌니
내가 먼저 떠나지 않는 이상 상대가 떠날 일은 없으니까요.
네, 그래서 매달렸습니다. 이곳에.
어떻게든, 대화가 하고 싶어서요.
이미 오래전에 이곳은 나에게 등 돌렸는데.
내가 인간관계에서 그토록 두려워하는, 상대가 나에게 질려서 결국 떠나버리는 "파국"이, 이미 예전에 찾아왔는데.
그걸 알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곳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쪽지함의 수많은 쪽지들이 사라진다는 것도, 기존 글에 대한 권한이 없어진다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내 과거 모습들, 그 수많은 기록들, 편지들, 이메일들,
그저 바리바리 모으기만 할 뿐
차마 열어볼 용기도 없으면서.
당시 감정들이 고스란히 떠올려지거든요. 오늘처럼.

이미 예전에 했어야 하는 일을, 아마도 한달 전 봉산님이 제 글과 관련된 소동으로 결국 타의로 게시판 떠나셨을 때 했어야 했던 일을, 오늘 하려고 합니다.
더 있고 싶었어요. 그 일 이후 더 억지로 아무렇지 않게 이곳에 매달렸었습니다. 잘 아셨겠지만.

많은 분들이 이미 느끼셨듯이
가장 가식적이었을 수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실했을 수도 있는,
어떤 닉네임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라곱순'이란 이곳 이름은요.

뭐라고 마지막으로 말 하면 좋을까 잠깐 망설였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도, 감사하다는 말도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싫어하시니까.

그냥, 행복했습니다. 이곳에 뭐라도 털어놓을 수 있어서. 가식일수도, 진실할 수도 있는 어떠한 말들도 이곳에선 할 수 있어서. 일방적이라도, 대화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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