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단

이 영화를 보면서 계단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정말 신물나게 계단이 나오는데, 누구든 그걸 보면서 지금 감독이 현실 세계를 상하 나눠진 계급사회를 계단으로 은유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죠. 그런데 실제로 계단은 통로라는 게 문제에요. 위와 아래를 오르내릴 수 있게 하는 연결의 공간인데, <기생충>은 이걸 오히려 단절의 의미로 쓰고 있죠. 내려가는 건 가능해요. 폭우가 오고 반지하가 잠길 태세가 되니까 기택 가족은 정말 미친 듯이 계단들을 뛰어내려갑니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갈 수는 있느냐. 아뇨.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위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해요. 기우가 가정교사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그의 잘난 친구의 추천 덕이었잖아요. 하나하나 끌어올려지는 기택의 가족들 역시 기우, 기정, 기택, 충순 순으로 위장취업선배(?)들에게 끌어당겨지는 구조구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영화의 계단은 윗층에 도달하기 위한 돌 두세개쯤이 빠져있는 그런 모양입니다. 한 단계 높은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걷고 오르고 해서 한발한발 내딛어야 하는데, 그 돌 자체가 없습니다. 바로 윗계단이 머리꼭대기 훨씬 위에 있는 거죠. 계단은 오로지 낙하의 기능만을 합니다. 기택네 반지하 집이 물을 피해 떠오르지는 못해도 가라앉을 수만 있듯이요.

그런데 이건 기택네 입장에서 보는 안이한 시선일수도 있어요. 연교네 입장에서는 뭐하러 계단 아래의 사람들을 끌어주겠어요. 기우와 기정이 위조된 아이덴티티로 속여넘겨서 얼떨결에 그리 된 거죠. 연교네에는 애초에 그런 계단이란 것 자체가 없어요. 동등하니까, 그래도 나름 끕이 맞으니까 어울릴 만한 사람들끼리 좀 돕고 도와보자 이런 거죠. 이렇게 보면 이 영화에는 계단이 없습니다. 저 아래 구불구불 펼쳐진 뭐가 있긴 있는데 떨어지면 큰일나는 낭떠러지만 있는거죠. 계단은 없는 사람들의 환상이에요. 애초에 깍아지른듯한 절벽 옆에 작은 절벽이 붙어있다고 해서 그걸 계단이라고 하진 않잖아요.

구조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합니다. 계단을 올라가거나, 부숴트려야 혁명이에요. 그런데 이 영화에 그런 게 나오기는 합니까? 심지어 근세가 지하에서 탈출하는 것도 다송이가, 자기를 지하실에 갇히게 하면서 가장 인간적으로 굴욕을 주게끔 한 동익이네 아들이 구해준 거에요.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깽판치는 것도 불가능하고. 거기다 황당하게도 그 깽판의 불씨를 지배층인 동익네가 던진 것도 아니에요. 남편을 굶겨 죽일 수 없어 난리부르스를 떤 문광이 기택네 가족 때문에 죽어서 생긴 일이지.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없는 놈들끼리 치고박고 하다가 야 있는 놈 너네 정말 나쁘다 하고 난데없이 깽판을 놓는 모양새인거죠. 이게 이 영화의 정말 웃기고 무서운 점이에요.

"선을 넘는 사람들.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동익의 트레이드 대사에요. 여기서 선이란 과연 수평의 성질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건 개인 대 개인의 예의가 아니라 감히 너는 나에게 이런 저런 말을 붙이고 질문을 할 자격이 안된다는, 철저한 수직적 선이에요. 그런데 이 수직적 선이 그렇게 불쾌하고 나쁜 것이냐 하면 또 의문이죠. 우리는 선배한테, 상사에게, 형님에게, 대통령 및 의원님에게 깍듯이 조아리잖아요? 그게 옳다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질서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서는 왜 그렇게 모멸감을 느끼며 기어이 깽판을 쳐야되냐는 거죠. 투쟁이 아닌 울분의 난동판이 어떤 정의나 없는 자의 필연적 복수로 해석될까봐 전 좀 걱정됩니다. 기택이 화난 이유를 이해하려 하면 반드시 설움이나 모욕감을 끌고 와야하는데, 동익은 그러면 안됐던 것이며 기택의 선택은 계급적으로 온당한가... 그 모든 걸 다 떠날만큼 우리는 쌓였고 에라 모르겠다 이런 거다 라면 할 말은 없지만 무의미한 분출을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고 모든 인물들이 쑈를 하는 거라면 글쎄요.

2. 파티

이 시퀀스의 농담은 정말 짓궂어요. 근세가 지상으로 뛰쳐나오고, 식칼로 기정을 찌릅니다. 그런데 현장이 현장이다보니 조금만 멀리서 보면 요리사가 요릿감을 골라서 찌른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 난동꾼을 충숙이 제압하는데, 바베큐 꼬챙이로 쑤셔서 근세를 죽입니다. 외부의 요리사가 잘못된 재료를 고르자(근세는 정말로 칼을 찌를 대상을 잘못 골랐으니까요!) 요릿감은 다른 사람 아니고 너야! 라고 집에 고용된 가정부가 다시 요리하는 것처럼요. 요리라기보다는, 지하에서 튀어나온 벌레를 때려잡은 것에 더 가까워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해충은 제압됩니다. 물론 그 해충은 집의 주인가족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하구요. 이 고상한 파티가 인육퀴진으로 바뀌는 걸 보면 정말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별로 신이 나지 않고 괜히 공감성 수치가 들어요.

이 난장판 속에서 기택만이 제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습니다. 왜요? 일단 자기가 감춰야하는 비밀이 튀어나왔어요. 자기 딸이 칼에 찔렸습니다. 고용주가 혼비백산하고 있어요. 그런데 영화는 이 때 "송강호"에게 다시 한번 시대의 성찰을 맡기며 영화 속 급박한 상황을 초월하라 이릅니다. "송강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동익에게 칼을 꽂습니다. 여기서 질문. 동익이 칼에 찔릴만한 뭘 했나요. 그는 물론 별로 훌륭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칼에 찔릴만한 분노를 산 것도 아닙니다. 선 좀 그만 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대충 이런 말을 해서 기택을 무안하게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괴한이 처들어오는 상황이 닥쳤어요. 원래도 별로인 인간이 그 상황에서 부하의 딸을 챙긴다는 걸 기대하는 게 더 지나치지 않나요? 물론 정나미가 떨어지긴 해요. 그런데 그걸 알리바이로 삼기에는, 동익과 기택 사이에는 그 무슨 관계도 없고 동익의 인간성이 보였던 것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와 상황 속에서, 기택의 실망은 많이 부자연스럽다는 거에요. '아니 그래도 사장님 아무리 냉혈한이어도 사람이 칼에 찔렸는데 그걸 이렇게 모른 척 합니까? 안되겠다 칼침 한방 맞아라.' 어떻게 봐도 이 감정적 변화는 이상합니다. 영화 바깥에서 볼 때만 같은 대만카스테라 창업실패자이자 반지하와 지하의 생활을 공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분노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하기사 저 사람도 지하층의 흙수저니까... 그런데 영화 안에서 보면 논리가 없습니다. 기택을 송강호로 바라봐야만 납득이 가능한 전개에요. 어쨌든 동익네만이 그 유혈축제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안되니까.

3. 꿈

기생충으로서의 분노를 이어받았던만큼, 그 지하생활마저도 기택은 물려받습니다. 이제 문광이 근세를 챙겨준 것처럼 조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상황은 더 열악해졌고 말 그대로 기택은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여기서 기택이 이제 외국인에게 목숨을 빌붙는 이 상황은 과연 서구자본이 잠식하는 현실과 무관한 것인지 좀 궁금해집니다. (참고로 삼성 한국 기업 아니에요!!)

기택을 구해내겠다며 기우는 굳은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란 게 정말 황당해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집을 사겠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를 구할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저는 이게 마치 상류층이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예쁘게 포장한 것처럼만 보입니다. 그 집을 사야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아버지의 몸이라도 빨리 빼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집을 살 구체적인 계획은 있습니까? 그 집을 어느 세월에 어떻게 살 건데요? 이건 기우의 거짓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나 할 법한, 내가 돈 많이많이 벌어서 엄마아빠 궁궐에서 살게 해줄게! 라는. 여기서 봉준호는 이걸 나레이션으로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치 그 기생을 끝내버린 것처럼 생생한 플래시포워드로 보여주며 속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기우는 여전히 그 비참한 반지하에 살고 있고 아버지랑 닿을 길은 없습니다. <기생충>은 망상으로 끝이 나요. 정확히는, 망상만 하는 기우를 얼빠진 카메라로 바라보며 끝이 나죠. 그 비장함과 결연함이 뭘 대체 보장합니까? 차라리 독일인 부부에게 사연 하나를 꾸며서 아버지가 유폐되어있다고 둘러대는 게 낫지 않나요?

언젠가는... 영화가 이렇게 끝나면 대개는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의 메시지죠. 그런데 <기생충>은 반대로 말합니다. 꿈 한번 신나게 꾼다고. 바로 현실의 문제가 앞으로 닥쳐왔는데도, 아버지가 갇혀있는데도, 남매가 죽고 그 울분을 풀어야하는데도, 그 꿈은 항상 엉뚱하게도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지하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상상력은 이제 언덕 위 고급빌라에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상력도 넓게 보일만큼 생존의 길은 요원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게 더 힘들다면 뭘 어떻게 해야할까요? 봉준호는 상류층을 비웃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엄청나게 자조하고 있습니다. 야 이거 어쩌냐. 뭐 수가 없네?
꿈 말곤 뭐 할 게 없네?

@봉준호의 영화들이 점점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거의 진범에 도달했지만 놓쳐야했고, <마더>에서는 진실에 도달했지만 스스로 놓아버렸죠. <옥자>에서는 진실을 보았지만 도망치고 우울해합니다. <기생충>에서는 어떤가요. 한층 더 빨리 진실에 도달하고 절망합니다. 뭐라도 해보고 어떻게든 끝까지 가보려했던 노력은 이제 점점 짧아지는 반면, 무력한 발버둥의 텀은 길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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