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0 00:34
정지용 시인의 시 126편을 권영민 교수가 현대어로 바꿔서 낸 책이 있더군요.
마음에 드는 시 몇 편 옮겨봅니다.
밤
눈 머금은 구름 새로
흰 달이 흐르고,
처마에 서린 탱자나무가 흐르고,
외로운 촉불이, 물새의 보금자리가 흐르고......
표범 껍질에 호젓하이 싸이어
나는 이 밤, 적막한 홍수를 누워 건너다.
바람
바람 속에 장미가 숨고
바람 속에 불이 깃들다.
바람에 별과 바다가 씻기우고
푸른 묏부리와 나래가 솟다.
바람은 음악의 호수.
바람은 좋은 알리움!
오롯한 사랑과 진리가 바람에 옥좌를 고이고
커다란 하나와 영원(永遠)이 펴고 날다.
달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미욱한 잠과 베개를 벗어나
부르는 이 없이 불려 나가다.
한밤에 홀로 보는 나의 마당은
호수같이 동긋이 차고 넘치노나.
쪼그리고 앉은 한 옆에 흰 돌도
이마가 유달리 함초롬 고와라.
연연턴 녹음, 수묵색으로 짙은데
한창때 곤한 잠인 양 숨소리 설키도다.
비둘기는 무엇이 궁거워 구구 우느뇨.
오동나무 꽃이야 못 견디게 향그럽다.
유리창2
내어다 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 앞 잣나무가 자꾸 커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쪼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휘파람 부는 밤.
소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누리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뺨은 차라리 연정스레이
유리에 비빈다. 차디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아련히, 긋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서 고운 화재가 오른다.
별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고나
아스름 닫히려는 눈초리와
금실로 이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듯, 솟아나듯,
불리울 듯, 맞아들일 듯,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한에 피어오른다.
흰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위에 손을 여미다.
슬픈 인상화
수박 냄새 품어 오는
첫 여름의 저녁 때......
먼 해안 쪽
길 옆 나무에 늘어선
전등. 전등.
헤엄쳐 나온 듯이 깜박거리고 빛나노나.
침울하게 울려오는
축항의 기적소리...... 기적소리......
이국 정조로 퍼덕이는
세관의 깃발. 깃발.
시멘트 깐 인도 측으로 사폿사폿 옮기는
하이얀 양장의 점경!
그는 흘러가는 실심한 풍경이어니......
부질없이 오렌지 껍질 씹는 시름......
아아, 애시리 황!
그대는 상해로 가는구려......
홍춘(紅椿)
춘(椿)나무 꽃 피 뱉은 듯 붉게 타고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 없이 돌아간다.
어린아이들 제 춤에 뜻 없는 노래를 부르고
솜병아리 양지 쪽에 모이를 가리고 있다.
아지랑이 졸음 조는 마을길에 고달퍼
아름아름 알아질 일도 몰라서
여윈 볼만 만지고 돌아오노니.
홍역
석탄 속에서 피어나오는
태고연히 아름다운 불을 둘러
십이월 밤이 고요히 물러앉다.
유리도 빛나지 않고
창장(窓帳)도 깊이 내리운 대로
문에 열쇠가 끼인 대로
눈보라는 꿀벌떼처럼
잉잉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이 철쭉처럼 난만하다.
이른 봄 아침
귀에 설은 새소리가 새어들어와
참한 은시계로 자근자근 얻어맞은 듯,
마음이 이 일 저 일 보살필 일로 갈라져,
수은방울처럼 동글동글 나동그라져,
춥기는 하고 진정 일어나기 싫어라.
쥐나 한 마리 훔켜잡을 듯이
미닫이를 살포--시 열고 보노니
사루마다 바람으론 오호! 추워라.
마른 새삼넝쿨 사이사이로
빠알간 산새 새끼가 물레북 드나들 듯.
새 새끼와도 언어 수작을 능히 할까 싶어라.
날카롭고도 보드라운 미음씨가 파다거리여.
새 새끼와 내가 하는 에스페란토는 휘파람이라.
새 새끼야, 한종일 날아가지 말고 울어나 다오,
오늘 아침에는 나이 어린 코끼리처럼 외로워라.
산봉우리-- 저쪽으로 돌린 프로필--
패랑이꽃빛으로 볼그레하다.
씩 씩 뽑아올라간, 밋밋하게
깎아 세운 대리석 기둥인 듯,
간덩이 같은 해가 이글거리는
아침 하늘을 일심으로 떠받치고 섰다.
봄바람이 허리띠처럼 휘이 감돌아서서
사알랑 사알랑 날아오노니,
새 새끼도 포르르 포르르 불려왔구나.
Jean Arp - The Star
(모르는 작가인데 저는 이렇게 엉성하게 생긴 게 참 좋더군요.)
2017.06.10 00:45
2017.06.10 18:48
현대어로 바꾸니 뭔가 맛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원어 보면 이해 잘 안가는 부분도 많고 어려워요. 바꾼 것과 아닌 것 두 권 사야겠어요.
2017.06.10 20:44
현대어로 바꾸면 감칠맛이 없어진다고 할까... 느낌이 좀 달라지긴 하죠.
권영민 교수의 책에는 원래의 시도 같이 실려 있어서 두 권을 사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책을 뒤적여 보다 새롭게 마음에 든 시 한 편~
귀로
포도(鋪道)로 내리는 밤안개에
어깨가 저윽이 무거웁다.
이마에 촉하는 쌍그란 계절의 입술
거리에 등불이 함폭! 눈물겹구나.
제비도 가고 장미도 숨고
마음은 안으로 상장(喪章)을 차다.
걸음은 절로 디딜 데 디디는 삼십 적 분별
영탄도 아닌 불길한 그림자가 길게 누이다.
밤이면 으레 홀로 돌아오는
붉은 술도 부르지 않는 적막한 습관이여!
2017.06.10 22:17
시인의 서른적 때 시군요.
나이 30대를 서른적이라 그래도 되나요.
2017.06.11 14:05
정지용 시인은 밤의 고요함이 느껴지는 시도 많이 썼는데
한낮의 눈부심이 느껴지는 이런 시도 잘 쓰네요.
별로 꾸미는 느낌도 없이 언어를 참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같아요.
갑판 위
나지익한 하늘은 백금빛으로 빛나고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바람에 뺨마다 고운 피가 고이고
배는 화려한 짐승처럼 짖으며 달려나간다.
문득 앞을 가리는 검은 해적 같은 외딴 섬이
흩어져 나는 갈매기떼 날개 뒤로 문짓문짓 물러나가고,
어디로 돌아다보든지 하이얀 큰 팔굽이에 안기어
지구덩이가 동그랗다는 것이 즐겁구나.
넥타이는 시원스럽게 날리고 서로 기대 선 어깨에 유월 볕이 스며들고
한없이 나가는 눈길은 수평선 저쪽까지 기폭처럼 퍼덕인다.
바다 바람이 그대 머리에 아른대는구려.
그대 머리는 슬픈 듯 하늘거리고,
바다 바람이 그대 치마폭에 이치대는구려,
그대 치마는 부끄러운 듯 나부끼고
그대는 바람 보고 꾸짖는구료.
별안간 뛰어들삼아도 설마 죽을라구요.
바나나 껍질로 바다를 놀려대노니,
젊은 마음 꼬이는 굽이도는 물굽이
둘이 함께 굽어보며 가비얍게 웃노니.
댓글 달리기 힘든 글에는 무플 방지 자작 댓글~
별똥
별똥 떨어진 곳,
마음해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