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긴 여행은 안 할 것 같지만 다시 몸이 근질거리네요. 다시 글쓰기 연습도 할겸 기분이라도 느끼고자 여행기를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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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연말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연말 계획으로 들떠 있었다.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 해외 여행. 연인과의 시간 등등. 하지만 나는 계획이 없었다. 백수에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외국인이었으니까.


대학 졸업, 이사, 취직, 해고. 이 모든 것이 불과 몇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고, 나는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상태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속상하고 우울했다. 그냥 모든 거를 다 던지고 저 멀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강렬한 햇빛이 있고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샌디에고. 그래, 샌디에고로 가자. 가서 실컷 바다 구경도 하고 햇볕도 쬐고 오자. 하지만 샌디에고로 가는 교통편은 터무니없이 값이 올라 있었다. 차를 몰 줄 알았다면 렌트카를 빌려서 혼자서라도 갔겠지만, 나는 미국 생활 5년차에도 운전 면허가 없었던 천연기념물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그를 만났다. 강한 독일어 악센트와 큰 코가 인상적이였다. 그와는 한 10분간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가 잘 통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성적인 끌림은 없었지만,당시 데이트하던 사람이 있기도 했고. 대화가 끝난 후에 번호를 교환했다. '다음주에 언제 시간 있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지 않을래?' 그가 제안했다. '응 시간 있으면 너한테 알려줄께.'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 때는 노라는 의미로 대답을 한 것 같다.


일주일 후, 크리스마스 이브. 5명의 하우스메이트들은 모두 가족을 보러 집을 비웠다. 영화를 볼려고 컴퓨터를 켰지만 금방 지루해졌다. 집 안에 있는 대신 어디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저번 주에 만난 그 생각이 났고, 전화를 걸었다. '나 기억해? 혹시나 시간 있으면 나랑 같이 저녁 먹자.' 


샌프란시스코의 한 한국 식당에서 그와 같이 칼국수를 먹었다. 같은 외국인 신분으로서 나의 스토리를 경청하는 그에게 왠지 신뢰가 갔다. 하소연하듯이 내뱉었다. '아 그냥 떠나버렸으면 좋겠어. 샌디에고로. 당장!' 


'...그래? 그럼 가자. 내일 아침에!' 그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진짜? 내일? 샌디에고?' 

'응! 나 오늘은 이메일 보내야 해서 안돼고 내일은 될 것 같아. 그 쪽 주변에 괜찮은 곳을 알고 있어. 내일 바다 옆에서 캠핑을 하는거야! 어때?.'

'좋아! 그럼 가자! 떠나는 거야!'


도피 판타지가 충족된다는 것에 희열감을 느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갔을때 희열감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알지도 못하는 남자랑 같이 단둘이 몇 일을 여행한다고? 이 사람 혹시 범죄자 아냐? 우리는 제대로 된 계획조차도 세우지 않았다. '주변에 괜찮은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나는 몰랐다. 캠핑? 나는 캠핑 도구 하나도 없는데?


취소할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심심하게 있기보다는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집에 들려서 캠핑 용구와 옷들을 트렁크에 같이 실었고, 마트에 들려서 간식과 식량을 샀다. 구체적인 여행 일정은 정하지 않았지만, 이 날은 엘에이를 거쳐서 샌디에고 주변의 캠핑장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로 했다.

'음, 그러면 우리 여행은 얼마나 하는 거지? 최소한 몇 일은 될텐데.' 

'클라이언트와 일이 계획되어 있기 때문에 일주일 후에는 여기에 다시 와야해' 그가 라지 사이즈 커피를 컵홀더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 전까지는 어디든 상관없어!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얘기해.' 


그의 낡은 도요타 차량에 시동이 걸렸고, 낯선 남자와의 일주일 간의 로드 트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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