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건>에 대한 생각

2019.03.27 13:56

Sonny 조회 수:1112

아래 듀게 회원님이 <로건>에 대해 평을 써주신 걸 보고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라서 적어봅니다.


사람은 언제나 젊을 수 없고 20대 중후반만 되어도 장미빛만은 아닐 미래를 상상하게 되죠. 그리고 해가 갈 수록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주기가 아주 짧아진다고 느낍니다. 마음은 10대 그대로인데 몸은 어느새 정신연령에 10의 배수를 무서운 속도로 보태가고, 정신과 현실의 간극을 나이먹었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직 생생한 기억들과 희미해져버린 기억들 사이에서 언제나 흘러가버린 세월을 느끼면서 아련해지구요. 


몇해전만 해도 저는 이런 감정들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며 그 간극을 최대한 좁히는 것에만 신경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이 시간축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한살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이 전 그대로! 이런 게 아니라 올 해 한 수저 더 떠먹은 떡국이 5년 후 10년 후의 내가 되고 지금의 미래를 앞으로의 현재로 얼마나 사이좋게 만나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죠. 시간은 냉동될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은 몸도 마음도 흘러가는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나이가 들어가는 영화들은 참 좋은 것 같아요. 늙지 않고 언제나 멋있는 히어로 판타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실존적 고민을 좋은 배우가 연기로 보여준다는 점에서요. 


이 전 엑스맨 시리즈는 엑스맨들과의 유대와 갈등을 다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성격이 더 강해보였습니다. 일단 상업영화로서의 한계와 짧은 러닝타임 안에 절대 다 품을 수 없는 그 복잡한 사정들은 어디까지나 온건파와 강경파의 구조적 충돌로만 이해되는 구석이 더 컸죠. 왜 우리는 차별받아야 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르다고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 할까? 이 거듭되는 질문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오락영화로서 언제나 승자와 패자는 결국 정해져있습니다. 그래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조금 더 반가운 구석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엑스맨 시리즈에서 드물게 찰스가 실패하고 에릭이 승리하는, 강경파의 현실적 득세를 인정하는 영화였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건 엑스맨 시리즈의 한계였던 느낌도 있었습니다. 권선징악, 화합과 평화가 기본 모티브일 수 밖에 없는 이 시리즈에서 마침내 다크 히어로의 승리를 인정하는 외전까지 나왔다면 정말 더 나올 게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다음에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가 나왔고 이 영화는 설정 오류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고 시리즈 내의 모든 작품들을 묶어서 화해시켜버리는 대담함을 발휘했습니다. 정말 대단원의 막을 내린 거죠. 네, 당연히 아포칼립스는 사족입니다.


엑스맨 시리즈에는 정말 이야기할 게 없어 보였어요. 더군다나 스토리의 중심축이 뮤턴트 군단의 설립자들로 옮겨갔고 울버린은 이미 스핀오프 무비가 닌자의 나라 일본에 오세요~ 라며 요상망측한 오리엔탈리즘으로 끝났으니까요. 그래서 <로건>이 나온다고 했을 때 별 기대를 안했습니다. 불사의 육체를 지닌 로건의 드라마를 다루는 것도 실패했는데 겔겔대는 로건을 뭐하러 봐? 거기다가 이미 엑스맨 시리즈는 데오퓨로 다 정리가 됐잖아?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끝인데? 


그러나 휴 잭맨의 <로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애틋한 영화였어요. 제가 간과했던 것은 이 시리즈가 주연배우들이 크게는 교체되지 않은 채로 그 축적된 시간을 팬들과 함께 나눴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휴 잭맨은 헐리웃 배우 중에서 탈도 적고 호감도도 아주 높은 배우라서 로건이라는 캐릭터에 긴 시간 정을 들이는 데 아무 무리가 없었죠. 배우가 시리즈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그 세월 동안 벌크업도 엄청나게 되고!! ^^;;) 지켜낸 것과 이루지 못한 숙원들을 내면에 차근차근 쌓아나가면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이야기를 할 만큼의 재료가 진하게 쌓여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저는 울버린이라는 능력자에게는 관심이 있어도 로건이라는 본명을 지닌 인간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작게나마 사죄도 했습니다. 휴 잭맨, 당신은 이 캐릭터를 정말 좋아하고 오랜 시간 자신의 페르소나로 동반하고 있었군요...


이 영화는 엑스맨 시리즈 중 가장 잔인한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그 육체적 고통을 고스란히 살리기에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영화였죠. 초월적인 무엇에는 경외심을 보내지만 힘없는 자에게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는 걸 여실히 체험했어요. 더 이상 몸도 잘 낫지 않고 머리도 희끗희끗한 로건이 영화 초반부에 낑낑대며 싸움을 하는 씬에서부터 정말 인정하기 싫다는 반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더 처참한 처지의 찰스와 다른 뮤턴트들, 그리고 돌연변이 능력이 딱히 발휘될 여지도 없는 메마른 세계를 보면 로건이 힘겹게나마 버티고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더군요. 영화를 보는 내내 로건은 절뚝거리고 기침을 해대는데 보는 제가 힘겨웠습니다. 이 전까지 그렇게 짱짱하던 육체의 히어로를 이렇게 폐인으로 만들어버려도 되나 싶었구요.


그렇지만 저는 이제 압니다. 모두가 경험하는 거잖아요. 팬은 아니더라도 멋지다 잘났다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10년 후에는 그냥 흔한 아저씨 아주머니가 되어있는 모습을 볼 때, 환호와 열광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어렵게 살거나 영 좋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목격할 때... 쇠락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으니까요. 소위 "왕년에는"을 이제는 구전설화처럼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로건>의 그 비틀거리는 모습들은 제 삶에도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진실이어서 더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히어로의 늙어버린 모습은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잖아요. 심지어 저조차도 거울 속의 저에게 여전히 괴리감을 느끼는데. 


강대한 적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로건>에는 그런 것조차도 없습니다. 기계의수를 착용한 안경잽이 군인이 하나 나오지만 그는 그렇게 유의미한 악역은 아니죠. 로건 일행이 계속 싸우는 건 자신들의 육체를 덮친 시간이에요. 로건은 이 전처럼 잘 낫지도 않고 계속 헐떡이면서 다니고, 찰스는 급기야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치매발작을 다시 일으킵니다. 거의 전능에 가까웠던 이들의 육신이 자신들을 옥죄일 때 정말 착잡했어요. 몸이 얼마나 다치든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든 울버린은 이제 조금만 다쳐도 욕을 바로 쏟아내고 아파하는 그런 아저씨가 되어서 계속 한숨이나 쉬고 있구요. 이들의 여정은 모험이나 복수가 아니라 도피라는 점도 그렇습니다. 무작정 도망치는 거죠.


더 이상 이룰 건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늙은 몸을 이끌고 계속 도망만 다닙니다. 참 처량한 영화죠. 그런데 중간에 찰스까지 죽습니다. 로라는 말도 안통하는데다가 통제하기도 참 힘들고요. 심지어 로건은 그 행선지가 코믹북에 나온 위치라는 걸 알게 됩니다. 자기가 향하는 곳이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곳일수도 있는 거죠. 그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늙고 외로운 한 인간이 그나마 의지하던 친구이자 아버지조차 잃고 보금자리도 부숴진 채 무작정 떠나야 한다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로건>은 너무나 처절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우리네 삶이랑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거죠. 고독하지 않은 사람 한명이 없고 안정된 미래 위에서 희희낙낙하기만 하는 삶도 없으니까요.


중간에는 로건의 유전자로 만든 복제인간이 나옵니다. 설정상으로는 또 다른 인물이지만 누가 봐도 이건 로건의 현재와 과거의 싸움이죠. 그저 젊고 두려움을 모르던 그 때의 자신은 어땠는가. 로건은 맥을 못춥니다. 그리고 그 복제인간이 찰스까지 죽여요. 카르마가 돌고 돌아 자신이 가장 잃기 싫어하는 것까지 앗아갔을 때, 누구의 무엇을 달리 탓하겠습니까. 이제 깨달음조차도 무의미한 나이입니다. 사랑하던 이는 죽었고 자신의 과거는 계속 지금의 자신을 쫓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얼떨결에 자신과 딱히 닮지도 않은 것 같은 미래가 매달려있구요. 애정 없는 책임과 반성 없는 고뇌만이 자신을 계속 따라옵니다. 


찰스를 묻으면서 로건이 "호수도 있고... 호수도 있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로 회한에 가득차보였어요. 


그렇지만 로건은 할 수 있는 걸 합니다. 바위가 계속 떨어져도 시지프스는 어찌됐든 계속 굴려야죠. 로라를 데리고 마침내 에덴의 포인트로 가서 아이들과 대면시킵니다. 그리고 거기서 로건은 자기 평생의 상처를 고백해요. 그게 참 가슴아팠습니다. 사실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거죠.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의 순간에서 나약한 자신을 드러내는 건 정말 어렵고 아프잖아요. 그 순간 저는 그 모든 엑스맨 시리즈가 <로건>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의 벽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하게 됐구요.


결국 다 잃어가는 게 삶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로건>은 어떤 도덕보다도 그저 늙음이라는 순간 앞에서도 어떻게든 받아들여야한다는 걸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다 잃어가겠지만 남길 수 있는 무언가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삶은 괜찮은 거겠죠. 그 남는 것은 아주 한 순간, 뭔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작은 기쁨과 고통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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