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악이 위선보다 나은가

2014.06.27 15:07

dmajor7 조회 수:5581

한 신문기사를 보고 걱정되는 점이 많아서 고민 끝에 한 일간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분량이 길어서 그런지 데스크에서 약간 줄이고 제목을 고쳐서(그런데 고친 제목이 좀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아쉽네요) 오늘 게재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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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사를 읽었다. 서울대생들의 인터넷 게시판에 '신림역 근처엔 왜 이렇게 질 떨어지는 사람이 많죠?', ‘패션과 외모, 머리 모양 등이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인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에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하나' '글쓴이는 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송두리째 폄하하는가'라는 비판이 있자 '왜 선비인 척하느냐', '신림역에 모이는 사람들이 저렴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반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졸업생으로서 무심할 수 없었다. 다만 전제할 것이 있다. 기사 자체도 위 글이 다수의견이라는 취지는 아니었고, 인터넷의 특성상 소수의 공격적인 의견이 논쟁에 참여 않는 온건한 다수의견을 압도하는 과대 대표 현상이 있다. 마치 서울대생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왜곡이다. 그리고 ‘서울대생’의 의견이라고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도 넌센스다. 그들은 그저 지금 입시시스템 하에서 좀 더 나은 성적을 거둔 또래 젊은이들의 일부일 뿐이다.

 

젊은 세대 일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다. 먼저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항변은 요즘 인터넷 일각에서 흔히 보는 ’팩트는 팩트다‘, ‘개취(개인적 취향) 존중’ 운운의 논리다. 그러나 세상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취향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 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한 NBA 구단주는 ‘흑인과 함께 내 경기장에 오지마라’라고 여자친구에게 ‘개인적 취향’을 전화로 말한 사실이 알려져 영구퇴출 조치를 당하고 구단을 매각했다.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하느냐’는 한 마디다. 요즘 인터넷에 횡행하는 ‘선비질’이라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 모두는 그리 훌륭한 존재가 아니다. 강자를 동경하고 약자를 업신여긴다. 나와 같은 것이 편하고 나와 다른 존재는 불편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윤리, 도덕, 금기, 관용을 힘겹게 배워 왔다. 그 교훈을 흉내라도 내는 것이 위선이다.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대치동 안 가도 역사는 선행학습이 가능하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니체의 말이다. 1차대전 패전 후 독일인들은 막대한 배상금 부담에 시달렸다. 이 때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유태인의 열등함, 사악함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며 아리아인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생학까지 주장했다. 인류 지성사의 거인들을 배출한 독일인들이 처음부터 이런 선동에 동조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들 마음 속 심연에는 지금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은 본능이 있었다. 결국 성실하고 착한 가장들이 이웃들을 대량학살하고 그 피하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한 얼굴이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본능이다. 여성 차별, 흑인 차별, 이민자 증오... 우리의 본능은 전자발찌를 채워야 할 상습전과자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 없이 서로에게 선비질을 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후배 세대의 위악은 선배인 우리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우리는 열린 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컨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만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 사과한다. 기득권은 다 누린 주제에 극심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는 후배들을 싸잡아 욕하는 선배의 일원이기에 말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6/20140626047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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