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문서로 시작해서 문서로 끝난다. 

업종이 무엇이 됐든 간에, 회사라면 개인사업자든 법인사업자든 자신이 벌어들인 소득과 손실에 대해 세금 관련 사항을 제출하기 위해 문서를 기록하고 만들어야 한다. 규모가 커질 수록 공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런 보고서나 문서들은 숫자와 글자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숫자와 글자가 그 회사를 대변해주고, 숫자와 글자를 잘 만드는 사람이 회사를 오래 다닌다.


#엑셀

대학을 졸업하고 엑셀을 처음 만져봤다. 처음 간 팀은 상품기획팀이라서 판가/원가/가동률 이런 숫자들을 엑셀에서 능숙하게 다뤘어야 했다. 나를 맡은 사수는 내가 엑셀하는 걸 보고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너무 어이없어하며 쳐다보며 말했다. “엑셀을 이렇게 해도 우리 회사 들어올 수 있는 거야?” 이상했다. 나는 대학에서 엑셀 써본 적이 없고, 연수받으면서 잠깐 배운게 전부인데 이 선배는 거의 엑셀의 신이었다. 수식을 화려하게 걸어놓은 것 뿐만 아니라 코딩까지 해서 엑셀 파일안에 넣어놨다. 그 때 아 상품기획팀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알아야 하는구나 생각했는데, 내 사수만 그렇게 잘했던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아쉬운 건 그런 엑셀의 신 밑에 있었는데도 난 그 때 엑셀을 많이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대학원을 갔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 중 하나가 미국애들은 수학 잘 못한다 인데 가서 처절히 틀렸다는 걸 느꼈다. 대학원에서 만난 선택된 집단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어느하나 수학 못하는 동료가 없었고, 거짓말같이 다들 엑셀의 고수였다.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었다.  언제 엑셀 배웠냐고? 회사에서 배웠냐고 물어보니 다들 대학때 배웠다고 했다.

진짜? 대학때 배웠다고? 난 계산기 밖에 안 썼는데? 그 친구들 대답은 수업시간에 내준 숙제 대부분은 엑셀을 써야만 제출할 수 있다고 한다. 대학 졸업한지 10년 넘게 지나서 모르겠지만 요즘은 숙제할려면 엑셀을 해야하나? 대학때부터 엑셀을 활용할 수 있었던 그들이 부러웠다.


대학원을 거치면서 나같은 엑셀바보도 엑셀을 사용할 수 있구나라는 걸 느꼈다. 그래도 어느정도 중간급은 된다고 생각하고 졸업하고 한국 회사에 와보니 다시 엑셀바보 수준이었다. 결국 한 3년간 엑셀을 정말 열심히 하면서 느낀 건 처음엔 어려워보이고 뭔가 수학을 잘해야 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정리만 잘하는 사람이라면 실력이 금방 오를 수 있는게 엑셀이란 걸 깨달았다. 평소 정리를 잘 하지 못한다면 괜찮다. 회사에서 계속 혼나고 그러면 내 방은 지저분해도 엑셀 파일은 깔끔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퇴사를 막아주고 승진을 빨리 시켜줄 정도의 엑셀러가 될려면 엑셀로 가공의 숫자를 잘 만들어야 한다. 회사 안에서, 밖에서 도는 회사의 숫자들이 모두 진실의 숫자일수가 없다. 진실의 숫자도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그 raw data를 가공한 숫자들이 여러 부서를 돌아다닌다. 가공된 숫자 중 진실에 가까운 친구도 있고 아닌 친구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진실과는 동떨어진 숫자를 남들이 봐도 그렇구나 납득이 가게 잘 만든다면 ‘저 친구 엑셀 참 잘하네’나 ‘데이터 분석에 능하다’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보고단계가 상향으로만 5~6단계 이상 넘어간다면 저 능력이 정말 필요하며 어느 팀이든 당신에게 스카웃의 손길을 보낼 것이다.


#파워포인트

피피티라고 부르기도 하고, 장표라고 불리기도 하고 보고서라 불리기도 한다. 회사오니 ppt 만들자 소리는 못 들어보고 장표나 보고서 만들자 소리 밖에 못 들어봤다. 여담인데 대리 중간급부터 되면 이 장표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진정한 보고서 라이프가 시작된다. 내가 있었던 회사에서는 사원이 만든 장표는 본 내용에 들어가지 못하고 보통 어펜딕스로 많이 갔었다. 돌이켜보니 말 그대로 위계질서를 위해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넌 사원이니 어펜딕스만 만들어. 넌 대리니 이제 백업 장표나 본 장표 한 두장 만들어. 너는 과장이니 다 만들어. 넌 차장이니 애들 만드는 거 봐주고 과장 힘들면 같이 만들어. 난 팀장이니 마지막에 보고 수정할 부분 알려줄께. 뭐 대략 이런 식.


규모가 어느정도 있는 회사에 있다면, 혹은 당신의 직무가 스탭이라면 당신은 퇴사를 할 때까지 보고서만 만들다가 퇴사할 수도 있다. 나는 보고서만 만들다가 회사를 나왔다. 상품기획에 있을때는 상품을 기획을 했지만 내가 만든 제품을 볼 수는 없었다. 차년도 제품 라인업에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 생산을 못 보고 나왔기 때문이다. 신사업팀에 있을 때는 외국에 공장을 짓는 보고서를 아주 오랫동안 여러 버전으로 바꿔서 썼지만 그 공장을 못 보고 나왔다. 마지막 회사에서도 인수 검토를 하는 보고서를 아주 많이 썼지만 검토만 하고 끝났다. 

내가 출력한 A4용지만 생각해도 몇 십 박스일지 모르겠다. 나무야 정말 미안해. 사실 굳이 출력해서 가야하나 싶지만 높은 곳에 계시는 분들은 아이패드가 있어도 종이로 결과물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장표를 잘 만들면 보고가 줄어들고 보고가 줄어들면 퇴근이 빨라지고, 퇴근이 빨라지면 가정의 평화가 찾아온다. 퇴근이 빨라진다고 가정의 평화가 찾아오는 건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여하튼 퇴근이 빨라진다는 것만으로도 승진 및 이직을 제외하고도 엄청난 가치가 존재한다.


장표를 잘 만든다는 건 보고서의 스토리 라인 구성을 잘 하는 것과 이 보고서가 왜 만들어져야 하는 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장표를 잘 만드는 걸 그래픽을 많이 넣거나, 도식화를 잘 해서 있어보이게끔 하는 것이 잘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예쁜이 작업’도 빠져서는 안 되는 보고서의 구성요소이긴 하나 절대 주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윗 사람들이 이 보고서를 왜 만들라고 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같은 팀에서 팀장이 지시하는 보고서라면 좀 생각해보거나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만, 저 멀리 회장 비서실에서 ‘회장님이 이거 찾으십니다’라고 메일로 딸랑 한 줄 적어서 보내오면 보통 바로 팀회의가 열린다. “왜 찾는 거지? 거기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비서실에 아는 사람 누구 없어?” 등등 여러가지 대화가 열리는데 저기 핵심 질문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누구 아는 사람 거기 없어?” 이다. 비서실에 아는 사람만 있다면 이 보고서가 왜 필요한 거고 최소한 방향과 맥락은 나오게 되어있다.


회사의 보고서는 절대 진실을 담지 않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기반으로 보고서의 최종수령자가 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사실과 최종 수령자가 원하는 내용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래서 엑셀을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최종 수령자가 원하는 방향이 저기라면 장표들은 이런 식으로 구성되고 흘러 나가야 하고, 어느 순간 사실에 반대 되거나 사실에서 도약해야 하는 부분에서 엑셀러가 만든 숫자가 빈약한 논리를 메꿔주며 최종 수령자가 만족하는 아름다운 보고서가 탄생한다. 


보고서의 최종 주인을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작성자는 최종 주인을 절대 이길 수가 없고, 이길려고 할 수록 의미없는 야근만 더할 뿐이다. 그렇다고 절대 보고서가 아부하는 톤으로 그려져서도 안 되고 반드시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보고서의 최종 수령자가 내가 생각한대로 딱 원하는 보고서가 나오면 의심을 가지게 되니 보통은 ‘이렇게 저렇게 다 훑어봤고 A는 이런 장단점이 있고, B는 저런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보다는 A가 낫습니다’라고 언급할때 그 A는 반드시 최종 수령자가 이미 마음속으로 찍어놓은 대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주말 출근해야 한다. A를 좋아하는 지,  B를 좋아하는 지 파악할려면 회장 비서실이나 회장 직속 전략팀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회사 사람들과 술을 같이 마시고, 싫어도 주말에 등산가고 골프치러 다닌다고 보면 된다. 그래야 보고서가 잘 써지니까. 

보통의 보고서가 A냐 B냐 선택하는 비교보다는 과거의 히스토리와 임원간에 얽힌 이해관계가 다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맥락을 파악하고 어디까지 내가 건드릴 수 있고 어디는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지도 꼭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사실을 말하는 장표를 담았는데 갑자기 어떤 임원이 분노에 차서 “넌 뭘 잘 모르는 구나!” 이렇게 일갈이 날라오고 결국 재작업을 위한 야근을 한다.


맥락 파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보고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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