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소설가 조엔 롤링이 작품 구상을 위한 상상을 시도 때도 없이 하다가 직장 생활(사무직)을 망쳤다는 얘기를 듣고는 난 정말 작가 기질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그 시절 직장 다닐 때 말입니다.
뭔가 새로운 걸 창조해 내야 하니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온갖 세상을 그리고 있을텐데 저는 그러지는 않았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순수창작 소설가들(픽션)과 (논픽션)의 차이겠지만요.
그런데 요즈음 글을 쓰다 보니 평설 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뭐랄까…어떨 땐 서술 형식에서 이게 정말 더 쉽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글 쓸 때 말이죠. 같은 내용이라도 해설 식으로 쓸 때와 소설처럼 쓸 때는 정말 달라집니다. 글의 긴장감도 남다르고요.
매달 연재하는 역사 글의 시작을 언제부터인가 소설처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입부만 그렇게 하는 것인데, 주인공이 등장하고 주변 인물들과 몇 가지 대화를 하면서 그가 처한 현재의 상황 혹은 정황들에 대한 암시를 던져 주다가 - 가끔은 아예 구체적인 사건 묘사를 하기도 하고 - 그 다음 부분에서는 주제가 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로 들어가는 것이죠.
시작부터 끝까지 평설이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서 그런 방식을 도입해 봤는데, 일단은 글을 쓰는 제가 정말 재밌더군요.
그래요. 결론은 이야기라는 얘기죠.
사실 한국에서 서양 중세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은데 국내 판협지는 온통 서양 중세 배경이고 - 미드 '왕겜'이나 그 원작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가 거둔 성과는 정말 상당하죠.
이런 사정은 미국도 우리와 같은지 한 유명 판타지 작가는 '18세기 스코틀랜드 무장 봉기에 대한 역사 평설을 쓰려다가 아무래도 인기가 없을것 같아서 판타지 소설로 바꿨다'고 까지 말했는데 진짜 공감이 됩니다. 역사 평설이 아무리 재밌다 한들 어디 소설만 하겠습니까…아무래도 한계가 있겠죠.
예전에 작가로 일한적이 있는 선배들에게 이 얘길 했더니 다들 적극 공감하더군요. 일단 제대로 삘 받아서 정신없이 글이 풀릴 때는 진짜 글 쓰는게 재밌다는 겁니다. 다른 한 선배는 PC통신 시절에 엄청나게 소설을 썼는데 - 판타지 소설이었지요 - 하루에도 챕터 하나가 통째로 올라오는 정도였으니(그것도 몇 날 며칠을요) 정말 말 다했었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데뷔도 했고) 어제 알라딘 중고 서적에 갔다가 그 선배 데뷔작이 나란히 한 세트 진열대에 놓인거 보니 문득 그 신나던 90년대가 생각났습니다.
그 시절 제 주변엔 판타지 작가로 데뷔한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그 뒤로는 다들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겸업이 아니라 소설 쓰는 건 다 접어 버렸죠) 그 선배만 유일하게 전업 작가로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해왔었죠.(현재는 잠시 쉬고 있고)
여하간 이렇게 에너지가 왕성한 사람들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무나 가진 재능은 아니겠지만.
문득 이런 저런 상상을 해 보니 재밌군요.
미국 작가 잭 케루악이 광란의 타이핑으로 아주 두꺼운 소설 on the road를 3주만에 쳐냈다 그러죠.
그런데 3주가 맞긴 한데 몇년간 편집한 걸 쳐냈다고 합니다.
아무 미리 생각없이 광란의 타이핑으로 그리할 수 있다면 부럽기도 하지만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