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삼주 만에(더 됐나?), 쓰다 못한 블랙팬서 감상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고 자문해보니, 그렇게 막 쓰고 싶지도 않은 내용을 억지로 쓰기 시작해서 그렇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그랬던 겁니다. 사실 저는 이 얘기 하나가 제일 하고 싶었는데, 다른 곁가지도 여기 쪼금 저기 쪼금 얘기할 꺼리는 있어야 될거같아서, 되도 않는 글들을 덕지덕지 발라놓았던 겁니다.
그로 인해 헛되이 날린 시간들에 사죄하고 반성하면서, 제일 하고 싶었던 이 얘기로 쓸데없이 장대한 이 감상을 끝내겠습니다. 아 이 얘기가 너무 하고싶었어요.

저는 여기 악당한테 공감이 잘 안됩니다.


사실 맘먹고 씹어보기가 무섭기도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흑인을 이해 못하는 차별주의자가 될 것 같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름 여기저기 이 영화의 감상이나 해석을 구경하기도 해봤습니다. 어느정도 구경해본 결과로 나온 제 생각이 이겁니다. 악당이 과하게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거예요.

킬몽거는 아프리카인이자 미국 흑인이고 버림받은 역도의 후손, 계승권을 가진 왕족이면서 전직 특수부대 전투원에 현직 테러리스트입니다. 이 중에서 두세가지만 골라도 영화 한편 찍습니다. 근데 얜 그걸 다 가지고 있습니다.

킬몽거가 왕이 되고 행방불명됐던 트찰라와 다시 대면했을 때, 얘가 인삿말로 “와썹” 합니다. 전 이때 “뜨악”했습니다. 와칸다의 위엄찬 왕이고 명예로운 왕실의 후손인데? 와썹?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할지 모릅니다.
“아냐. 쟨 그러나 유소년기를 미국 할렘가에서 보낸 미국 흑인이거든.”
하지만 그 힙합을 많이 들었을 와썹 브로가 조금 전 왕궁에 들이닥쳐서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할 땐, 또 고전 사극 속 비운의 태자가 풍기는 품위가 있었거든요.
“그렇지. 쟨 그러나 정당한 계승권자이기도 하거든.”이라고 대답할수 있겠습니다.

이런 부분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총들고 공작을 벌일 땐 테러리즘과 현대적 교전의 전문가이고, 트찰라와 일대일 왕좌빵 할때는 온몸에 전통 문신을 한 타고난 부족 전사입니다.
박물관 큐레이터를 훈계할 때는 침탈당한 아프리카의 아들 딸이고 왕이 된 후 세계와 싸우려 할 때에는 아버지의 뜻을 품어 키워온 역도의 후예가 됩니다.

각각의 면모들은 개별적으로는 훌륭합니다. 그때그때의 행동의 동기를 잘 설명해주고, 비장미를 더하면서 인물의 능력을 관객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대체로 서로 잘 조합돼기도 합니다...
만,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 있거든요. 어딘가 충돌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인으로서라면 얘가 무기를 전세계로 쏴대면 안돼요. 당장 미국 유럽 흑인문제 저리가라하는 눈앞의 참상이 그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난립한 군벌을 제압하고 여기 엮인 서구 세력을 몰아내는게 먼저일 겁니다. 당장에 작 초반에 나키아가 하던 일이 뭐였던가요.
그러나 킬몽거는 동시에 미국 하류 흑인의 정체성이 있어서, 대륙 밖의 브로를 위해 그 힘을 먼저 쓰기로 합니다. 자꾸 이게 이 인물의 다른 특징들을 이겨먹습니다. 이 인물의 아주 중요한 정체성임은 알겠지만, 제 기준으로는 좀 져줘야 되는 시점에도 그래요.

마지막에 죽는 순간에도, 콕 집어서 꺼낸 말은 노예선의 선조들의 얘기입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이고 흑인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킬몽거 본인이 사슬 차고 노예 생활 한 십이년쯤 한 건 아니거든요. 어색합니다. 옳은 말인데, 어색해요.
존경했고 사랑했던 아버지와의 추억, 그가 그린 세상을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왕실의 가족으로서 와칸다를 어떻게 이끌어달라 얘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전복을 꾀한 테러리스트로서 파멸적인 저주를 퍼부어도 됩니다. 그 많은 것들중에 고르고 골라서 남긴 마지막 말이 저는 끝끝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악당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악당이 죽어 없어진 후에도 영화가 그런 방향으로 갑니다.
종막에 와칸다가 미국 땅에 구호소를 짓는건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돼요. 그 얘긴 들었습니다. 그 장소가 오클랜드고 옛 흑표당의 근거지라고요. 그 영화적 상징으로서의 가치는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상징성을 위해 개연성에 해를 입은 거라고밖에 저는 생각이 안됩니다.
당장 자기나라 장막만 벗어나도 주변에, 지금도 큐드럼 끌면서 깨끗한 물을 찾아다니는 같은 피부색의 동포들이 넘쳐나는데, 굳이 또 미국이고 굳이 또 흑표당입니까.
여기까지 쓰긴 했지만, 제 속에서는 또 흑인 히어로 이름이 흑표인데 흑표당 얘기를 어떻게 안할 수 있냐는 자문 자답이 나오는 군요. 그래요. 이건 넘어가겠습니다.


전 그래도 킬몽거가 좋았거든요. 환각에서 아버지를 만나 눈물 또르르 흘리는 모습도 멋졌습니다. 그 복합적 정체성에서 몇개만 걷었어도 훨씬 담백하고 우직하면서도 미묘한 면을 남긴 캐릭터가 됐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아쉽습니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재룐데 작은 그릇에 너무 꾹꾹 눌러담은 느낌입니다.
한숟갈 두숟갈 매 숟갈 들 때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좋은데, 다 먹고보니 과하달까요. 중심 악역 킬몽거부터가 그렇고, 영화 전체가 그런 의도로 기획된 것으로 보입니다.

차근 차근 두편 내지 세편 정도로 각각의 문제를 비추면서 나아갔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각각의 영화가 뿌리, 블러드 다이아몬드, 말콤엑스가 되는거죠. 아프리카와 그 밖의 흑인과 그들 모두의 뿌리를 각개로 다루고 종국에 묶어나가는 식으로요. 블랙팬서는 이 모두를 한편에 다루려던 것 같아요. 그것도 히어로 무비의 틀 속에.



물론 제가 말한 식으로 만드는건 훨씬 어려울 것이고, 저 혼자 좋아할것도 같고, 영화가 이미 충분히 성공한 것을 알고 있기에, 이만 글 마치겠습니다. 어휴 이제 끝냈네요.
다음에 또 하고싶은 재미난 영화얘기 생각나면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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