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2019.03.11 04:44

어디로갈까 조회 수:1030

한 달에 두어 번 들르는 사무실이 광화문 근처에 있습니다. 그곳에 갈 때마다 저는 한 여자와 마주치곤 해요.  그녀는 제가 가는 건물의 지하 바에서 일하고 있는 바텐더입니다.
제 기억 속의 그녀는 언제나 스쿠터를 타고 어딘가로 출발하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까맣게 잊고 있던 그녀를 보는 건, 보고서 '아, 저 여자!' 라고 기억을 환기하게 되는 건,  매번 그녀가 지하에서 불쑥 솟아나와  거침없는 동작으로 건물 앞에  세워 놓은 스쿠터를 탈 때의 짧은 순간 뿐입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삼 년 전 겨울 초입이었어요. 그녀는 몸에 착 붙는 가죽 점퍼와 초미니 가죽 스커트 차림으로 막 스쿠터에 오르고 있던 참이었죠. 한순간 무심히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저는 강렬한 불빛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번쩍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날카롭게 제 의식을 긋고 지나간 것은 이런 근심이었습니다. '저 여자는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구나.'

그건 사람들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는 그녀의 옷차림에서 오는 불안이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그녀의 삶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화살처럼 빠르게 와 꽂힌 막무가내의 느낌이어서 난감할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두고 '도도하고 차가운 중산층 여성'이라는 식으로 제 정체를 단정해버리기도 할 것이에요. 물론 그것이 저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그녀를 <무방비로 노출된>이라는 형용사의 현시로 보는 것도 불충분하고 부당한 판단이겠죠.

그녀와 저는 서로에게 스쳐가는 타인에 불과합니다. 저는 주차하기 위해 서행하며, 부릉부릉 스쿠터에 시동을 거는 그녀를 차창으로 잠깐 보고 말 뿐이에요. 그런데도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도발적인 무엇인가를 저에게 던져줍니다. 'Give me a ticket to the airplane'으로 시작되는 70년대풍 팝 가사를 연상시키는 찐득하고 질펀한 욕망 같은 것. 총체적 부조화가 주는 어떤 위태로움 같은 것. 
             
그녀는 <노출된, 무방비의> 사람입니다. 그녀의 반대편엔 차창을 검게 코팅한 벤츠나 제네시스를 탄 남자들의 질주가 있어요. 이에 비해 그녀의 모든 동작은 - 거리에서의 모든 디테일들은 - 모든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죠.
짧게 스친 후, 문득 그녀의 관심사나 고민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녀는 수족관 속의 물고기처럼 침묵 속에 유영하는 저편의 영상일 뿐입니다. 

그래요. 그녀는 저편의 영상일 뿐이에요. 이상하게도 그녀는 저에게 'Are you going with me?'가 아닌 'Give me a ticket to the airplane'라는 70년대의 저편입니다. 70년대라면 그녀와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이에요. 그런데도 그녀가 제게 70년대로 다가오는 이유가 뭘까요. 그녀가 바에서 상대하는 남자들이 주로 70년대의 아저씨들이기 때문일까요?
그녀가 헐벗은 차림으로 스쿠터를 타고 가서 남자들 (인 것을 누구에게 듣지 않고도 알고 있어요.)을 만나면, 웃고 얘기하고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 외에 뭘 더 하는지 솔직히 저는 모릅니다. 알아서 썩 유쾌할 것 같지도 않아요. 알아서 뭐하겠어요.

하지만 알고 싶습니다. 안토니오니 풍이든 고다르 풍이든 혹은 홍상수 풍이든, 남자들을 상대하는 시간에 그녀의 얼굴에 떠 있을 표정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녀는 즐거울까요, 괴로울까요, 권태로울까요.
그녀의 시간들이 침침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녀가 상대하는 남자들과 대등한 위치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 당당한 자세가 제가 조금쯤은 감탄할 수 있는 '자기만의 도덕'을 토대로 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통계와 사회과학이 부여하는 그녀의 현실 쯤은 쉽게 증발될 테니까요. 

한 달여 만에 조우한 모르는 여자의 얘기를 적고 있자니, 황지우가 어느 산문에서 피력했던 의문 하나가 맥락없이 기억 저편에서 떠오릅니다.
"영하 15도의 혹한이 '시아시'시킨 철제 난간에 무심코 손을 댔다가 너무 뜨거워 화들짝 손을 뗐다. 나는 왜 뜨겁다고 느꼈을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324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09804
109236 [오늘의 영화] 극한직업, 리틀 미스 선샤인 [14] underground 2019.04.27 1154
109235 듀나는 한사람 [1] 가끔영화 2019.04.27 982
109234 내가 이빵을 전에 먹었었나 [3] 가끔영화 2019.04.27 523
109233 지나가는데 쓰레기 같은 놈 가끔영화 2019.04.27 451
109232 엔드게임 잡담 - “흑흑~ 나의 20대를 이렇게 보내 버리다니” [1] soboo 2019.04.27 1438
109231 잡담 - 국가시험, 요즘 좋았던 광고영상 연등 2019.04.27 394
109230 [EBS1 영화] 싸이코 (1960) [11] underground 2019.04.26 744
109229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 왜냐하면 2019.04.26 561
109228 [게임바낭] 세키로 : 섀도 다이 트와이스 라는 게임의 엔딩을 봤습니다 [10] 로이배티 2019.04.26 607
109227 "낙태"이슈, 일단 들을 것! [7] Sonny 2019.04.26 995
109226 오늘의 엽서 (스압) [2]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4.26 232
109225 아주 오랜만에 버닝하는군요 [5] 러브귤 2019.04.26 1146
109224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화집 추천 부탁드려요 [1] 산호초2010 2019.04.25 473
109223 이번만은 꽃뱀이 맞을 거야.. 이번만은 주작이 맞을 거야..이번만은 무고인 것 같아.. 라고 기도하시는 분들께 [33] 일희일비 2019.04.25 2491
109222 [EBS1 다큐시선] 미세먼지, 누구 탓이냐고요? [11] underground 2019.04.25 918
109221 영드 미스 마플 리뷰 쓰다 날렸어요 [7] 2019.04.25 843
109220 이번엔 스포일러 100% 버전 어벤져스: 엔드 게임 잡담 [29] 로이배티 2019.04.25 2006
109219 오늘의 엽서 [2]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4.25 209
109218 작은(닫힌) 사회, 폐쇄적 집단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함과 병폐에 관하여... [5] 귀장 2019.04.25 899
109217 영화. '생일'을 보았어요. [1] 고인돌 2019.04.25 45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