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나의 미용실 답사기

2019.03.17 14:09

흙파먹어요 조회 수:1140

개그를 했더니 개그를 했기에, 개그를 안 했더니 개그를 안 했기에,
그렇게들 파토가 나버렸다고 자체 결론 내버린 연이은 맞선의 치욕.
행여나 답톡 올까 폰만 보는 꼴이 짜증난다며,
저희 팀 막둥이가 어제 저를 미용실이란 곳에 데리고 가줬습니다.

앞머리 3cm를 낙동강 방어선처럼 사수했던 단호한 학창시절을 지나,
아주까리 기름 발라 단정히 빗어넘기면 제일인 줄 알았던 개화기를 건너,

그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 당해 미용실 문 앞에서 번번이 회군, 결국 블루클럽에 의탁해 온 나의 머리.

제겐 던젼이나 다름 없는 그곳에 드디어 들어가려니 무슨 자격증 시험 보러 가는 것처럼 떨리더이다.
서슴지 않고 육중한 문을 밀어버리는 막둥이의 뒷모습을 보자니
과연 이십대 여자들은 강력하구나, 이런 데도 막 들어가네? 저도 모르게 그녀의 옷소매를 꾹 부여잡았습니다.

들어가면 우선 예쁘게 생긴 직원이 웃으면서 물어봅니다. 예약 하셨어요?
여러분, 예약도 합니다. 예약 안 하고 무작정 처들어 갔다간 피보는 겁니다.
예약? 했겠지. 했으니까 왔겠지. 예약은 막내가 대신 해줬나 봅니다. 나 몰라, 그냥 왔어..

그리고 다른 직원이 옷과 가방을 받아 줍니다. 여기서 잠깐 후회했습니다.
후드 잠바 입고 온 건 나 하나. 다들 왜 머리 자르는데 떨쳐 입고 온 거야? ㅜㅠ
어이, 거기. 니들은 머리도 안 길었는데 여기 왜 왔니? 돈이 썩어나니?
게다가, 받아 주는 직원은 아무리 나이 많아봐야 21살? 늙어서 죄송합니다. 역시 제가 괜한 짓을 했나봐요

그 후에는 선생님을 지정 받습니다. 학교인줄.
속으로 혼자 선생님은 국어일까? 과학일까? 개드립을 치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십니다.
이럴 수가! 저 같은 쪼랩은 가급적 알아서 피하는 미인입니다. 여기서 말 더듬으면 손발이 쪼그라들어 죽는 겁니다.

과외 선생님 미모 출중하시면 남학생들 내신성적 수직상승하더라는 검증 받은 적 없으나 매우 그러함직한 썰이 있지 않습니까?

허나 세상을 지배하는 2:8의 법칙은 여지 없이 이곳에도 적용 되어, 저는 지근 거리에 미인 있거들랑 햇살 아래 해삼처럼 쪼그라드는 쪽.

그러거나 말거나 근로 하시러 온 선생님의 과목은 고교 졸업반으로 치자면 분명 진로상담이셨습니다.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으시는데, 무슨 소린지 몰라 어버버(죽어버릴까?) 하고 있자니 

선생님, 이 시대의 참 스승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관대하게 웃어 주십니다.(왜 사니? 죽자)


내 너 이럴 줄 알았다는듯 한심하게 지켜보고 있던 막둥이가 질의응답을 대신 하여주고. 오고가는 외계어들. 그들만의 소통. 

순간 사람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동안 뭐 잘났다고 저는 걔를 갈궜을까요?
여튼, 이차저차 이제야 머리를 깎나? 했지만, 역시나 던젼은 던젼. 바로 용을 잡지 않습니다.
여러분, 미용실은 머리를 이발 전에도 감습니다.
따뜻한 물에 두피를 맡긴 채, 남이 감겨주는 머리는 참 좋구나.. 했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이유가 나옵니다.

이발은 온전히 가위로만 이뤄집니다.
제초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블루클럽과는 다릅니다.
예전에 다녔던 은둔고수들의 이발소 같습니다.
그런데, 이 때! 선생님께서 한 마디 하십니다.
네 머리는 이 부분에서 가마처럼 머리가 돈다. 그래서 늘 삐져나왔을 거다.
맞습니다!!! 언제나 한쪽 머리털이 빗고 빗어도 뿅 하고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그걸 한 번에 집어 내다니. 감격했습디다. 거의 1타 강사. 이것이 클라스다!

그렇게 이발이 끝나고 결정적 순간이 왔습니다.
미용실에서는 머리를 두 번 감습니다.
효수 당하는 대역죄인처럼 고개가 숙여진 채 억센 팔뚝의 이발사가 알뜨랑 비누로 벅벅 감겨 주던 이발소,
머리 같은 거 대충 싱크대처럼 생긴 데서 빨래하고 나오는 블X클럽 과는 다릅니다. 달라요.

얼굴에 물 튀지 말라고 수건도 덮어 주시고, 물 온도도 물어봐 주십니다.
온도가 어떠하면 어떠하겠어요. 배고프시다면 닭대신 그거라도 튀겨 드세요.
그런데, 머리를 감다가 말고 손으로 마사지를 해주시는 겁니다. 세상에 마사지라니...
내 까짓게 뭐라고 지폐 몇 장에 이렇게까지 해주시나? 눈물이 나는 겁니다. 

눈 뜨면 코 베이고, 면전에선 웃어도 뒤돌아선 비웃는 게 상식이 되버린 세상에서 아무리 월급을 받기 위해 하는 일이라지만 생면부지 남의 두피를 손가락으로 눌러 준다는 건 대단한 겁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오로지 증오만을 품고 두피를 누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불가에서 말 하는 보시라는 것이 특별한 게 아니여


그렇게 머리 감기가 끝나면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만져 주시는데,
거울을 보니 확실히 돼지감자가 감자가 되어 있습니다.

타고나기를 등급 외 상품으로 태어나 각고의 노력이 구슬프기는 하지만, 확실히 투자의 가치는 있어 뵙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냐고 물으시는데,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기 때문에 뭐가 뭔지 몰랐지만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안 든다고 하면 그게 미친놈이지.

그 다음은 다시 첫 스테이지로 돌아가 옷을 받아 주셨던 NPC로부터 옷과 가방을 돌려 받습니다.
그리고, 로딩할 때 등장했던 예약 직원에게 계산을 하고 인사를 한 뒤 퇴장하면 게임 클리어.

화들짝 놀란 제가 호들갑을 떨며 신기한 곳이라고 하니 막둥이가 말 합니다.
너 그러다 강남 미용실 가면 진짜 깜짝 놀란다고.
뭐? 거기엔 뭐가 있는데? 거기 가면 막 사람을 레고처럼 사지와 목을 뽁뽁 뽑아다가 오버홀이라도 해주나?
여러분, 자유시장경제가 이렇게 무서운 사회경제체제인 겁니다.

그럼 뭐 하나?
이렇게나 예쁘게 머리도 잘랐는데 당분간 맞선 볼 일이 없네요.
날도 따뜻하고 머리도 산뜻한데, 독거중년은 카메라나 지팡이 삼아 매화꽃 찍으러나 갈까봐요.
소니 a6400이 그렇게 잘 나왔다든데, 그거 구경이나 갈까?

아, 그래도 전 다음에도 블루클럽 갈 겁니다.
미용실은 대략 레벨23 이상만 들어갈 수 있는 던젼. 혼자선 절대 못 갈듯.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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