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인생의 이야기

2019.03.20 16:04

은밀한 생 조회 수:1126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작점은 기억해요. 대략 열 살쯤부터 제가 개인의 서사에 눈이 빛났다는 것을. 독서가 유일한 놀이였던 어린 시절에도 작가가 창조한 거대 서사의 흥분보다는 세부 묘사에 공들인 곱씹는 글을 더 좋아했던걸. 이후로 취향은 변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나기만 하여 전 실체감 있는 개인의 서사에 더 몰입하고,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땐 오히려 방대한 서사보다는 서정과 편린에 주목하는 식의 감상 태도를 지니고 있답니다. 그런 거대 서사는 마치 커다란 새가 하늘을 날며 작은 마을의 더 작은 집들의 더 작은 사람들을 휙 휙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고 스쳐가는 그런 기분을 들게 하거든요. 물론 우리가 거장이라고 일컫는 작가들은 그 커다란 새에게 돋보기를 씌우고 촘촘한 언어와 애틋한 마음도 지니게 만들지만요. 그런 식으로 오며 가며 들었던 어떤 사람들의 사연이 마치 저의 경험처럼 체화되어 (때로는 어떤 영화들도 그렇죠) 관련 장소나 사물을 보면 어김 없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가지만 적어볼게요.

1.
몸에 감춰진 흉터가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깊숙이 감춰뒀던 비밀을 나에게만 들려주며 그의 흉터가 생긴 이유와 과정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좋아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허벅지 안쪽에 손바닥만 한 흉터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비만 오면 조금 아프다고 했었던 게 생각나요. 그는 6년간 배를 타고 돌아와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 덕분에 버거킹 햄버거를 처음 먹어봤다던 사람. 이우 왕자와 배우 고수씨를 닮은 외모 덕분에 함께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어디선가 나타난 꽃다발과 쪽지를 받는 걸 여러 번 보기도 했었죠.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그를 만나는 동시에 회사에서 다른 남자를 만났죠. 직장 상사였대요. 결혼식 전날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해요.. “내일 결혼하니까 이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 말을 듣는 순간 4년 동안 아무런 낌새도 못 느낀 자기 자신이 가장 바보 같았으며 굳이 회사의 그 상사 자리에서 정사를 갖자고 종종 원했던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대요. 사람을 꼭 그렇게까지 농락했어야 했는지 분노에 찬 그는 여인을 등에 업고 단숨에 옥상까지 뛰어올라갔답니다. 네 맞아요. 이별을 통보한 장소도 그 여자의 회사였던 거죠... 정사를 마친 후 통보했다는군요. 옥상까지 여자를 둘러업고 계단을 오르면서 옥상 문이 열리면 그대로 뛰어내릴 생각밖엔 안 났대요. 하지만 그는 멈췄죠. 여자가 울면서 “엄마 보고 싶어”라고 하더래요. 지나고 나서야 얘기지만 만일 여자가 미안하다 살려달라 봐달라고 했다면 아마 그대로 뛰어내렸을 거래요. 그런데 그는 멈췄죠. 왜냐면 여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손수 지어준 저녁밥이 수백일이었고, 우리 사위라고 부르며 웃어주던 날들이 수백일이었기에... 그는 여자를 내려놓고 그 길로 나와 거의 한 달을 소주만 퍼마셨다는. 그런 이야기. 그렇게 한달을 보내면서 갑자기 허벅지 안쪽에 대상포진이 생기더래요. 시간이 지나고 치료를 받으며 아물긴 했지만 그 흉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비만 오면 좀 붓고 아프다 했었어요. 그래서 전 계단을 오를 때면 종종 그 사람이 마구 뛰어오르던 숨소리 같은 게 들려요. 그의 등에 업혀 있던 여자의 겁에 질린 표정 같은 것도. 분노와 공포와 슬픔이 뒤범벅된 눈물인지 땀 냄새인지 모를 것들 말이에요.

2.
예전에 꿨던 꿈에서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매화가 비닐하우스 위를 뒤덮은 적이 있어요. 매화는 똥이에요. 저는 경음을 싫어하니까 그냥 매화라고 부를게요. 여튼 황금빛+매화 꿈이란 건 보통 꿈이 아니라며, 로또 사기 귀찮아하는 저에게 넌 귀찮아서 밥은 왜 먹냐? 숨은 왜 쉬냐 귀찮아서??와 같은 질타를 한 몸에 받으며 로또를 사러 간 적이 있었죠. 당시 동행했던 분이 자신의 동생 친구 얘기라면서 들려준 얘긴데요. 이 사람은 로또를 매주 같은 번호로 10장씩 사는 습관이 있었대요. 한주도 빠짐없이 매주 같은 번호로 열장씩. 그렇게 10년을 습관으로 로또를 구입하던 그 사람이 마침 현금이 하나도 없던 날이 있었대요. 삼천원인가 있었는데 그걸로 커피를 사서 마셨다는군요.. 현금을 찾아서 로또를 살까 하다가 편의점 ATM기 수수료가 아깝기도 하고 해서 그냥 이번 주는 쉬자 하면서 집에 들어갔대요. 네 맞아요. 하필이면 그 주에 그 번호가 1등이 된 거예요. 정말 우리 인생이란 픽션을 넘고 또 넘죠. 이후로 그 사람 머리가 다 빠지고 우울증이 왔다고 하더군요.... 몰라보게 늙어버렸대요. 그래서 로또라는 단어를 접하면 종종 그 사람 얘기가 떠올라요. 아 그때 산 제 로또는 5만 원짜리 한 장 당첨됐어요. 비닐하우스를 덮은 황금빛 매화로는 부족했나 봐요...

3.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엔 작은 시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엔 매일매일 장사를 마친 엄마를 마중하는 8살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당시 전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저녁 무렵 시장에 엄마 심부름을 나가거나 할 때면, 그 애가 매일매일 다리를 저는 엄마를 저녁마다 시장으로 마중을 오거나 또는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과 마주쳤죠. 그 모습에 대해 시장 상인들 모두, 시장 주변 사람들 모두, 시장을 오고 가는 사람들 모두, 그리고 그들의 자녀와 자녀들의 친구까지 전부 다 알고 있었죠. 칭찬과 미소를 만발하게 하던 그 애. 머리를 늘 노란 방울 끈으로 묶고 화사하게 웃으면서 엄마가 장사하던 물건을 담은 꾸러미를 가녀린 양팔로 들고 재잘거리던 모습이 생생해요. 그 애 이마가 유난히 넓고 희었는데. 작은 눈이 더 작아지게 웃으며 늘 뭔가를 신나게 얘기했어요. 그 애 엄마는 절뚝이는 걸음걸이의 불안함과는 대조적으로 표정만큼은 무척 단단해 보였던 기억이 나요. 우리 엄마 설명에 의하면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선천적 장애를 앓던 그 애 엄마가 그 애와 더 어린 동생 둘을 키우며 살아간다고 들었어요. 그 애 어머니는 늘 무표정한 얼굴로 시장 좌판에 앉아 둥그렇고 커다란 빨간 대야에 떡과 손질한 나물 같은 걸 팔았는데 특이하게도 그중에 쵸코빵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브라우니 같은 건데, 그걸 집에서 손수 만든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투박하게 잘라진 채로 떡 옆에 놓여있던 쵸코빵을 사 먹으러 저도 종종 하교길에 그 아주머니한테 가서 줄을 섰었죠. 네 그 쵸코빵에 정신 팔린 초등학생들이 수두룩했어요. 꾸덕꾸덕 쵸코가 잔뜩 들어있고 아주 쫀득한 느낌이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커다란 손으로 쵸코빵을 말없이 꼭 한 개 더 주시던 아주머니. 미소는 숨어 있었지만 그 손동작은 참 너그러웠죠. 그리고 그날은 늦여름으로 기억해요. 해가 길어서 저녁 7시에도 환했거든요. 예의 엄마의 두부 심부름을 하러 저녁에 나가던 제가 쵸코빵을 생각하며 좌판 앞을 지날 때 어디선가 분명 희미하게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요. 두부 가게도 비어 있고 과일 가게도 비어 있었어요. 시장 입구 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이유 없이 가슴이 엄청 뛰었어요. 누군가 가슴을 치며 울고 누군가는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고 누군가는 얼굴을 감싸 쥐며 울고 있었죠. 차마 거기까지 가볼 엄두는 안 나고 전 빈 손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자조치종을 설명했죠. 에고 동네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게 아니니.. 하시던 엄마가 집 밖으로 나갔다 대략 한 시간 후쯤 들어오셨어요. 엄마가 그 애 말이다. 하면서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뛰었어요. 그 애가 엄마 마중을 나오다가 트럭에 깔려서..... 너 내일 학교 가는 길에 그쪽 길로 가지 말도록 해라... 에고 불쌍해서 어쩌나 착한 애가.. 저는 배가 계속 아팠어요. 가엾고 원통하고 억울하단 게 어떤 느낌인지 저는 그날 뚜렷하게 실감한 것 같아요. 이후로 오랫동안 골목길에 지나가는 큰 트럭만 보면 그 애 생각이 나서 배가 아팠는데. 세월의 힘은 위대한지라 지금은 그 정도로 아프지 않지만 아직도 종종 트럭 뒷모습을 보면 그애가 웃으며 엄마에게 향하는 모습이 떠올라요. 그 환한 이마도. 노란 머리 방울의 흔들림과 경쾌한 걸음걸이도. 그리고 그들 인생의 무게가 주는 불안과 눈물이 저를 툭 치고 지나가죠.



인간은 미소와 통곡 사이에 매달린 추다 - 바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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