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다시 생각해보기

2019.07.23 21:22

Sonny 조회 수:1219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건 미소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미소는 일을 하긴 합니다.친구 집을 청소해주고 받은 쌀을 봉지에서 줄줄 흘리며 가는 게 미소의 첫등장이니까요. 미소의 노동이 정규직이나 고정된 파트타임이 아닐 뿐이죠. 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본디 포함되어야 할 잉여가치가 빠진 결과로서 미소가 저 쌀을 갖고 가지 못하는 것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한 블라블라라며 떠들고 싶지만... 전 그런 이론을 잘 모릅니다. 어찌됐든 쌀봉지의 무게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미소는 청소 실력에 비해 조금은 철없고 태평한 친구인 것 같아요. 그리고 영화가 묻지 않은 의문은 계속 남습니다. 왜 미소는 "더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까?

영화는 내내 덜어내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혹은 양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생존과 취향의 저울질을 누구나 하게 됩니다만... 미소가 집이라는 조건을 덜어내버리기 전과 위스키라는 취향을 붙잡고 있기 전에, 미소가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가 집세를 내기 빠듯한 상황은 사실 몇만원 문제잖아요. 그렇다고 그가 잠 안자고 소위 빡세게 살면서 궁핍에 시달리는 것도아니고. 그는 자신의 가난 혹은 취향을 들쳐메고 가난에서의 탈출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소는 그 몇만원어치의 일을 더 하지 않습니다. 미소는 그 시간을 더 할애하기 싫은거죠. 이것은 마치 전고운 감독의 선포 같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해? 왜 잠안자고 놀 시간 버려가면서까지 일을 해야해? 그 몇만원이 저같은 사람에게는 일단 잉여시간을 희생해서 충당해야 할 무엇이지만 미소에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자유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정된 노동환경에 붙박히는 걸 운명이라며 체념하고 있지는 않나 곱씹게 됩니다. 어쩌면 21세기까지 인류는 주말에만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 라면서 후세대의 진보한 인류에 의해 회자될지도 모릅니다.

미소가 자신의 고독한 시간을 아까워하는 인간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미소는 자신에게 하룻밤 잘 곳을 제공한 친구들을 위해 뭘 만들고 청소해주는데 기꺼이 자기시간을 쓰고 즐거워합니다. 이 미미하고 소소한 인간은 오히려 타인과 함께 있는 시간을 광을 내는데 열심이라는 인상이 드는데, 이것은 아마 미소가 가사도우미라는 일을 하는 이유인 동시에 그가 자신에게 돈벌이 말고는 의미없는 노동에 투신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시간과 의미를 생존에 볼모로 잡혀버리는 것을 보면 미소의 "(그렇게 일)하지않음"은 그저 수단으로서의 파업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가치관을 계속 지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소는 집을 포기한 게 아니라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으로서 모두의 행복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로 한 거죠. 미소가 집을 떠난 것은 덧셈뺄셈의 문제가 아니라 가사를 실천하다 불필요한 뭔가를 치웠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만큼 자유로워진 하나의 등식이 아니라 미소의 삶은 그대로이고 괄호 안의 변수가 하나 소거된 것일 뿐이죠.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미소가 집을 옮겨다니는 과정은 미소의 다정함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계로의 점진적 진입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시집살이를 당하는 친구, 이혼하고 대출에 얽매인 친구를 자신의 솜씨로 달래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가면 갈 수록 자신의 달걀요리는 무용해집니다. 신붓감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선배 집이나 부자남편과 결혼한 선배언니의 집에서 미소는 완전한 식객으로 전락합니다. 주고 받음, 돕고 도움의 공평한 관계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때 미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충분히 주체적이고 아주 다정한 사람이지만 자본과 사회는 젊은 여자의 유랑을 엄청나게 위협합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회적 평등의 희망을 관계에서 찾을 수 없다면 여자들은 갈수록 자본주의에서 대안을 찾을 것이라고요. 왜 여자들은 남자의 조건을 그렇게 따지느냐. 그 답은 독립적인 여자가 온당한 자유와 수평적 관계를 즐기지 못하게 놔두는 사회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여자들은 미소처럼 단호함과 이해심을 품고 사는 대신 뭐가 됐든 타협하며 나름의 안정을 도모하는 게 훨씬 더 올바른 선택일 것입니다.

미소가 의도와 상관없이 덜어내버리게 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남자친구입니다. 남자친구는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몇천만원을 벌기 위해 떠납니다. 목숨값이라기에는 많이 저렴해보이는 연봉이 오르내리지만 미소는 남자친구를 보내야 합니다. 사람은 위스키나 담배와 달라서 조금 덜어내거나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후에 미소를 제외한 밴드부 멤버들이 선배보컬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모입니다. 그들이 미소를 추억하고 떠올리는 장소가 누군가와 사별을 나누는 곳이라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 때 영화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장례식이 미소의 죽음 때문인것처럼 착각시키기도 하구요) 남자친구의 출장이 생명이 걸려있다는 것, 미소가 한약을 끊고 점점 백발이 늘어난다는 점, 친구들이 장례식장에 모여 미소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연락이 안닿는다는 점 등 영화는 보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입에 담습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의 스토리가 점점 미소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네요. 취향과 인격을 지키는 "(그렇게 일)하지 않기"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나아가면서 삶 자체에 대한 파업으로 점점 발전해가는 것 같구요. 이제 미소는 친구 찬스도 다 써버리고 남자친구는 해외로 떠나버리고 통신비도 내지 못해 폰이 끊기고 완전한 고립으로 나아갑니다. 풀숲에서 텐트를 치고 있는 그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사람다운 삶이 노숙자의 삶과 완전히 겹쳐지는 이 결말은 많이 섬뜩하지 않습니까? 개인을 고정시키면 사회는 어떻게든 그 개인을 철저히 고립시킨다는게요.

저는 전고운 감독이 그 외롭고 스산한 결말을 통해 목숨을 건 선언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난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테니까, 그게 안되면 천천히 외롭게 죽을래. 반대로도 들립니다. 죽을 땐 죽더라도 내가 나인 것들을 절대 놓지 않을래. 그 무모한 고집과 결의는 반딧불이의 비행같아서 괜히 애처롭습니다. 무엇보다도 노동에 결탁한 저나 많은 이들 역시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문제일까요. 일주일 끝자락에서 맛보는 찰나의 자유와 집없이 전전하는 유목민 신세는 뭐가 그리 다르겠습니다. 집도 사랑도 위스키도 없이 살아도, 그래도 나를 함부로 팔지 않을래. 미소가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가사도우미 노릇을 했던 집의 젊은 주인은 고통을 토로하고 미소는 그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미소는 우리 모두가 실천하지 못할 용기를 영화 속에서나마 작게 불태우며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차마 끊지 못했던 속박을 내가 끊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게. 당신들이 잃기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내가 잃어버릴게. 어렵사리 지키는 당신의 세계를 당신 나름대로 잡아. 당신이 차마 우기지 못했던 자존심과 취향은 내가 대신 지킬게. 미소는 삶의 대안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실패를 대신해주며 집과 자본에 얽매인 우리를 안도하게 하는지도요. 나만큼 다정하고 강인하지 않으니까, 이 실험은 영화 속에서 나 혼자 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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