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국남자 1인의 고백

2017.11.29 09:03

사이드웨이 조회 수:2347

아으... 밤을 샜더니 메롱이네요. 오전에 요가를 가고 점심/오후의 약속을 나가고 싶었는데...

요가는커녕 잠 한 숨 못자게 생겼습니다. 왜냐면 지금 잠들면 저는 11시에 깰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어제 새벽에 제 SNS에 올린 글을 옮겨 봅니다. 

유아인/페미니즘 논란에 글 하나를 보태는 셈이어서 죄송스럽긴 하지만...

여기엔 올려보고,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어요.


*   *   *


유아인이나 페미니즘 논란 관련해서 뭐라도 써 볼까 싶더라도 망설이게 되는 지점은... 현재 여성들의 페미니즘적인 '자아 찾기 서사'의 가장 깊은 심연을 (내 시각에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더 이상 너희 남성은, 너희의 논리와, 너희의 이야기와, 너희의 관점은 필요 없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남성적 서사의 '부산물'로 살아 온 역사와 지금도 시궁창인 현실 탓이겠지만, 그 이유를 떠나서 어쨌거나 지금 여성들은 표면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든 간에, 잠재적으로는 "남자들은 이제 그만 좀 떠들어 줄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본다. 그만 나서라는 사람들 앞에서 기어이 (남자가) 그럴 듯한 말을 보태는 것도... 우습고 멋쩍은 일인 건 분명하다.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이런 사안에 대하여 균형 잡히고 차분한 관점을 유지하는 여자분이 있었는데, 내가 현재 운동의 이러이러한 부분은 좀 심하지 않은가요, 라고 물으니, 그녀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란 건 아니지만,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는 건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해요. 아직도 너무나 부족해요." 이 답을 듣고, 아, 대부분의 여성들이 내가 미처 그 깊이를 다 알기 힘든 분노를 담은 채 살고 있었구나, 란 걸 절감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즉 너무나 평범한 '한국남자' 1인은 여성들의 '서사 추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그 서사에 참여하는 방법은 오로지 여성들을 명백하게 옹호하며 편을 드는 수밖에 없는데, 그처럼 답이 정해진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솔직한 교감과 대화라기보단, 그야말로 운동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워서 서로에게 그다지 유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는 대부분의 '페미니즘적인' 남자분들은) 자연스레 입을 다물게 되고, 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일이 갖고 있는 어떤 점잖음의 미덕이 있을 것이다.


또는, 스스로 안티테제가 되어 아주 부정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다. 유아인이 그런 경우인데, 말하자면 여자들의 서사 추구를 영리하게(자신의 입장에선 절박하고, 정당하게) 이용하여 '객관적이고 정의로운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서사'를 확립하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페북 스타 장주원은 이번에도 보란 듯이 "진정한 페미니스트" 운운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매력적으로 장식하는 장렬한 포스팅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대다수의 자극적인 안티테제는 자기 과시의 혐의가 짙고, 그보다는 '여성들의 서사'에 전혀 성찰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냥 내 팬들에게 내 매력을 뽐내는 프로파간다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나는 SNS에서 '전면적으로 여성들의 편을 드는' 거의 모든 남자들의 포스팅에서도 조금은 '영합적인' 느낌을 받는다. 왜냐면, 각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결국 (여성들의 서사에 참여하기 위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김승옥과 김훈의 소설들을 당장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외치던 당시,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는 나는 그녀들을 미워했다. 지금도 난 김승옥을 사랑한다. 그의 작품속의 모든 여자들이 창녀나 자폐적인 존재로 묘사된 사실도 잘 안다. 그리고 '남성의 서사에서 전면적으로 목소리가 지워졌던' 여성들이 그런 서사적인 흐름에 얼마나 큰 분노를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그러나, 그 분노가 김승옥의 작품들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입증하진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런 '비뚤어진 여성관' 때문에 김승옥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히, 전혀 아니다. 여성들이 김승옥 불매를 주창하는 건 당연히 그들의 자유다. 여성들이 김승옥 판매금지를 주장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성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서사'(김승옥 따위는 읽어선 안 된다는)를 쌓아가고 있고, 거기에 나 같은 (다소 복잡한 맥락의) 남자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선, 지금 나 같은 '한남 1인'은 과거의 빚을 갚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절반인) 타인의 열렬한 '자아 찾기'에서 완벽히 배제되는 일의 소외감을 느끼며.


여성들과 함께 김승옥/김훈을 욕하고, 그들에게 '여성과 페미니즘을 잘 모르면, 입을 닫고 있었어야 한다'고 훈계하던 몇몇 남성들에 대한 내 기분은 좀 더 복잡했다. (사실 두 작가를 욕하던 여성들보다 이들이 더 미웠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들의 자유지만, 마침 '그 타이밍'에, 작가를 향해 돌을 던지는 태도는 품위 없고 천박하다고,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아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의 앞머리를 "유아인의 글은 형편없었지만..." 운운하는 장주원급 남성들의 포스팅을 벌써 몇 건이나 봤는데, 유아인의 글이 뛰어나고 형편없고는 이 문제의 핵심이 전혀 아닐 뿐더러, 그 뒤의 내용들도 마침 유아인과 논쟁을 벌여 유명해진 영화평론가의 트윗들처럼, 이미 '여성들에 의해서 수천 번은 말해졌고, 말해지고, 앞으로도 말해질' 내용과 판박이었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그랬다.) 결국, 그들은 그런 문장들로 자신의 세련된 감식안과 지성과 PC함을 포지셔닝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모든 포지셔닝은 결국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자기 고백의 다른 표현일 테니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현재의 페미니즘적인 흐름이 '여성의 서사 추구'라는 점에 있다. 이 서사 구조에선 본질적으로 남자들의 목소리는 필요없고, 오직 답이 정해져 있을 때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고정된 구조' 안에서 남성의 입장은, 자연스럽게 '포지셔닝화' 된다. 글은 '내 편'과 '네 편'을 확인하는 매개가 된다. 그럴 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면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묻고, 그에 대하여 상대의 침착한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불가능하게 된다.


물론 (남성으로서) 답이 정해져 있는 답을 한다는 건, 운동의 차원에선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한 어느 남자 교사처럼. 그러나 그처럼 운동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사안에 대해 좀 더 온건하고 다른 방식으로 목소릴 내고 싶어하는 남성들은 운신할 여지가 없다. 사실 (오랫동안 내가 해온 것처럼) 그저 그들의 목소리에 가끔 SNS에서 지지를 표명하고, 때때로 너무 심하고 잘못됐다 싶은 모습이 보일 때 우려하는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기엔 어떤 자폐성이 있다.)


트위터를 켤 때마다, 여성들의 분노와 연대, 그 처절한 '자기에의 배려'를 실감하면서도, 거기에 '결이 다른' 목소리, 또는 '우리가 듣기에 불편한 목소리', '우리가 조금은 놓치고 있는 것' 등등의 말들이 거의 백분지일도 개입되지 않는 사실이 다소 놀랍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보기엔 제인 오스틴이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트위터를 켜고 (그 시대적 특수성을 내포한) 자기 얘기를 몇 마디만 하더라도 매장을 당할 것만 같은(아니면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할 것만 같은), 어떤 폐쇄적인 시간의 멈춤이랄까, 순간성이 있다. 그 덕택에 비로소 현실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운동'이 가능했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폐쇄적인 운동의 한계, 같은 식의 말로 마무리한다면 물론 지극히 '한남스럽게'/꼰대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그 명망에 비해서 내가 읽을 때마다 실망하는 학자이긴 하지만, 그녀는 예전부터 인간은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바뀔 수 있다고 틈틈이 강조하고 있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인 관계에서 '운동'을 실천할 것을 주문하면서 말이다. 내가 느끼기엔,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페미니즘적 목소리를 내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오프라인의 구체성', 이 기울어진 현실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과 병폐에 너무도 상처 받고 실망해있는 것 같아, 우에노의 진단 또한 공허하고 하나마나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누구보다 자신을 배려하는 일,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일엔 언제나 균열이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매끄러운 무균질의 서사는, 서사라기보단 연설문에 가까울 테니.) 때론 자신의 어두운 면을 바라보고, 때때로 자기가 스스로를 밀어넣은 피치 못할 실수와 함정도 알게 되고, 미리부터 정해둔 답도 전략도 있을 수 없는 게 '서사적 진실'에 가깝다. 그 서사는 매 순간 수정되고, 다채로운 감정의 빛깔에 출렁인다. 이건 페미니즘에 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자아 찾기와 성장의 서사',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하는 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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