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ques Louis David´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비니 여인의 중재 부분, 자크 루이 다비드, 1799, 캔버스에 유채, 385cm × 5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 시절 이런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전쟁화나 역사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로 신세를 망친 사람은 나폴레옹만이 아니었습니다. 화가 다비드도 그런 비슷한 상황에 처한바 있었죠. 다비드 역시 나폴레옹처럼 로베스피에르에 줄이 닿는 열렬한 공화파였습니다만, 그 끔찍한 반동 사건 이후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연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도 나폴레옹처럼 한 때는 감옥에까지 갇혔다가 열심히 사상검증을 받은 뒤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바뀌었고, 그 바뀐 세상은 혁명정부에게 충성하던 정치 선전화만 그리던 그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어려운 세상이 되고 말았죠. 누구나 그가 로베스피에르에게 충성하던 사람이라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 겁나서 누가 그에게 작품을 주문할 것이며...이제는 혁명정부에서 총재정부로 바뀐 당국에서도 그에게 그림을 주문하지 않을 건 분명한 사실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기가 막힌 묘책을 하나 생각해 냅니다. 바로 관람료를 받고 대중에게 그림을 공개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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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도 없고 티비도 없던 시절, 대중은 그의 근사한 그림에 열광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 듯한 아름다운 선남선녀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게다가 그 아름다운 청년들이라니! 다비드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시절부터 왜 그렇게 그의 작품에 잘생긴 청년들이 많이 나오는지 - 그것도 벌거벗은 멋진 남자들 -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가 그의 작품에서나 이후 신고전주의 미술 전체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 서양 미술이 상업적인 성격을 띄게 됐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다비드의 성공에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앞 다투어 다비드의 선례를 모방했고(다비드의 이 유료 전시회는 최초의 개인전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화가를 비롯한 조각가나 도예가 같은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어 판매 겸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 물론 유료였지요 - 이런 방식은 예술가에게는 특별한 후원자 없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하나라도 더 많은 관람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업적인 요소가 이 시기부터 미술 작품들에 짙게 투영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이런 정치 선전의 표현 요소가 강한 신고전주의 장르의 작품들이 이런 경향을 유달리 심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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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 아카데미는 미술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던 터라 다비드의 이런 행동에 대해 많은 비난 여론이 있었습니다. 미술 아카데미(조각과 회화 그리고 건축 분야의 미술 대학, 루이 14세 시절부터 제정됨)는 미술가가 돈을 받고 작품을 전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구요. 그러나 지금은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를 거쳐 총재정부 산하였습니다. 만일 로베스피에르 정권 치하였다면 유료 전시회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로베스피에르 역시 미술을 공공재라고 생각함) 그는 가고 없고 사실 지금 파리의 문화계는 딱히 어떤 질서라든가 누군가 나서서 이게 규율이다! 라고 규정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혁명정부 시절 미술계를 꽉 잡고 지배했던 사람이 바로 다비드 본인이었거든요. 오죽하면 별명이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였겠습니까. 혁명정부 내내 투철한 공화주의자로, 공화국과 자코뱅(혁명파 좌파 그룹)의 이념을 선전하는 여러 정치 선전화를 그려왔던 그였지만 한 때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지난 테르미도르 반동(17947) 이후 거의 2년 가까이 파리 전역의 여러 감옥과 형무소를 전전하는 딱한 신세가 되고 말았죠. 물론 죄목은 로베스피에르의 꼬리로서 권력을 이용해 동료 미술가들을 핍박한 혐의였습니다. 그런데 이 죄목은 입증이 쉽지 않아서 다비드는 계속 재판을 기다리며 힘든 수형 생활을 버텨내야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작 다비드에게 핍박을 받았다는 미술가들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혁명 이전의 미술가들은 모두 지난 시절의 왕정 체제하에서 왕실과 귀족에게 충성하던 사람들이라 1789년에 바스티유가 습격당한 이래로, 모조리 해외로 도망쳐 버리거나(대표적으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가장 신임을 받았던 여성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륑, 다비드의 주요 경쟁자) 다비드처럼 혁명 미술가였기 때문에 딱히 다비드가 핍박을 할 만한 동료 미술가는 없었기 때문이었죠. 사실 혁명정부 자체가 고작 1년도 채 안된 기간만 존속했기 때문에 그 와중에 미술가들끼리 미술계라는 권력을 두고 다툴 일도 없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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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인 상황에서, 자코뱅 동지들 목이 죄다 달아난 상황에서 다비드는 연일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비단 죽음의 공포뿐만 아니라 그의 창작에 대한 열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느 예술가들에게도 때가 있듯이 다비드 역시 아직 그의 예술 세계가 전성기를 맞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한 예술적 창작과 영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할 수 없는 절망감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죠.

 

 

....국민공회의 멤버인 화가 다비드는 연단에 있었고 몇몇 동료들이 그를 기소하자 작은 소리로 더듬거렸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그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이마에서 흐른 땀이 옷을 적시면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커다란 얼룩을 남겼다....

 

 

훗날 다비드의 제자가 된 화가 에티엔 장 들레클루즈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공회에 갔다가 우연찮게 본 광경을 자신이 쓴 스승의 전기에서 서술했는데,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된 훗날 스승의 첫 인상은 어린 제자가 보기에도 정말 가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렵게 어렵게 고발을 변호하면 누군가 또 나서서 그를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탈리앙의 발언은 그를 정말 벼랑으로 몰고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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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덕과 자유만을 원하는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으며 어떤 재능을 가졌더라도 이에 부합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습니다.

 

자유만을 - 탈레앙이 지적한 이 자유가 그에게는 또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지난 시절, 혁명정부 내내 다비드가 추종했던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자코뱅 당원들은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그토록 무섭게 내달렸었습니다. 길로틴으로 상징되는 공포정치의 목표는 바로 자유평등'

연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가 더 중요한 부르주아와 평등이 더 중요한 노동자 - 농민 - 의 연대였는데, 이들이 최종 목표로 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모든 남성의 보통선거권 확보모든 국민의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권을 보장하는 정부의 구성이었죠. 생전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은 이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해 그야말로 그 어떤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신념으로 달렸었습니다. 하지만 혁명파 내에서 자코뱅은 좌파일 뿐 전체가 아니었고 혁명정부가 계속 노동자를 위한 통제경제를 고수하자 혁명파 내부에서 - 특히 우파 -

슬슬 반대하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바다 건너 영국이 산업혁명 이래로 급속하게 경제 성장을 이루는 것을 보고 이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의 통제경제가 프랑스의 경제 성장을 발목 잡고 있다고 생각하여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하간에 이런 불만들이 겹치고 겹쳐 거기에 혁명가들 사이의 불신까지 커지면서 결국은 혁명파 우파가 좌파들을 싹쓸이 해버리는 사단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794년의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불리는 바로 그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공포정치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른 독재정권을 엎어버린 이 사건을 왜 학자들이 반동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의아할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사에서 이 명칭이 가장 의아스러웠었는데 - 무릇 역사 용어라는 것은 바로 가치관이 담긴 것이라 말입니다 - 반동이라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인 용어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렇게 이름 붙인 건 다른 이유는 아니고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을 없애버린 우파가 이후부터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민생정치는 다 던져버리고 오로지 부르주아 자본가들을 위한 정치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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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나 그를 추종하던 혁명파 좌파(자코뱅)의 몰락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오늘날 기준으로 봤을 땐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저 시절에는 정말 급진적인 것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군복무를 하고 힘들게 평생 일해야 하는 남성들 대부분이 투표권도 없었고(프랑스에서 남성 보통 선거권은 1848년의 2월 혁명 이후에나 가능해집니다. 그것도 무려 유럽에서는 최초로 획득한 것이지요. 물론 돈 많은 소수의 남자들은 투표권이 있지요. 당연히) 국가란 혈통에 의해 왕이나 여왕을 따라 지배권이 분할 상속되어왔던 영지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에게 - 그것도 수 천년 동안 - 국가의 주인은 바로 그 국민 전체이며 그들에게 국가의 주인 된 권리인 주권이 있다고 하는 민주국가의 이념을 강제로라도 세우려 했던(폭력을 통한 공포정치 -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신성한 폭력이라고 말했죠) 더구나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정복한 점령지의 수탈도 거부했던, 그들의 몰락은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민주주의 투사가 사람을 막 죽여가면서 민주국가를 건설하려 한다는 것이 정말 상상이나 되시던가...이 말입니다. 이것이 비록 230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정말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뭐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겠습니까, 다 저런 참혹한 일들을 겪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거겠죠.

 

 

여하간 즉결심판에서 간신히 혐의를 벗어 사형 선고는 면했던 다비드에게 다시 시련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번의 기소 역시 다비드가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번엔 다른 사유였습니다. 혁명정부 당시 공안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체포영장에 서명하는 일을 전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탈레앙의 고발이 오로지 자유만 운운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죠. 사실 탈레앙이야 말로 공포정치 수괴들 중의 수괴였는데 말입니다. 눈치가 없다 하더라도 다비드로서는 이런 옛 동료들의 비난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사상전향을 말이지요.

다비드로서는 가슴 아프고 또 체면도 심하게 구기는 일이었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라도 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법정에서 더듬거리면서 진술했습니다. 후세의 학자들에게 비겁하다고 비난을 받는 발언이기도 했는데, 그는 단지 좁은 소견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강렬한 개성과 혁명적 열정에 자신이 속았던 것이며 내 심장은 순수한데 오직 나의 머리가 잘못되었던 것이라고 변명했습니다. 덕분에 이번의 기소에서도 간신히 사형은 피했습니다만 이후 뤽상부르 감옥에서의 투옥 생활을 여전했고 결국 다비드는 또 다시 비슷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힘든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운명이 그를 버리지는 않았는지 1796, 마침내 방면되어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에게 천운이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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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그는 한동안 은거하면서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가장 논란이 되지 않을 초상화들을 주로 그리고 많은 제자들을 받아 후학을 양성하면서 오로지 생활형 예술가의 모습으로 한두 해를 보냈습니다. 물론 그는 다시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요. 다시 화단에 나가 프랑스 아니 유럽 최고의 명성을 얻을 기회를 생각했습니다. 지난 시절에 그에게 로베스피에르가 있었다면 다음에도 또 그와 같은 유력자를 만나 그의 정치적 동반자로, 그의 야망을 캔버스에 그리며 다시 화려하게 비상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 그는 고대 세계의 미학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는 그가 줄곧 추구해온 바였습니다. 그가 막 화가로서 붓을 들었던 초년 시절에 프랑스에서는 신고전주의 사조가 처음으로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절은 아직 부르봉 왕가가 건재하던 때였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도하는 로코코 사조가 베르사유 궁을 비롯한 프랑스의 문화를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왕비는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사조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화려한 장식 미술의 로코코 사조에 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따르려고 하는 이 새로운 유행이 베르사이유 궁정의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작품들을 여럿 그렸었는데, 대표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혹은 <아들들의 시신을 들여올 때의 부르투스> 같은 초기 로마 공화정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는 일찍부터 고대 세계에 사실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여 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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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들이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 열광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로베스피에르가 지난 시절에 로마 공화정을 혁명정부의 이상형으로 높이 기렸던 점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몰락했지만 혁명정부에서 이제 총재정부로 바뀐 새 정부 역시 그들이 공화주의자라는 걸 잊지는 않고 있었습니다.(다만 이제는 노동자, 농민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르주아만을 위한 공화국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이제는 중단했던 제국주의 침략도 열심히 하고)

 

그러니 그가 새로 야심차게 추진하려는 작품이 바로 고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습니다. 사실 그는 그 즈음에 로마 보다는 더 고대 세계의 원류로 보이는 그리스 문명에 빠져 있었고 호메로스를 주제로 한 작품도 미리 구상을 해 둔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 들어선 총재정부가 영 정치적으로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애가 타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능한 총채 정부는 그토록 그들이 원했던 자유를 얻었지만 경제 정책에서는 나날이 실패하여 파리 민중의 불만은 높아만 갔고 생활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세느강에서 투신자살하는 일이 속출했던 것입니다. 이에 보다 못한 성마른 민중들의 무장 봉기만 다섯 차례나 터졌구요. 그렇다고 무슨 무정부 상태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민중에 의한 봉기만 수 차례 일어나자 막말로 지난 시절엔 길로틴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빵이 있었는데, 이제는 빵도 없는데 길로틴에서는 피가 마르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던 것입니다. 이 혼란의 끝에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비드로서는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에게는 어렴풋이 답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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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룬 모든 것이 한 군사 모험가의 수중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죽기 전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사실 이는 그의 마지막 연설 중 한 구절이었는데, 이 연설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반대파에 의한 쿠데타가 터지고 그는 그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마치 유언 같은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굳이 무슨 앞일을 내다보는 예언자의 능력이 없어도 이 혼란의 끝이 어떤 식으로 정리될지는 익히 예상이 되는 바였습니다. 내정의 혼란과는 달리 프랑스 군은 계속된 혁명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고 총재정부의 정치력이란 우왕좌왕 하면서 이리저리 시민들 눈치나 보다가 뒤로는 부정축재나 해대는 실로 참담한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군부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은 자명해 보였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 것은 군부에서 등장할 그가 과연 누구인지, 아니면 그가 하나인지 아니면 여럿인지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마치 로마의 군인 황제 시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유력한 장군들이 튀어 나오고 자기들끼리 권력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혁명군이 분열되어 권력 다툼을 하는 장군들을 따라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실로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그는 붓을 들었습니다. 처음 구상했던 호메로스 보다는 더 나은 착상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통달하여 신들이 찬양하는 노시인 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에 찬 젊은이들을 떠 올렸습니다. 그러기에는 늙은 그리스 보다는 젊은 로마가, 새로 시작하는 로마의 이미지들이 화려하게 그의 눈앞에 솟아 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온갖 메시지를 다 담고자 했습니다. 예전의 작품들처럼 단순한 구도로 단 하나의 주제만 강렬하게 전달할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복잡한 다양한 표정들과 이미지들을 구현하고 짧지만 단 하나의 강렬한 메시지만을 전달할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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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한 전사와 평화의 구현자들, 어찌 보면 상극이 되는 이들을 한 데 융화시킬 만한 주제는 뭐가 있을까? 그는 궁리했습니다. 따로 있다면 멋진 주제겠지만 같이 있을 경우 서로를 밀어내는 이 주제들을 - 잘못 묘사될 경우 하나가 비겁자가 되거나 아니면 난폭한 무뢰한이 될 상황 - 한데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할 만한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바로 이들의 성을 다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물들을 남과 여로, 그리고 서로 대립하는 남자들을 달래는 여인들이 있다면 어떨까? 거기에다가 천진한 아이들까지 있다면 또한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여인과 아이들, 이보다 더 선명한 평화의 메시지가 또 어디 있을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에게 떠오른 것은 바로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와 사비니 인들의 일화였습니다. 남자들끼리 집단 이주하여 혼례를 올릴 짝이 없었던 로마인들이 사비니 인들을 속여서 그들의 여인들을 집단으로 약탈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결국 그들이 전쟁 직전까지 가자 뜻밖에도 사비니 여인들이 그들을 만류하여 참혹한 전투를 막았다는, 실로 교훈적인 이야기였죠.

 

사실 그는 언제나 용맹하고 도덕적인 남자만 그려왔었습니다. 그에게 남자란 여지없이 우월한 존재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또는 자신의 고결한 이상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도 초개같이 버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비드에게 여성은 어떠한 존재였던 것일까요? 그에게 여성이란 역시 남자만큼 고결한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존재였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들의 높고 곧은 결의에 혼자 뒤에서 슬퍼하거나 절망하는 가련한 존재였지요. 어찌 보면 고결한 남성의 높은 덕목을 찬양하는 조연들에 불과한 정도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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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이번에 새로 도전하는 다비드의 작품은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사고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말이지요. 여성들은 종래의 그의 작품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작품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주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성들은....사실, 남성들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지 중심에서는 밀려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다가 다비드는 이 시점에서 자신의 작품이 종래의 양식을 그대로 추구한다면 이 주제 하에서는 남성 캐릭터들이 완전히 여성 캐릭터들에게 밀려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실로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작업을 위한 수 차례의 스케치를 하다가 문득 그는 그 사실을 깨달았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인간사의 여러 모습들을 한 화면에 담으려다 보니 화면 구도가 너무 난삽해지고 마치 무슨 아비규환의 난장판같은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의도한 그 주제의 그림은 그렇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티치아노나 루벤스같은 거장 선배들이 그가 선택한 그 주제로 작품들을 남겼고 실제로 그들은 그 아비규환을 의도하고 묘사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원하고 있었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복잡한 화면 구도를 원하면서도 뭔가 시선이 정리된, 아니 사람의 시선을 확 끄는 센세이셔널한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미지들의 스케치가 쌓일수록 그의 생각은 더 분명해져 갔습니다. 그가 구상한 그림은 등신대 보다도 더 크게 인물들이 그려질 대작이었습니다. 그가 상상한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들어갈 제작비만 해도 상당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그릴 이 그림은 정부나 혹은 어느 유력자의 후원 하나 없이 그려질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막대한 제작비는 대체 어디서 충당할 것이란 말인가? 예나 제나 마찬가지였지만 모든 미술 - 특히 유화는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드는 미술품이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기획하는 역사화의 경우, 출연할 모델들만 해도 상당한 인원이 될 테고 작품이 완성된 뒤 그림을 전시할 마땅한 전시 공간을 확보할 일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다비드에게 떠오른 근사한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료 전시회였던 것입니다.

 

비록 아카데미의 완고한 태도나 기조의 미술계의 관례를 따른다 하더라도 유료 전시회는 처음 시도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나 처음 있는 일이었지, 이미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두어 차례 시행이 된 바도 있었습니다. 벤자민 웨스트의 1770년작 <울프 장군의 죽음>이 바로 그 좋은 예로, 당시 런던 시민들은 그 대작을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고 몇 시간씩 미술관 앞에서 줄을 서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비드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벤자민 웨스트보다 못할게 뭐람? 사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국가 최고 권력자의 신뢰를 받아 정부의 후원 아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좋은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에서 예술가 혼자 힘으로 작품을 만들고 대중에게 널리 보이기 위해서는 정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확실하게 끌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확실한 무엇인가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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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는 그것을 고대 그리스 인들에게서 찾아냈습니다. 사실 지금 그가 그리려고 하는 주제는 그리스가 아닌 로마의 역사에 있었던 한 사건이었는데, 고대 그리스 인들이 로마 인들에게는 문화의 원류가 됨으로 그 둘의 양식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를 구분하려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워 보였죠. 일례로, 고대 그리스 인들에게는 예술에 있어서 몇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여성의 표현에 있어서는 누드를 금지한다든가(누드는 오직 남성에게만 허용하다가 알렉산드르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 이후부터 여성 누드 작품 허용) 또한 누드는 영웅이나 신적인 인물의 표현에서만 가능하다던가..이런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다비드는 바로 이 원칙을 충실히 살리려는 계획이었지요.

 

언젠가 다비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난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미술을 그리스 인들이 추구한 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아들들의 시신을 들여오는 것을 지켜보는 브루투스>를 그릴 때 난 로마인들의 미술 원리 하에 있었다....여러분, 그러나 그리스 미술이 없었다면 로마인의 미술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들은 야만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미술은 본래의 원천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고 지금 내가 그러는 중이다...난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 내 작품에서 모든 사람은 벌거벗은 몸이 될 것이며 고삐나 재갈이 없는 말들이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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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충격적인 발상이었죠. 다비드는 마침내 상상속으로 그려왔던 고대 전사들의 갑옷과 투구를 모두 벗기기로 했습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었죠. 비단 갑주만이 아닌 그들의 입은 옷도 모조리 벗겨 버리고 그 남자들을 전부 벗은 몸으로 그릴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올 누드로? 남자들이 다 벗고 나온다고? 사실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여성의 누드를 금지했다고는 하지만 헬레니즘부터 시작된 여성 누드는 르네상스를 이후로 이제는 보편화된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활약했던 시절에도 그랬었지만, 사람의 누드를 그린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가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비록 고대 그리스 인들이 남성의 누드 이미지에 남자가 가진 용맹과 도덕 등 인격의 아름다움을 육체에 부여했다고는 하지만 이후 중세 1000년 동안 엄격한 기독교의 성 윤리에 의해 육체는 음란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신실한 기독교 인들에게 성이란, 부부가 자녀를 낳기 위한 것이 아니면 전혀 인정되지 않는 문화가 이미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남성들은 남성우월주의의 특권을 누리며 마음껏 혼외정사를 즐길 순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도덕적인 비난은 피해갈 순 없었습니다.

 

 

이런 문화가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아무래도 당시의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인간의 벌거벗은 몸을 그리거나 조각하기 위해서는 사회 통념과 적지 않은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비록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은 아니었지만 르네상스 이후로 서양의 미술가들은 언제나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피나는 예술적 노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미학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혹독한 투쟁을 해야했습니다. 미술가에겐 무엇보다도 자신이 만드는 작품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는 가장 큰 과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술에서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강력한 성적 이미지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유용한 이미지. 이 마법의 구슬을 어떻게 빛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이 당시 모든 미술가들의 과제였습니다.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우리들로서는 - 미술책에 실린 도판들만 봐서는 - 그런 누드들이 그렇게 문제가 됐을지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실제로 작품을 만드는 미술가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회적 제약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니, 그가 만드는 그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도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다비드는 과감하게 그 도전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일단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완전한 누드로 남성의 용맹과 도덕성을 표현하는 것그는 예술가의 감수성으로 벌거벗은 건장한 남자들의 몸이 사람들의 시선을 확실히 끌 것이란 확신은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절대로 이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눈 앞의 그림이 근사하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에로틱함은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필시 외설스럽다고 비난을 쏟아낼 것이었고 그들의 아내나 딸들을 전시장에 데려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비드에게는 알리바이가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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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비드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최악의 외설 기준이 여성 단독 아니면 남녀가 함께 있는 음란한 이미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녀의 애정사가 엮여있는 누드 이미지가 주 경계 대상이었지 남자들만의 - 그것도 성과 관련이 없는 - 독자적인 누드 이미지는 아직 경계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에게 누드로 남성 영웅들을 조각했던 고대 그리스 인들이야 말로 더 할 나위없는 선구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문제는 누드로 표현되는 대상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신과 신적인 인간 - 신화속의 영웅들 - 에게만 해당되는 이미지를 실제 역사의 인물에게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런 문제도 그냥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다비드의 그림 주제인 사비니 인들과 로마인들의 이야기가 실제 역사가 아닌, 건국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다 알고 있지만 230년 전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것이 실제 로마의 역사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다비드는 실제로 의식을 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사실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이 작품에서 실현했습니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 존 버거가 주장했던 누드 미술에 대한 이론(1972, 다르게 보기) 바로 인간의 벗은 몸인 누드야 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옷이라는 것입니다. 다비드는 자신의 작품 속의 남자들이야 말로 순수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가졌다고 했지만 사실 저렇게 완벽한 멋진 몸을 가진 남자들이 실제로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남녀를 불문한 모든 누드화들이 다 실은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창작을 하는 미술가들이나 미술 감상가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인간의 가장 성적인 모습, 관람자의 시선을 가장 확실하게 끄는 벌거벗은 몸이야 말로 실은 완벽하게 꾸며진 상업적인 옷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옷이 아름다워야 함은 말할 것도 없구요. 작품을 그리는 내내 다비드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들어감을 실감했습니다. 확실히 중심에 선 여인들에게 밀리던 좌우 양편의 전사들이 갑주를 벗고 온 나신을 드러내자 화면의 새로운 좌우대칭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하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가운데 자리 잡은 여인들과 아이들의 호소력 있는 모습 때문에 좌우 양편 남자들의 에로틱한 벌거벗은 몸들이 그 노골적인 성적인 이미지가 상호 상쇄되는 느낌까지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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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1799119(혁명력 브뤼메르 18)에 결국 다비드를 비롯한 모든 프랑스 인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한 유력 장군이 반란에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전제정을 파괴하고 혁명으로 건설한 공화국 그리고 그 공화국이 피의 혼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한 장성, 로베스피에르의 표현대로라면 어느 군사 모험가의 수중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바스티유 습격 이후 10여년의 혁명 프랑스, 그리고 파리 시민들은 정말 지난 10년의 세월을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엄청난 역사의 에너지가 그들을 사정없이 앞으로만 밀어부쳤었죠. 그런데 이제는 마침내 쉴 때가 온 것일까요?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난 12월에 이 혼란의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비드는 파리 중심가의 대형 저택을 하나 빌려 웅대한 전시공간으로 꾸민 뒤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야심작 <사비니 여인의 중재>를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예상외로 쿠데타 뒤의 프랑스 정가는 빠르게 안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걱정과는 달리 다른 장성들의 눈에 띄는 반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쿠데타를 주도한 그 젊은 장군이 빠르게 국정을 장악해가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더구나 그가 그린 그림의 여인들이 외치는 평화는 정말 이 상황에서는 너무나 적절한 정치적 메시지로 인식이 됐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 싸울 때가 아니다. 서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비니인들은 더 이상 찾아올 딸들이 없고 그들이 벌해야 할 강탈자 역시 없기 때문이다...이들이 더 이상 싸움을 한다는 것은 이제 남편에게서 아내를, 아들에게서 어머니를 갈라 놓는 것이 됐을 뿐인 것이다...그림의 메시지는 강렬했습니다. 이 많은 인물들의 배경인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 옆에는 거대한 성채가 그려져 있는데 - 시대에 맞지 않는 그 외관도 그렇지만(고대 시대에 중세의 성채라니) - 누가 봐도 그 성채가 상징하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바로 지난 대혁명 때 파괴된 바스티유 감옥이었지요. 비록 과거의 우울한 전제정을 연상케 한다고 하여 현재는 철거된 건물이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그 이미지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예상대로 이 작품이 공개되자마자 여론은 물 끓듯이 끓어올랐습니다. 다들 작품의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인물들이 등신대 보다 더 큼) 또한 다비드가 작품을 설치한 방식에서도 놀라와 했죠. 맞은편에 거울을 세워놔서 사람들이 마치 로마인과 사비니 인들 사이를 걷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높은 입장료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다비드는 1인당 입장료를 당시 숙련공의 하루 일당만큼 책정했는데 더 대단한 것은 이 정도의 높은 금액과 그 엄청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전시가 성공적이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그의 의도대로 된 것이었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비드가 에로틱한 누드를 그림에 있어서 이를 정치적, 도덕적으로 포장할 줄 알았고 또한 그 엄청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대단히 성공했으며(무려 5년간 흥행함) 엄청난 돈도 벌어들였다는 것입니다.(서구 근대 미술계 최초의 개인전) 이 때의 수익금으로 그는 적지 않은 부동산을 사들였으며, 이후부터는 옛 영광을 찾아 다시금 프랑스 최고의 화가라는 것도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진정 아이러니 한 것은 이 작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그토록 대단했음에도 흥행이 대단한 성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침묵하는 다수가 그토록 많았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떠들고 비난을 해도 정작 조용히 지갑을 열고 그림 감상을 하고 가는, 그 보다 훨씬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마침내 다비드는 그토록 원했던 운명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최근에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젊은 장군이었습니다. 그 젊은 장군은 비록 야심차게 준비했던 원정은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지만(1798년의 이집트 원정)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툴롱의 반혁명분자들을 토벌해서 파리의 중앙 정부에 강력한 인상을 준적이 있고 이후에도 이탈리아 원정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 소속이었기 때문에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다비드와 비슷한 신세가 되었었지만 곧바로 그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군에 복귀한 터였습니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은 인생역정이나 이후의 정치적 행보를 보나 서로가 닮은 점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화가로서, 그리고 또 한 명은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최고 권력자로서 말입니다.

 

 

연일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 전시실에 단숨에 최고 권력을 장악한 이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권력자와의 첫 만남에서 다비드는 썩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군인들은 전장에서 이렇게 벌거벗고 싸우진 않습니다.”

 

다비드로서는 실로 가슴 한 켠이 철렁할 말이었습니다. 당황한 그는 얼른 감정을 진정시킨 다음에 차근차근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습니다.

 

장군, 제가 그린 군인들은 옛 역사속의 영웅들이 이상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젊은 장군은 빙긋이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다비드로서는 그 장군이 더 이상 불쾌한 말을 하거나 찌푸리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장차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황제와 그의 최고의 궁정 화가로 - 국가와 영웅을 위한 최고의 이미지를 남길 다비드와 나폴레옹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로 나폴레옹이라는 한 군사 모험가의 모습을 아로새긴 다비드. 이제 둘은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5년의 워털루 전역까지 끊임없이 서로를 격려하며 다시금 쉴새 없이 앞으로 내달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 열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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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éonidas aux thermopyles(1800-1814), détail, Jacques-Louis David, Paris, Musée du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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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이의 레오니다스, 자크 루이 다비드, 1814년, 캔버스에 유채, 395/531, 루브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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