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아예 볼 생각이 없었어요.


스토리는 시놉시스를 듣는 순간부터 참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또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크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어서요.

얼마나 볼 생각이 없었냐면 개봉 얼마 후에 걍 아무 생각 없이 스포일러 글을 클릭해서 훑어 볼 정도였지요. 제가 어지간하면 안 그러거든요. ㅋㅋㅋ

그런데 얼마 전 가입한 iptv 월정액 서비스에 무료로 들어 있길래 걍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보기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뭐 이런 게 중요한 건 아니겠고.



일단 스토리 측면에선 많이 당황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겁니까. ㅋㅋㅋㅋㅋ

뭐랄까요. 이야기 전체의 설득력을 제로로 만들어 버릴 만한 큰 결함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트릭 몇 가지로 대충 샥샥 덮어 버린 후에 시치미를 떼면서 관객들에게 그냥 눈 감고 넘어가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잖아요.

'3년의 시간차'라는 것은 그냥 단순한 반전 도구가 아니라 후반 이야기 전체의 바탕이 되고 인물들 감정선을 좌우하는, 정말 치명적일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도대체 상대방의 핸드폰 다이어리로 일기 쓰면서 생활하는 녀석, 학교도 다니고 알바도 다니면서 사회 생활 다 하고 다니는 녀석이 연도의 차이를 눈치 채지 못 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ㅋㅋ

감수성이 메말랐다거나 야박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어요. 위에서도 말 했듯이 이건 정말 크리티컬한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여기서 개연성이 제로가 되어 버린 후에도 감동을 받으신 분들이 대단한 거지 짜게 식어 버린 제가 이상한 사람은 아닌 거라고 매우 진지하게 주장합니다. ㅋㅋ


게다가 전반부를 다시 곱씹어 보면 이런 삑사리를 덮기 위해 이런저런 잔머리를 굴린 흔적들이 역력해서 더욱 괘씸합니다.

예를 들어 미츠하와 친구들을 보면 전반부 내내 아무도 핸드폰을 쓰지 않습니다. 미츠하네 동네 전체에 아예 핸드폰이란 물건이 보이지가 않아요. 전반부가 마무리 되고 드디어 타키가 미츠하에게 전화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서야 간신히 등장하죠. 아마도 몸이 바뀐 애들이 '서로에게 전화해 본다'라는 너무나도 당연하면서 너무나도 꼭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관객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겠죠. 덕택에 미츠하의 순수한(?) 시골 소녀 이미지가 강화되기도 하고.

또 타키든 미츠하든 서로를 찾아갈 생각도 안 하죠. 애초에 전화도 안 하고 각자 생활 즐기느라 정신 없는 놈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습니다만(...) 전 하다 못 해 두 동네가 아주아주 멀다는 핑계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면 미츠하가 타키 만나러 가던 날, 집에서 아침 먹고 나와 도쿄로 올라가서 몇 시간 이상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와도 해질녘이에요. ㅋㅋㅋ ...아니 정말;;


암튼 이 부분이 못내 거슬려서 감정 이입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는 이야기구요.


이렇게 큰 부분에서 삑사리가 나 버리니 이후에도 계속 자잘한, 원래는 대충 넘어가 줄만한 장면들에도 일일이 태클 거는 마음이 샘솟게 되더라구요.

도대체 미츠하 저 녀석은 타키 사는 집, 다니는 학교, 알바 장소 다 알고 있으면서 왜 타키를 보러 간 도쿄에서 다리 아프도록 길바닥과 전철역만 헤매고 있는가.

잠시 후 마을 사람들은 물론 본인도 소멸해 버릴 상황에서 저 녀석은 왜 편리한 핸드폰이란 물건을 냅두고 다리 아프게 뛰어만 다니는가.

도대체 저 '기억이 사라진다'는 설정은 왜 이리 편리하게 낭만적인 상황에서만, 낭만적인 방향으로만 발동하는가.

둘이 인연인 건 알겠는데 도대체 아무런 관련도 없던 둘을 굳이 3년 시간차를 두고 인연으로 맺어주는 건 어떤 쓸 데 없이 디테일하고 심술궂은 신의 농간인가.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는데 저 산이랑 저 산을 맨다리로 넘어간 후 친구 만나 수다 떨고 돌아와도 혜성 낙하 전이라니 미츠하는 초인이구나...

그리고 결국 과거를 바꿔 버리고 지난 3년간 '세계'가 변해 버렸는데 그로인한 여파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등등등. ㅋ


보는 내내 이런 생각만 하고 있으니 뭐 영화를 재밌게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만.



...사실은 그럭저럭 재밌게 봤습니다. ㅋㅋㅋㅋㅋ



일단 감독이 모든 개연성을 내던져 버려가면서라도 꼭 이런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 고 외치는 듯한 아름다운 장면들. 그리고 거기 깔리는 듣기 좋은 음악. 이 둘이 만나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가 상당해서 시종일관 빈틈 발견하며 피식피식 비웃는 냉담 관객의 마음까지도 어느 정도 움직이는데 성공하더라구요.

보니깐 사람들은 '예고편에서 아름답게 보이던 혜성이 대참사를 일으키는 원흉이라는 아이러니!!! 대반전!!!!!' 이러면서 감탄하던데. 글쎄요. 제 생각에 감독은 걍 '저 혜성이 참사의 원흉이긴 하지만 아주 예쁘게 그릴 수 있는 소재이니 난 그냥 예쁘게 그릴 거야' 이외의 큰 뜻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정말로 충분히 예쁘게 그려졌기 때문에 불만은 없네요. 집에서 조그만 티비로 봐도 그렇게 멋졌는데 아마 극장에서 봤다면 훨씬 크게 설득이 되었겠죠.


제가 가장 맘에 들었던 음악은 영화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면에 아주 길게 흘러 나오던 이 곡이었구요.



그리고 뭐랄까...

일본의 아니메, 망가 창작자들은 현실에 존재할 리 없는 완벽 깔끔하게 표백된 십대 청소년 캐릭터들을 도구로 삼아 성인들에게 근본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이나 애틋함 같은 정서를 뽑아내는 데 도가 튼 괴상한 사람들입니다. ㅋㅋㅋ 도대체 쟤랑 쟤가 왜 운명의 상대여야 하는지 이유는 1도 모르겠고 쟤네가 왜 갑자기 서로 사랑하는지, 서로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지도 전혀 모르겠고 당연히 살면서 쟤들과 1mg이라도 비슷한 경험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그냥 억울할 정도로 아무 이유 없이 납득되고 응원하게 되는 그런 게 있어요. 물론 잘 만들어진 작품들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만. 매번 나태하면서도 번번히 제 감수성 버튼을 눌러대는 아다치 미츠루 같은 양반도 있고. 이번에는 신카이 마코토도 어느 정도 성공했네요.


마지막으로, 정작 작품 속에서는 이야기의 스케일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 전혀 깊이나 비중을 두고 묘사되지 않는다는 느낌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대참사를 본인들 목숨 걸고 온 몸을 내던지며 막아내는 어린애들 이야기잖아요. 세월호 같은 일을 겪고 난 후에 이런 이야기에 깔끔하게 철벽치고 냉담하게 바라보기는 쉽지 않더군요. 흠;;



이제 대충 한 줄로 정리해 보자면.

머리로는 '이건 정말 멍텅구리 같은 이야기로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카이 마코토의 감수성 대폭발 무한 러시에 살짝 빈틈을 찔려서 왠지 분한 기분입니다. 라는 소감입니다. ㅋㅋ




+ 사족.

타키 이 놈은 왜 끝까지 반말입니까? 보니깐 미츠하와 알바 선배가 거의 동갑 정도 되는 것 같던데요. ㅋㅋ 연상 킬러

그리고 참으로 좋은 그림으로 끝이 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근데 뭐 저러고 몇 달 사귀다 헤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라는 생각을 하며 피식거렸다는 고백을 소심하게 덧붙여 봅니다.


++ 그리고 한 마디 더. ㅋㅋㅋ

뒷부분의 서술 때문에 글 전체가 호평 비스무리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는데.

사실 이게 그리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봐 주기엔 앞 부분에서 이야기했던 서술상의 결함이 너무 커요. 전반적으로 얄팍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안 봤다길래 같이 한 번 더 봤는데 처음 볼 때보다 감흥이 많이 떨어지더군요.

걍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비슷한 정도의 작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둘이 비슷한 점도 많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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