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만화의 연재)

2017.08.11 17:19

여은성 조회 수:1175


 1.오래 전에 돈을 안 받고 연재하던 만화가 있는데 더이상은 그리지 않아요. 귀찮아서이기도 하고 두번째 이유는 이제 어려운 부분으로 가기 때문이예요. 다음 챕터에서 갑자기 우주 전쟁이 시작되거든요. 우주 전쟁의 스토리는 취미삼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을 확실히 넘어가 버리니까요.



 2.지금까지는 도시의 작은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소년...길거리 바이올리니스트...소년가장 소매치기...뭐 이런 놈들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실용화된 양자 기술들과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한 외계 군단이 쳐들어온단 말이죠. 주인공이 사는 곳은 중세 시대 정도의 과학기술이라서 지금까지 본 사람들은 매우 어이없어 하겠지만 그게 스토리라서 어쩔 수 없어요. 빌어먹을 우주 전쟁이 시작되는 게 원래 스토리라서요. 


 원래는 구상만 해 뒀는데 막상 그 부분이 다가오니 그리기 어렵단 말이죠. 일단 정찰병으로 300명 정도의 병력이 쳐들어오는데 우주선이나 드론의 화력은 제외하고 병사 한 명 한 명이 지구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거든요. 그야 이건 시나리오 전개상으론 밸런스 붕괴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우주에서 침공해올 정도의 기술력이면 정찰병 한 명 한 명이 지구를 쓸어버릴 만한 파워는 가지고 있어야 현실적이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설정했어요. 



 3.나이가 드니 구상해둔 뼈대에 살을 붙일 때 어쩔 수 없이 상식이나 개연성을 너무 따지게 돼요. 이건 좋은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는 나빠요. 거기서 거기인 것들만 나오거든요. 원래 구상에서는 외계 군단의 병사에게 그 정도 화력은 없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쓸데없는 부분에서 납득이 안 되면 진행을 시킬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옛날엔 신경쓰지 않았던 것들...외계 군단의 목적이나 생태, 그들의 이동 수단, 서로간의 연락 수단, 대기권 안으로 직접 강하하는지 우주에 모선을 띄워놓고 병력만 단독으로 강하하는 식으로 침공하는지도 생각해 보곤 해요. 물자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탄약이나 재료가 필요하면 만능 프린터로 그때그때 찍어서 뽑아낸다는 설정으로 바꿨어요. 생산 속도를 올려야 하면 만능 프린터로 만능 프린터를 하나 더 만들어내서 생산 속도를 2배로 올리고요. 


 사실 어렸을 때 이걸 만들었을 때는 외계 군단은 그냥 써먹기 위한 장치였어요. 하지만 나이가 드니 업계의 전반적인 수준과 밀도가 다 올라가 버렸어요. 요즘 세상은 '그냥 써먹기 위한' 외계 군단을 내밀면 안 되는 세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 만화를 더 그릴 날은 아마 안 오겠지만 시간이 지나서 설정이 뒤떨어졌다 싶은 시기가 되면 그때그때의 시대상에 맞게 설정을 보강해두고 있어요. 그냥 심심해서요. 



 4.휴.



 5.물론 이건 제대로 만들 수 없어요. 누가 와도 제대로 못 만들 걸요. 개인적으로 창작물에서 표현하기 힘든 것을 2개 꼽아요.


 첫번째는, 원래라면 떡밥으로만 나오고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는 맥거핀 급 설정들이죠. 영화나 1~2시즌으로 끝나는 드라마에서는 분위기만 풍기고 안 나오는 것들 말이죠. 신이나 외계인 같은 초월적인 놈들이요.


 그야 이건 이유가 있어요. 이런 건 어떻게 만들어도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없거든요. 모든 사람이 작가이고 평론가인 세상이잖아요. 신이나 외계인을 고생고생해서 만들어놔 봤자 '와하하, 겨우 저거였어?' '나라면 저것보다는 잘 만들 수 있겠는데.'같은 소리나 듣겠죠. 그러니까 프로 작가들이나 감독들은 그런 건 직구가 아닌 변화구로만 써먹는 게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죠. 


 그러나...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계속 그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신이나 외계인이 이 이야기의 세계에 진짜로 등장하는 날이 오긴 오는거예요. 작가는 그 날을 연기할 수는 있지만 오지 않도록 만들 수는 없는 거죠. 그 날이 오면 신이나 외계인이 독자들에게 익숙한, 현실적인 캐릭터들과 대화나 싸움을 하는 장면을 만들어 내야만 해요. 그럴듯하게요.



 6.두번째로 어려운 건 여러 세력 간의 '진짜 같아 보이는'전쟁이예요. 세금을 거둬서 병사를 양성하고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는 현실적인 전쟁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초능력자가 동시에 전투를 벌이는 전쟁 말이죠. 수십 수백 명의 초능력자가 동시에 싸우는 스토리에서는 작가가 아무리 유기적으로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든 인터넷은 허점을 찾아내죠. 인터넷은 그런 부분에선 특화된 집단지성이니까요.


 재능 있는 작가라면 한정된 공간의 한정된 상황 안에서 합리적으로 보이는 전쟁의 기승전결을 만들어낼 수 있겠죠. 하지만 원피스도, 나루토도 막상 1대1 구도를 벗어난 능력자들간의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자 독자들에게 공격받았듯이...이건 매우 힘든 일이예요. 온갖 브레인이 달려들어서 전개를 디자인했을 그런 만화들도 실패한 일이니까요.



 7.며칠 전 간만에 예전 만화를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과 만나서 치킨을 먹었어요. 그 사람이 왜 만화를 더이상 안 그리는지 궁금해하는 말을 들어보니 과연 그럴 만 하겠다 싶어서 일기를 써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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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역량의 문제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인생을 누리느라 바빠요. 정확히 말하면, 젊음을 누리는 거죠. 나같이 얄팍한 인간이 젊거나 어린 시절 말고도 인생을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언젠가 젊음이 끝나면 그리게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만화를 가장 재미있게 그릴 수 있는 시기는 바로 지금이기는 해요. 젊음이 끝나면 모든 능력치가 떨어져 버릴 테니 그때 가서 그려봐야 재미 없겠죠.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런 면에서 보면 다행이예요. 내가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게요. 내가 대단한 작가였다면 놀면서도 계속 어깨가 무거울 것 같거든요. 이 우주에 내가 만들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건 정말 어깨가 무거운 일이니까요. 술을 마실 때도 베게싸움을 할 때도 그 생각이 늘 나를 편치 못하게 할 거예요. '이봐!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야! 전성기의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책상 앞뿐이잖아!'라는 생각...죄책감이 들겠죠. 


 휴.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대단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도 불금을 즐기러 나갈 수 있죠!!! 천재로 태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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