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이유

2021.03.09 09:35

Sonny 조회 수:515

20bpm2-jumbo.jpg




짤은 제가 오랫동안 기억할 영화 <120 bpm>의 한장면입니다.


제가 퀴어의 존재를 처음 인식했던 것은 어떤 커뮤니티에서의 격렬한 키배 현장에서였습니다. 돌이켜보면 10년도 더 된 그 키배는 성소수자, 특히 동성애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지금 기준으로 매우 해묵은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싫으니까 싫다고 하는데 왜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도 하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 게시판의 화두였고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싫은 걸 싫다고 하는 게 차별이라고 할 순 없지 않느냐는 여론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어떤 분들이 그런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을 두고 싫다는 표현을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건 그냥 인간적인 예의에서 틀린 말이라고요. 논리적으로도 빈틈이 없는데다가 누군가를 저렇게 화나게 하는 말이라면 하지 말아야겠다는 걸 그 때 배웠습니다. 지금은 당연한 상식이지만 그 때는 그랬습니다. 이제 그러면 안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아직도 나아갈 길은 먼 것 같습니다.


그 때 그 글과 그렇게 화를 내는 사람을 제가 보지 못했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제 기준이 어찌 되었을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화를 냈던 그 분이 폼을 잡을려고 그랬다거나 뭔가를 전시하려고 그랬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습니다. 이 후에도 그 분은 퀴어퍼레이드나 퀴어에 대한 글을 간혹 썼고 그 때마다 또 화를 내곤 했습니다. 아마 이건 제가 유난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분의 글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나마 덜 틀릴 수 있었고 무례를 줄이면서 이해를 배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퀴퍼를 가보기도 전에 해마다 일어나는 퀴퍼에 대한 글을 썼고, 그 때마다 또 댓글창이 불타올랐고, 글을 몇번 쓰다가 퀴퍼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퀴퍼에 정말 가보기로 한 것도 어찌보면 맨날 이렇게 퀴어가 어쩌고 퀴퍼가 어쩌면서 키배만 하기도 우스우니 한번 가보자는 것이었지 아주 큰 사명은 없었습니다. 호기심과 약간의 부채의식? 같은 게 있어서 갈 수 있었죠.


저는 그 분의 글을 보면서 현실을 깨달았고, 제가 뭔가를 쓰면서 현실에 맞닥트렸으며, 제가 현장에 참여하고나서 제가 몰랐던 현실을 다시 썼습니다. 그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습니다. 말과 글은 그 자체로 행동이며 어떤 행동의 초기단계에든 사후단계에든 말과 글이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언어없이 곧바로 행동이 있을 수 없고 행동이 행동으로만 연결되지 않습니다. 언어는 사고를 결정짓는 원인이고 언어 자체가 행동으로 사회를 이루고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리고 인터넷은 현실의 또 다른 배경입니다. 누군가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인터넷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수자를 둘러싼 논쟁에 위선자 혹은 피장파장의 방관자라는 프레임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제가 그 인터넷에서 누군가의 말을 보고 계기를 얻었으니까요. 저는 맞는 말의 발화자가 어떤 행위 다음에서야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순도 높은 정의와 선의를 추려내기에 세상은 이미 무관심과 혐오가 팽배해있습니다. 말뿐이라도 누군가의 차별에 저항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언어의 형태만으로도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소수자가 느낄 불편을 최소화하고 외면받는 느낌은 들지 않게 하려면 그 "일반적인" 편견에 맞선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위로와 연민이 아니라 차별적인 언행을 아예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강력한 억제력일테니까요. 그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연대는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그 불편함이야말로 자신의 부작위에 찔려하는 양심일 수도 있고 책임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곳 듀나게시판에 계속 이런 글을 쓸 생각입니다. 제가 이런 글을 써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선의의 독자들과 잠재적 참여자들이 아주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혼자만의 언어였던 퀴어를 처음으로 함께 실천했던 공간이 듀나게시판이기도 합니다. 저는 퀴퍼 번개(?)를 여기 듀나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할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단지 정치적인 언어를 어떻게 일상속으로 침투시킬 것인지를 고민하지 정치적인 글을 위선자 프레임을 걱정하며 주춤거리고 싶진 않습니다. 한분이라도 더 추모와 축제와 연대에 눈을 돌리게 한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셈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저보다 더 분노하는데 그 분노를 표현하기 애매한 분들을 오지랖으로 대신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2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8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70
125622 [넷플릭스] 재밌을 것 같지 않았는데 재밌게 봤습니다. '젠틀맨' [2] S.S.S. 2024.03.02 335
125621 [슬기로운 작가 생활] [4] thoma 2024.03.01 266
125620 [왓챠바낭] 재밌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재밌게 봤습니다. '퍼펙트 겟어웨이' 잡담 [9] 로이배티 2024.03.01 288
125619 갠적인 궁금증 [3] 라인하르트012 2024.03.01 200
125618 디즈니 노래 catgotmy 2024.03.01 74
125617 프레임드 #721 [4] Lunagazer 2024.03.01 55
125616 사운드 오브 뮤직 액션 버전 예고편 [2] 돌도끼 2024.03.01 150
125615 '棺속의 드라큐라' [4] 돌도끼 2024.03.01 164
125614 사건 후에 마주친 정보가 사건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적절한 예시는 무엇일까요? [4] 산호초2010 2024.03.01 196
125613 조성용의 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예상 [2] 조성용 2024.03.01 342
125612 지나가다 의미불명 펀딩 이야기 하나 좀… [1] DAIN 2024.03.01 171
125611 신나는 노래가 있네요 catgotmy 2024.02.29 117
125610 프레임드 #720 [4] Lunagazer 2024.02.29 80
125609 파묘를 봤어요...(벌써 손익분기점을 넘었네요) [2] 왜냐하면 2024.02.29 692
125608 Psg 내부자?가 푼 썰/여름 이적 시장 계획 daviddain 2024.02.29 120
125607 7호선에서 난리 부리는 할머니를 본 썰 [5] Sonny 2024.02.29 652
125606 영화 러브레터 이야기 catgotmy 2024.02.29 202
12560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1] 조성용 2024.02.29 473
125604 로얄로더 1,2화를 보고 라인하르트012 2024.02.29 247
125603 프레임드 #719 [6] Lunagazer 2024.02.28 8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