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많은 분들이 다양한 리뷰들을 너무 잘 써주셨으니 영화의 내용과 전개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있을 거에요

영화 주인공들의 이민 시기와 사유, 한국에서 전적이 명확치 않다는 의견들이 많지만 저는 이 영화를 딱, 영화가 시작하는 그 첫 장면의 시점부터 얘기하고 싶어요

이 부분이 아마 제가 다른 분들과 이 영화를 대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저에게는 어떤 영화든 스포가 중요하지 않고 이 영화 역시 스포에 민감한 스릴러물은 아니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극적인 장면이나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다는 것이 저는 가장 맘에 드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매 순간의 장면들이 허투루 지나가는 법 없이 저마다의 역할들을 해내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

어요언제부턴가 너무 세련되고 영리한 연출과(제겐 그 대표적인 영화가 기생충) 또는 모든 가치관에 공정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머리를 쥐어 짜낸 영화들에 대해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었던 저에게는 이 영화가 무슨 상을 받고 평론가들 리뷰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건 애초에 영화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조건들이 아니었

습니다.


자칫 아메리칸 드림, 남자의 꿈과 쓸모, 아버지의 체신머리, 아내와 엄마의 희생과 양보, 기복과 자기구원으로서의 불가해한 종교행위들, 하지만 광신으로 치닫지 

못하는 무력한 신앙심, 철없는 동심 가운데 한국적 할머니 정서와의 부조화무자비한 현실 앞에서 붕괴 위험에 놓인 가족이 그럼에 다시 끌어안고 희망을 꿈꾼다는 

내러티브가 전부인 것 같은 이 영화는 사실 아무 겉멋이 없는 그 내러티브 자체로 이미 무리수를 두지 않고 영화가 흘러가게끔 놔둡니다.


무턱대고 자신만의 농장을 꿈꾸는 제이콥의 가부장적 이기심은 가족 모두를 토네이도 앞의 티끌처럼 미약한 컨테이너로 끌고 들어오는 철없음이 다분하지만 아내와의 

아귀다툼에서도 그 흔한 손찌검이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는 것(저는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이 부분이 가장 비현실적이라 생각했어요), 그 당시 아내상으로는 결코 흔

치 않았을 야무진 항변가인 모니카도 결국은 상황을 그대로 감수하며 또 다른 가장으로서 자신의 몫까지 묵묵히 해낸다는 것그리고 수구초심을 역행하여 다늦게 미국

으로 건너온 순자 여사도 딸이 처한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 비관하며 사위를 무시하고 경멸할 법 한데 그 가운데서 자신이 살아갈 방법을 알아서 찾아간다는 것.


영어와 국어를 번갈아 쓰듯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로 국적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을 테지만 엄마를 돕는 사춘기 들어선 큰딸, 아픈 심장을 달고 사고뭉치에 심하게 

개구진 만큼  대한 의욕과 열망도 넘치는 어린 아들. 그 누구 하나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부담을 주며 기생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는 점이 저는 이때껏 봐 왔던 어느 가족영화보다 훨씬 더 독립적이고 그래서 사실 이 부분이 교포인 감독이 가진 전형적인 한국식 정서와는 조금 다른 결이고, 따라서 영화

가 가진 가장 큰 매력과 힘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봐 왔던 일방적인 희생과 착취 관계에서 어느 순간 곪아터지듯 웅변하는 지점도 분명히 있지만, 결국 수용하게 되는 결심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어도(개인

적 감상으로는 부부간의 격렬한 이전투구 후에 물베기 같은 과정이 있었음을 감지하는 온도와 분위기는 있었지만), 그게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여자의 순종보다는 모니카

가 진 캐릭터가 할 말은 하고 할 거는 한다는, 맞고품음에 최적화가 빛나던 순간 아닐까 합니다. 네네, 그러니 지금 상황엔 너무 이질적이고 도대체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왜 도망치지 못하고 저렇게 사는가! 하는 리뷰도 제법 보이겠죠. 그럼에도 저는 영화 내내 모니카 그리고 한예리 배우 전반에 흐르던 감당과 수용이 일방적 오래참음으로 

인한 체념적 억울함보다 천성적으로 껴안는 캐릭터에 기인한 것 같아 불편하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모든 사안에 부당하다고 핏대를 올려도, 누군가는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포용하니까요. 그리고 끝까지 문제를 해결하고 방향을 찾아가는 구심점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말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도 결국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걸 알죠. 왜냐, 

온갖 잘난 척 해도 저 또한 그런 캐릭터나 그릇이 못되니까요. 


또한 제이콥 역시 가족과 함께 이제라도 잘 살아보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의 미련함일 뿐, 여타의 한국식 가장들처럼 어디서 오입질을 하거나 내를 때리거나 욕하거나 

하지 않고(미국 이민 안 가도 한국 땅에서 사업하고 방구 깨나 낀다는 남자분들 치고 가정생활 평탄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해서요. 반대 급부로 자녀교육을 위해 남편의 

희생을 담보하고 외으로 떠났다가 가족붕괴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고요-_-)동반자로서 의지하고 신뢰하니 모니카도 그나마 지속가능한 캐릭터였을 거에요. 그러므로 

후반부의 화제씬의 절박이 그들의 결속을 더 다져줬겠죠. 이건 정말 애증을 뛰어넘는 믿음에 관한 확신이겠죠! 상황이 어떠하든 굳이 내가 양보하고 인내하면서까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면식도 없는 SNS나 사방팔방에서 종용 당하는 요즘 세상에서 더더욱.     


누가 누구랄 것 없이 모두의 연기가 대단히 훌륭하고 빼어났지만 가장 원더풀한 것은 역시 배우 윤여정님의 연기입니다! 저는 이 분의 연기를 워낙 어린 시절부터 봤었던 

세대이고 지난한 개인사도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입장에서 어렸던 제 눈엔 결코 미인이랄 수 없었던 윤여정님의 연기를 영화와 티브이 드라마로 보고 자랐기에, 이 배우에 

대한 무수한 인상들은 요즘 젊은 기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 중 하나가, 어렸을 때 미용실에서 무심코 집어 들었던 여성동아 같은 잡지에서 읽은 인터뷰 글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녀의 자택을 방문해서 진행한 인터뷰였을 거에

. 제 기억에 인터뷰한 계절이 여름이었는데 그 댁 거실 소파에 씌워 놓은 린넨 커버가 그렇게 깨끗하고 빳빳하고 정갈할 수 있나 하는 기자의 칭찬에, 직접 손으로 빨고 다

다고 대답했어요집안의 살림을 그렇게 직접 한다고 했던 아드님의 첨언이 있었던 기억이 나요(이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라는 듯한 뉘앙스). 여러가지 개인사를 겪

고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힘들게살았던 게 버릇이 됐다는 배우님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어렸던 제게도 린넨 커버를 직접 빨고 다리는 습관을 가진 이 사람은 참 지독

하고 성실하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일가를 이루고 이렇게 늦게까지 빛을 보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꾸준하고 열심히 제 할 일을 해야하나 싶고, 자칫 이 배우가 주는 무게감이 너무 커서 저는 혹시라도 

이 영화에 너무 강한 식초나 참기름 역할이 되는 것을 우려했지만 이 노련하고 영리하고 감각적인 배우는 더도 덜도 않게 딱 제 역할과 무게 만을 더하며 자칫 진부한 신파

로 흐를 수 있는 여지를 원천봉쇄해 버립니다.   


대단히 눈물겨운 화해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결론이 이게 뭐야? 라는 일부의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건 우리는 꼭 뭔가가 어떻게든 해결이 되고 뭐든

지 더 나아져야만 안심이 되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아들의 심장은 좋아졌지만 치매와 뇌졸중까지 얻은 친정엄마까지 군식구로 등가교환한 이 냉정한 

현실 앞에서 이제 다시 우물을 파본들 뭐가 나아지겠는가? 우물은 커녕 수맥이라도 과연 찾아지기는 하는 건가


하지만 여기저기 맨땅에 우물 파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는 이미 알고 있을 거에요이렇게라도 살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 지금 나에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한가누가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할 거에요. 그렇다면 불행한가그 또한 아니라고 할 것이구요.                            


타인들 앞에서 체면과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명분과 논리와 객관성을 확보하고 살아가는 것, 제 현생의 생업과 생활에서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쳐서 기빨리고 질립니다

모두 하나같이 다 잘났고, 살아가면서 부득불 생기는 불합리는 1도 참지 않으며, 손해는 절대 보고싶지 않은 요즘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들이대면 모순투성이인 영화가,

그래서 저는 더욱 귀하고 아름답다 느꼈어요.


#사족 :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고 재미있었던 몇 가지 추가해서 써봐요.

1.첫장면 운전씬에서 핸들을 잡은 한예리의 손가락이 나오는데, 미국 이민가서 고생하며 병아리 감별사를 하는 여자의 손 치고는 네일관리 너무 잘 받은 손톱이라  관리가 

너무 잘 돼 있어서, 유일한 옥의티라고 느꼈어요. 

2.앤의 사춘기가 느껴지는 얼굴과 몸이, 전혀 롤리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그 또래 여자애들 특유의 새침함을 잃지 않으며 보기 편했던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3.또래의 교회 친구도 얘기하지만 데이빗의 얼굴은 요즘엔 정말 흔치 않은 그 당시 사내아이들의 전형적인 얼굴이었어요. 

저는 어떻게 저런 얼굴을 찾아 캐스팅 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4.또한 대다수 이민자의 얼굴 그리고 제 외국생활 경험상 다국적 페이스로 변한 배우를 어쩌면 그렇게 잘 섭외했는지, 감별사 동료님 특히 그 갈매기 눈썹요!

5.그래서 그동안 내가 먹은 치킨은 다 암탉이었단 말인가? 때로 잇몸새로 느껴지던 질김은 수탉이었단 말인가!

6.그 나이에 남자팬티(트렁크)마저 그렇게 이격감 없이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오직 윤여정 배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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