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들

2018.03.06 20:38

은밀한 생 조회 수:819

최근에 벌어지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떠오르는 기억들이 아닙니다.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맘대로 나타나는 기억이죠.

처음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온실 할아버지입니다.
정년퇴임한 교장 출신인데 얼굴이 길쭉하고 시커먼 흑빛의 피부에 검버섯이 많았고 머리가 벗어진 늙은이였죠. 입술이 유난히 탱글탱글하고 두툼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얼굴이 전부 주름졌었는데, 이상하게 입술만은 꼭 소세지 같았어요. 우리 초등학교에서는 학교에 새로 입학한 1학년 2학년 아이들이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온실에 들러서 물주기라든가 화분 옮기기 같은 걸 돕도록 돼 있었는데, 웃긴 게. 여자애들만 갔어요. 이건 누가 정한 건지 참 어이가 없어놔서요.... 여튼 초등학교 2학년이던 제가 그 온실의 숨 막히고 뜨거운 공기 아래 텁텁한 노인네 냄새를 맡으며 물을 주고 있는데 갑자기 제 몸이 붕 들어올려졌습니다. 네 그 늙은이가 절 안아올린 거죠. 그러더니 순식간에 그 축축한 혀를 들이밀어 쑤셔 넣었습니다. 마구.

이후에 3학년 때인가 우리반 친한 아이들끼리 모여서 뭔가 비밀 얘기 같은 걸 털어놓는 분위기가 생긴 적이 있었는데. 그 온실 늙은이에 대한 얘기가 나왔죠.
“헉 너도야?”
“응 나도 ㅠ ㅠ”
“야 나돈데....”
“난 안 당했는데... 너네는 이뻐서 그랬나 보다” (이 말을 한 여자애도 그냥 평범한 애에요. 2차 가해 같은 거 생각하고 말할만한 못된 애도 아니었죠...)

두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시험을 보면, 절대 두리번대지 못하잖아요. 부정행위로 오해를 살까 봐...
시험지를 보며 열심히 문제를 풀던 제 등속으로 차갑고 따가운 손이 쑥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순식간에 등을 휘젓고 앞쪽 가슴도 잽싸게 훑어내리더군요. 당시 체육 교사이던 인간이었습니다. 그 뒤로 시험 시간만 되면 그 인간이 감독으로 들어올까 봐 긴장하고 그 인간이 들어오면 입은 옷을 모조리 앞쪽으로 끌어당겨서 손 넣을 공간이 없도록 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나요. 그 인간 얼굴과 손에서 나던 담배 찌든내까지 모두 생생히 기억납니다. 최근 혹시나 해서 구글링을 해보았더니. 무려 교장이 됐더군요. 40년 교직 생활 어쩌고 하는 인터뷰와 함께.... 그 느물거리는 미소와 그 음흉한 눈빛 그대로.

이 두 가지 경험 이외에 직접적인 성추행을 당한 적이 없기는 해요. 다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자기 누나가 생리하던 생리대 (피 묻은) 를 가지고 와서 교실 안에서 던지고 놀던 두녀석들. 교실 문안에 숨어 복도를 노리다가 다가오는 여자애 아무나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남자애. “난 솔직히 때리다 보면 이상하게 흥분돼”라고 당당히 말하던 국어선생. (항상 열 받으면 시계부터 풀고 여고생을 아주 개 패듯이 팸) “걔랑 놀지마. 걔 강간당한 애야” 라고 친히 알려주던 일본어 여선생. “아 그냥 은밀이랑 밀한(다른 입사동기)이나 데리고 놀 걸. 어제 간 룸 진짜 수질 더럽더라” 하던 유부남 차장. 같이 일하던 디자이너한테 비비탄 쏘던 팀장.

흠. 적다가 머리가 아파졌어요. 타이레놀부터 일단 두알 털어넣어야겠네요.

다들 많이 동의하시겠지만 미투 운동하시는 분들이 절대 기죽지 말고 이참에 전부 다 튀어나와서 이 나라에 만연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이 남자의 ‘권력’이 아니라. 진심 개찌질한 패가망신 짓거리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를 가슴 깊이 소망합니다.

저의 이 정도 경험치를 가지고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화가 나고, 식물원을 보면 그때 기억이 고스란히 나고. (심지어 비닐하우스만 봐도 떠올라요) 그러는데..... 더 큰 아픔을 겪으신 분들의 고통은 상상도 못하겠고요. 감히 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너무너무 가엾고 슬퍼요.

부디 그분들이 이대로 쓰러지지 않기를 응원합니다...

미투 운동 관련 기사가 나오면, 사람들이 “아 또야? 그만 좀 해라 미투” 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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