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영어수업1)

2017.09.18 13:35

여은성 조회 수:860


 1.어렸을 적에는 미군부대 과외가 유행이었어요. 한국에 주둔하러 온 미국인들에게 영어과외를 받는 거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게 유행이었을까?'하고 궁금해요. 왜냐면 일정 수준 이하의 상태에서 맨땅으로 외국인에게 영어를 배우는 건 비효율적이고, 누군가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본 경험이 아마도 없을 사람들...직업군인이나 직업군인의 아내에게 영어를 배우는 것 역시 비효율적이니까요.


 미군부대는 한국 안에 있는 작은 미국이었어요. 그야 미국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구획이나 건물, 꾸밈새 자체가 '여긴 미국이구나.'라는 느낌이 들게 했어요.  그리고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은 미국인에게 직접 영어를 배운다는 점 말고도 다른 나라에 방문한다는 이색적인 체험을 돈을 주고 샀던 것 같아요. 거리의 전경이나 구획...식당의 모습마저도 확실히 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은 들었으니까요.



 2.어쨌든 당시 다니던 학교의 학부모들은 치맛바람이 셋고, 어머니도 그들 중 하나였어요. 나도 영어과외를 하러 갔죠. 그리고 그건 매우 비효율적이었어요. 나의 영어 실력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수준이어서 외국인과 마주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프리토킹을 해봤자 외국인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yes'라고 해야 할 것 같으면 yes. 'no'라고 해야 할 것 같으면 no라고 대답하고 멀뚱히 있는 게 전부였어요. 전혀 free하지 않았어요. 그 시간을 버티는 게 너무 어색하고 힘들었죠.


 선생은 계속 바뀌었어요. 이 가정집을 갔다가 저 가정집을 갔다가...뭐 그랬죠. 누군가에게 소개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을 전전해도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어요.


 어느날 또 새로운 군인을 만났어요. 대개의 경우 남자가 주둔군이고 같이 온 아내가 돈벌이 삼아 영어를 가르치는 구조였는데 이 부부는 번갈아 가며 봤어요. 당시까지도 나의 영어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어요. 그때 쯤 나의 별명은 '예스맨'이 되어 있었어요. 미국인이 뭘 물어보든 'yes'라는 대답만 했으니까요. 어느날 여자 쪽이 'kslafklajsfkas?'뭐 이렇게 물어 왔어요. 물론 알아듣지는 못했는데...별명이 예스맨이 되어버린 상태라 그냥 no라고 대답해야겠다 싶어서 no라고 했어요. 왜인진 모르겠지만,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어요. 마침 옆에계시던 어머니가 말했어요.


 '저 여자는 '나 오늘 예쁘지 않냐.'라고 물어봤어.'  



 3.그래요...뭐 나의 영어실력은 전혀 늘지 않고 있었어요. 그야 그때까지 만난 미국인들은 전문 교사도 뭐도 아니었으니까요. 군인이거나 군인의 아내였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들에게도 돈이 필요했죠. 영어과외비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쏠쏠한 벌이였고요. 그래서인지 새로 만난 미군 부부는 자신들이 맡은 꼬마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 아예 그냥 시간을 때우기로 결정한 것 같았어요. 우리를 미군부대 안에 있는 피자집에 데려가거나 농구장에 데려가거나 했어요. 


 문제는 우리를 피자집에 데려가거나 농구장에 데려다 놓은 뒤 한동안 사라지곤 했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들은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가버렸고, 알고 보니 그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같은 시간에 다른 한국인들 과외-그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도 진행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피자집이나 농구장에 데려다 놓고 그들을 보러 갔다가 이쪽에 왔다가 하며 돈을 두배로 번 거죠. 당연히 어머니들은 이걸 알고 매우 빡쳐했고요.



 4.휴.



 5.사실 이쯤 되면 미군 영어과외를 포기할 만도 할 텐데 어머니는 새로운 녀석을 찾아야겠다고 했어요. 소개로 받는 게 아니라 직접 알아보겠다고요.


 한데...이건 힘든 일이었어요. 왜냐면 위에 쓴 대로 그곳은 작은 미국이라 영내 동행인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어요. 게다가 불법 비스무리한 일이라 자신을 PR하는 미국인도 없었고요. 대체 어떻게 거기서 영어를 잘 가르치는...하다못해 열심히라도 가르치는 외국인을 찾아낼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애초에 그런 채널이 없으니까 소개를 받아온 거고요.


 어쨌든 어머니들의 모임에서 영어를 약간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였어요. 어머니는 미군부대로 진입하는 곳의 잔디밭에 하루종일 앉아 있기로 했어요.



 6.어머니의 계획은 그곳에 앉아 거길 출입하는 미국인들을 지켜보는 거였어요. 어머니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어요.


 1-백인일 것. 그야 이건 매우 편견적이지만, 위에 쓴 양아치 미국인 부부가 흑인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편견적인 조건을 만들었겠죠.


 2-사병이 아니라 장교 계급일 것. 이것도 정의로운 듀게에 쓰기는 좀 매우 편견적이군요.


 3-군인이 아니라 아내일 것.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남자 본인은 직업 군인이라 가르치는 데 소홀했다는 게 이유인 것 같아요.


 4-사투리를 안 쓸 것. 미군부대에서 과외하는 어머니들 사이에 돌던 도시전설인데,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친 미국인이 사투리가 너무 심한 영어를 가르쳐서 한국 아이의 발음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가르치는 사람의 사투리가 너무 심해져버린 게 문제일 정도로'높은 수준까지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 선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5-큰 밴이 있을 것. 큰 밴을 가지고 있으면 아이가 많은 집일 것이고 아이가 많으면 책임감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라는 좀 이상한 삼단논법이었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죠. 정말 맨땅으로 다른 나라의 사람에 대해 파악해야 하니까요. 좀 무리한 논리를 적용시킬 수밖에요.


 6-이건 사족이지만...'영어과외 경험이 없는 자.'도 바라는 조건 중 하나였어요. 애초에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영어과외를 하려고 먼저 나선다'라는 것 자체가 돈만이 목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야 미군 영어과외를 안 해본 사람을 찾는 게 좋겠죠. 그럴 수 있다면요.


 하지만 영어과외를 하려고 먼저 나서지 않는, 사실상 외국 땅에 사는 사람을 어떻게 무슨방법으로 찾아내려는 건지 이해가 안 됐어요. 찾아내더라도 어떻게 설득시킬지도 문제였고요.



 7.어쨌든 어머니는 무작정 그곳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어요. 그렇게 며칠간 소득없이 보냈어요. 그리고 어느날 돌아와 '누군가를 만났다'고 했어요. 전해들은 얘기긴 하지만 웬 백인에 금발머리 여자가 밴을 타고 출입하는 걸 보고...장교의 아내일지 어떨지 모른다는 점만 빼면 조건에 전부 들어맞겠다 싶었다고 했어요. 사투리 부분이야 뭐 말을 걸어보면 아는 거니까요. 어머니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대요.


 '야! 너 영어 한 번 가르쳐 보지 않을래?'


 뭐 미국이니까 존대말 반말 개념이 없었겠죠? 어쨌든 그녀는 그런 영어과외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고 했대요. 어머니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그녀의 '지독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요. 좀 이상해서 물어봤어요.


 '그 사람이 지독한지 지독하지 않은지 어떻게 알죠?'


 그러자 어머니는 그 사람과, 자식들이 한국에 와서 제일 처음 배운 한국말이 뭘 거 같냐고 되물었어요.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자 대답이 돌아왔어요.


 ''깎아주세요'더라. 사람이 아주 지독해서 믿음이 가.'


 지독한 사람이니까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라는 논리는 '지독한 사람이니까 돈에만 관심있을 것이다'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 논리였지만...뭐 어쨌든 그 여자를 보러 가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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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 이 글을 쓰다가 '이거 불법 아닌가.'싶어서 그만뒀었는데 이미 오래 지난 일이니까 문제될 것 같지 않아서 써봤어요. 그냥 인간들이 살아가는 얘기니까요. 다음에 시간이 되면 이어서 써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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