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썼던가요. 누군가의 의견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게 아니라고 말이죠. 의견은 그가 어떤 처지의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거죠. 사람들은 가끔 상대를 재볼 때 상대의 의견을 듣고 상대의 지식 수준과 통찰력을 판단하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글쎄올시다예요. 지식이나 통찰력은 스스로의 의견을 멋지게 포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여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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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전에 썼듯이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은 분리해서 보고 있어요. 그 둘은 물리학과 물리학자의 관계와 다르니까요.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을 '배운' 사람들이고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해석한' 사람들이니까요. 해석의 여지가 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디테일하게 짜여진 것과 해석할 여지가 많은 것...그건 분명한 차이가 있죠. 학문과 이념의 차이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물리학자보다는 페미니스트들을 흥미롭게 보고 있는 중이죠. 왜냐면 위에 썼듯이 물리학은 어느 단계까지는 해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일정 단계까지는 똑같이 수렴할 뿐이잖아요. 그러니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다들 똑같아서 재미가 없죠.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본인의 지각, 환경, 욕망에 따라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코끼리를 각자 다르게 묘사하거든요. 하나의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어디까지 다양하게 해석되느냐...를 보고 있는 건 재밌어요.


 아마 이건 페미니즘과 관계가 없어서 순수하게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는 거겠죠. 내겐 페미니즘이 쓸모가 없으니까, 처음부터 페미니즘을 해석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뭐...쓸모가 없어도 재미삼아 할 수는 있겠지만요.



 2.사람들의 의견에 호기심이 있긴 하지만, 그건 가십거리로서의 호기심이예요. 남의 의견이 내게 실제적인 쓸모가 있지는 않아요. 왜냐면 사람들의 의견이란 건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일 뿐이거든요. 그들 자신의 입장 말이죠. 설령 세상을 부감하는 시야를 가진 녀석이라고 해봤자 그가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시점...즉 제일 중요한 시점은 자신의 시점이니까요. 그러니까 각자의 의견은 곧 각자의 처지를 대변할 수밖에 없죠.


 지식이란 건 아무리 쌓아봤자 자신의 의견을 강화하는 데 쓰이는 도구가 될 뿐이지, 지식이 곧 의견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아무리 똑똑하고 시야가 넓은 녀석이라고 해도 뭐하러 남을 위해 살겠어요? 옳은 것에 관심있는 척 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녀석들은 많지만요. 정말 옳은 것에 관심있는 놈이라면 행동으로 남들을 설득시키겠죠. 말이 아니라. 


 그래서 나는 상대의 의견을 듣는 걸 좋아해요. 상대의 의견은 곧 그 사람의 결핍을 상징하니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꽤나 민감해하거든요. 그야 그들은 그걸 숨기려고 노력은 해요. 하지만 말을 시켜보면 자신이 그걸 고백하는 중이라는 걸 자각하지도 못하면서 줄줄 말하곤 하죠.



 3.요즘은 지식은 쌓았으면서 처지는 나아지지 못한 주위의 몇몇 사람들을 끊어버리게 됐어요. 지식은 많이 쌓았는데 처지는 나아지지 못한 그들은 만날 때마다 말만 점점 늘어나요. 그리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즐겨 하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아니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 말이죠. 그리고 대화의 볼을 패스하는 게 아니라 혼자서 계속 드리블을 하려고 하죠.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대화라는 건 캐치볼이라고요. 나는 상대가 즐겁게 받아칠 수 있는 공을 보내고 상대는 내가 즐겁게 받아칠 수 있는 공을 리턴하는 것...이것이 대화의 예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상대를 곤란하게 하는 타구나 상대가 받아칠 수 없는 타구는 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싸움을 하고 싶어하는 놈들이 너무 많단 말이죠. 돈도 되지 않고 즐거움도 되지 않는 말싸움을 걸어놓고 이기고 싶어하는 놈들 말이죠. 


 그들은 딱히 고약한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니예요. 사실, 늘 그대로죠. 달라진 건 우리들의 나이와 사회의 기대값...이 둘뿐이예요. 이 두 가지 조건만 달라져도 똑같은 인간에게서 완전히 다른 측면과 완전히 다른 신경질적인 모습이 발현될 수 있는 거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뭐랄까...인간에게는 승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승리를 경험하지 못한 놈들은 승리에 굶주려버리거든요. 승리에 초연한 척은 하지만 인간인 이상 절대 그럴 순 없어요.


 승리에 굶주린 놈들이 콜로세움이 아니라 살롱에서 남들에게 싸움을 걸고 다니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들게 됐어요. 살롱과 전쟁터를 분간할 줄 모르는 사람...제대로 싸워야 할 곳에서 그러지 못하고 싸우지 말아야 할 곳에서 이기려 달려드는 사람...그런 사람들은 매우 짜증난다고요.



 4.휴.



 5.사람들은 이런 글을 보면 '이 사람,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라고 여기겠죠. 하지만 아니예요. 전에 썼듯이 세상에 진실은 없다고 여기거든요. 각자의 입장...처지에 따른 해석만이 있을 뿐이죠. 페미니스트들은 그냥 세상을 그렇게 해석하기로 한 거예요. 그 해석은 그들의 몫이죠. 왜냐면 위에 썼듯이 해석은 그 사람의 통찰력이나 지식 수준과는 별 관계가 없어요. 해석은 처지에 종속될 뿐이니까요. 지식은 소유자의 해석을 도출하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소유자의 해석을 포장하는 데에 쓰이는 법이거든요. 지식이 많을수록 자신의 처지를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네가 하는 말들은 100%맞아. 다른 놈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쓰지마.'라고 말해주죠. 왜냐면 그들에게는 100% 맞는 말일 테니까요. 그들에게는 100% 맞는 소리고 나한테는 헛소리인거죠. 사람들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알아달라고 떼를 쓰기도 해요.


 내가 적극적으로 싫어하는 건 두 가지 타입의 인간이예요. 자신의 해석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해석을 그대로 복제해와서 떠드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남에게 강요하려는 사람이요. 왜냐면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져봐야 다른 사람의 시점이나 입장에서 최고의 솔루션을 내려 줄 수가 없거든요. 세상을 해석해내는 건 온전히 각자의 몫이어야 해요.


 

 6.전에 썼듯이 어린 아이들에게 이념을 가르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교육과 선동은 한 끝 차이죠. 어른들의 역할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소개하는 것에서 그쳐야 하지 무언가를 불어넣어선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한 아이에게 편향을 강요하는 건 그 아이의 잠재력을 깎아먹는 거니까요.


 뭐 그야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려는 것도 전략의 일환이라고 이해는 가요. 페미니즘은 종교와 비슷한 면이 있거든요. 페미니즘이 종교와 유사한 점은 머릿수가 곧 힘이 된다는 거죠. 종교도 그렇잖아요? 머릿수가 적으면 사이비종교, 머릿수가 많으면 종교인거죠. 페미니즘 같은 이념은 일단 무조건 같은편을 늘리는 게 구성원들에게 유리하긴 하죠. 


 아마 페미니스트들이 한 줌의 모래알이라면 매우 무시당하겠죠. 지금보다 훨씬 더요. 돈이나 매력, 권위 같은 권력이 아닌 정체성을 무기화하기로 한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10만 명, 100만 명, 1000만명의 머릿수를 가진다면 정체성도 권력이나 권위가 될 수 있긴 하니까요. 뭐 그들에겐 좋은 일이죠. 



 7.뭐 어떤 사람들은 그러겠죠. 너는 그러면 젠더문제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냐고요. 글쎄요...내가 아는 건 모든 사람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문제를 강조한다는 거죠. 이 세상엔 자신이 겪는 문제를 강조하는 사람, 굳이 강조하지 않는 사람...두가지 타입이 있어요. 


 그리고 당연히 나는 후자의 타입이죠. 내가 특별히 강하거나 자립적이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예요. 나는 알거든요. 남자들은 자신이 겪는 문제를 남에게 강조하고 드러내봐야 도움을 얻지 못할거라는 거요. 남자들이 자신이 겪는 문제를 남에게 말해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조소와 조롱뿐이라는 걸 말이죠. 


 뭐 이건 슬픈 일이죠. 약하다는 이유가 조롱받을 이유가 되어야 할...그런 존재로 태어난 거 말이죠. 그러나 나는 잘 이해하게 됐어요. 세상은 원래 누군가에겐 끔찍하게 혹독하고 누군가에겐 터무니없이 상냥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세상이 내겐 상냥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죠. 그 사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냥 그것은 엄정한 사실이란 걸 말이예요. 이게 바로 남자들이 겪는 젠더문제죠. 물론 세상은 관심없어하지만요.


 그래서...남몰래 마음을 먹게 된 거죠. 내가 비록 착한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언젠가 세상보다 강해졌을 때 세상에게 공짜 친절은 베풀지 않을 거야라고 말이죠.


 하하, 말은 늘 이렇게 하지만 역시 너무 착해서 그런지 공짜 친절을 베풀곤 해요. 나는 원래부터 착하게 태어나서 그런 건가봐요. 그게 디폴트 상태라서 그런지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으려 해도...무리에서 소외되어 떨어져 나온 누군가가 혼자 구석에 앉아서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 걸 보면 내 마음은 쉽게 풀어지고, 도움을 주러 먼저 다가가곤 해요. 그럴 때의 나는 너무나 착하고 너무나 상냥한 사람이 되어버리죠.


 ......라는 건 뻥이지롱! 그런 녀석들을 돕는 건 내가 착한 사람이어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잖은 우월감을 느껴보고 싶어서 도와주는 것뿐이예요. 헤헤. 하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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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이슈를 일 단위로 만들어내고 있군요. 뭐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해야 하겠죠. 그들이 내뿜는 악의와 독기의 수준을 감안해보면 그 놈들은 존나 나쁜새끼들인 게 확실하니까요. 하지만 그들을 별로 미워하고 싶진 않아요. 그들도 할 수만 있었다면 멋진 방법으로 세상을 상대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권력이나 권위...매력 같은, 소유자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무기를 가졌다면 그들도 굳이 자신과 비슷한 여러 사람과 연대하진 않았겠죠. 정체성...그중에서도 성별이라는 정체성은 그냥 2분의 1 확률로 랜덤으로 주어지는 거잖아요? 그런 건 무기로 삼기엔 특별하지도 않고 폼도 안 나죠. 아니, 무기는 커녕 변명거리로도 폼이 안 나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잖아요? 처지를 고를 수만 있다면야 여러 명과 연대해서 원오브댐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아요. 원 맨 아미가 되고 싶어하죠.


 특별한 것...굳이 예를 들면 돈 같은 거겠죠.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투쟁할 필요도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필요도 없거든요. 돈은 숫자이기 때문에, 달리 해석되거나 논쟁적이 될 수가 없어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고 가격이 납득할 만하면 지불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 외의 것...말빨이나 지식이나 노동력이나 정체성이나 머릿수 같은 것을 세상을 상대할 투쟁의 수단으로 삼으면, 남들과 싸워야만 하죠. 물론 정체성은 가장 부가가치가 낮은 투쟁의 수단이고요. 폼도 안 나고요.


 하지만 어쨌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결국 정체성이란 무기를 써먹기로 결정을 내렸단 말이예요. 정체성과 머릿수 말이죠. 그게 폼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예요.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어지간히 패악질을 하고 다닌다고 해도 미워하기가 힘들어요.


 하하, 물론 그들에게 공감은 안 해요. 왜냐면 그건 너무 편향적인 거잖아요? 자신이 겪는 문제를 강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구 공감을 해줘버리고 도움을 줘버리면, 자신이 겪는 문제를 강조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안됐잖아요. 그들이 비명지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간다고 해서 그들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도 옅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죠. 


 내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엔, 그 친절은 자신의 문제를 강조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베풀어지겠죠. 적어도 트위터에 자신의 계좌 번호를 당당히 적어놓지는 않는 사람에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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