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니

대략 1년간 충무로에서 ‘언니’, ‘마녀’, ‘도어락’ 같은 여성 원톱 오락물을 줄줄이 쏟아낸 건 참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뺑반이랑 유관순도 여기에 넣으려면 넣을 수도 있겠죠) 그 와중에 흥행 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나 가장 나았던 게 v.i.p.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로 여성 혐오 논란을 일으킨 박훈정의 ‘마녀’라는 건 좀 아이러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뭐 이런 얘긴 접고, ‘언니’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참 별로였습니다.
여성 주인공이 여성을 구하는 영화이고 그 과정에서 나쁜 남자들을 주구장창 때려잡습니다. ‘테이큰’과 ‘아저씨’를 참고해서 성별 역전을 첨가한 듯한 모양새의 영화인데 해당 영화들에 비해서 쾌감이 한참 부족해요.

물론 ‘현실 반영’도 하고 싶고 또 남자 히어로들과의 차별점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하고 그 의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거나 이 영화의 모양새는 ‘테이큰’처럼 ‘수퍼히어로에 가까운 캐릭터가 그냥 다 때려잡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러한 쾌감의 결핍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아무리 무술 고수에 유능한 경호원이라는 설정을 깔고 간다고 해도 마지막의 17대 1 액션 같은 건 어차피 말이 안 되고 실제로도 말이 안 되게 연출이 되거든요. 어차피 그럴 거면 걍 절대 무적 금강불괴로 설정해 놓고 응징의 쾌감에 집중했으면 좋았을 텐데. 자꾸만 동네 양아치 아재 하나 상대하다가도 방심하다가 꼭 위기 한 번씩은 겪는 식으로 액션을 짜니 뭔가 맥이 빠지더군요.

그리고 동생의 기구한 팔자를 보여주며 ‘현실’을 강조하는 이야기 방식도 전 별로였습니다. 이게 이야기가 너무 인위적이라서 오히려 여성 캐릭터 착취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보면서 가끔씩 80년대에 유행했던 사회비판을 빙자한 에로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ㅅ=

뭐 그래도 이시영은 기대보다 근사하게 나왔고. 몇몇 격투씬은 잘 짜여져서 (그리고 어차피 돈 따로 안 쓰고 넷플릭스로 봤으니까) 그냥저냥 보긴 했습니다만. 눈에 밟히는 아쉬운 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냥 쌩뚱맞은 치트키 캐릭터 이야기와 동생의 과거지사 같은 건 잘라내 버리고 이시영의 추적 & 응징 액션에만 집중한 순수한 오락 영화로 만들었음 훨씬 더 좋게 봤을 것 같아요.


2. 부탁 하나만 들어줘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안나 켄드릭.
장르는 분명 스릴러라고 적혀 있으나 포스터는 코믹하고 감독은 폴 페이그.
딱히 보고 싶단 생각은 안 들었으나 그냥 도대체 무슨 영화인지 궁금해서 봤습니다만.
아, 정말 재밌었네요. ㅋㅋㅋㅋㅋㅋ

스토리를 요약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스토리로는 영화의 상태(?)가 잘 전달이 안 되거든요. 굳이 말하자면 영화 속 대사로도 언급되듯이 ‘디아볼릭’의 변주 이야기 중 하나 정도인데. 이야기가 계속 괴상한 느낌으로 튀어요. 시종일관 이게 도대체 진지한 장면인지 웃으라는 장면인지, 여기서 지금 저 캐릭터는 진심으로 저 대사를 치는 것인지 비꼬려고 그러는 것인지 헷갈리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영화의 톤 역시 진지한 스릴러와 가벼운 코미디, 그리고 두 여자의 인간 관계 드라마를 오가며 시종일관 경쾌하면서도 혼란스런 난장판을 벌이는데 그게 전혀 지루하거나 산만하지 않고 재밌게 잘 묶여 있는 거죠.

스릴러로든 코미디로든 ‘정통’스런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겠습니다만, 좀 괴상하게 재밌는 영화가 취향이시라면 강력하게 추천해드립니다.


3. 서치

처음에 적은 ‘언니’도 이 영화도 모두 넷플릭스에 이번에 업데이트 되어서 봤습니다. 넷플릭스가 컨텐츠 확충에 되게 적극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근데 가만 보면 넷플릭스가 좀 웃기는 구석이 있어요. 예를 들어 썸네일(치곤 너무 크긴 합니다만;) 포스터 이미지를 안 쓰고 굳이 영화 속 장면 캡쳐를 쓰죠. 포스터 이미지를 쓸 수 없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장면 캡쳐를 정말 무의미하게 해서 영화 이미지를 뒤틀어버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예를 들어 ‘연애의 목적’ 이미지를 한 번 찾아보세요. 완전히 사기입니다. ㅋㅋㅋ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해외 영화의 국내 개봉제를 무시해버리고 걍 원제를 쓰거나 아님 아예 제목을 새로 만들어 붙여 버리는 경우까지 있는데 이 ‘서치’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메뉴 화면에 그냥 Searching이라는 원제를 떡하니 적어 놨더라구요. 그래서 잠시 비슷한 제목의 짝퉁인가... 하는 의심을.

또 서론이 길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컴퓨터 화면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게 포인트인데. 생각보다 유연하게... 달리 말하자면 태연하게 대놓고 반칙을 저지르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뭐 괜찮았습니다. 결과물이 괜찮았으니까요. 어차피 요즘 파운드 푸티지물들도 다 그러지 않던가요. 대밌으면 되는 겁니다 재밌으면. ㅋㅋ

일단 존 조가 연기한 아버지의 컴퓨터 스토킹 능력이 펼쳐지는 부분들이 재밌었어요. 스토리 전개를 위해 종종 쉽게 풀리는 부분들이 많긴 하지만 이걸 실마리로 저걸 찾고 그걸 힌트 삼아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하는 과정을 실시간 느낌으로 보고 있으니 퍼즐 미스테리 명탐정의 추리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재미가 있더란 말이죠.

사건의 진상이나 반전 같은 건 사실 대단치 않은데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 특히 컴퓨터 화면 전개라는 형식을 활용해서 이야기의 약점을 덮으면서 흥미를 유발하는 솜씨가 참 좋았습니다.

물론 진상, 반전이 별 거 아니라고 해서 이야기가 별로였다는 건 아니구요. 오히려 되게 잘 짜여진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시작하고 10분만 지나면 엔딩이 빤히 보이는 이야기인데 그 결말까지 가는 과정을 뻔하지 않게 적절하게 잘 비틀어 주더라구요.
또한 아무리 뻔하다고 해도 가족들 서로간의 애틋한 감정을 잘 표현해줘서 이입하기도 좋았구요. (초반의 아내 이야기는 대호평이었던 픽사 up의 도입부 생각도 나더군요)

또 영화 속 중심 소재인 인터넷, 컴퓨터 세상을 다루는 태도도 맘에 들었습니다. 단순하게 '이게 이렇게 피상적이고 위험한 거야!' 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세계 전반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게 좋았어요. 관심병자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위험한 덫이 수두룩하지만 어쨌거나 이미 우리의 일상이자 현실이 된 세계란 말이죠.

음... 그리고 사실은 영화 중반에 나오는 드립 하나가 최고로 좋았습니다. 사실 되게 진부한 드립인데 진지하기 짝이 없던 와중에 허를 찌르며 한 방에 훅 들어오니까 무방비로 깔깔 웃을 수밖에 없었던. ㅋㅋㅋㅋ

암튼 뭐 비슷한 형식의 영화를 또 보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이 한 편은 아주 흡족했으니 이런 영화가 더 나와도 나쁠 건 없겠죠. 재밌어 보이면 보면 되는 거고 아님 마는 거고.

한 마디로... 한 번 보셔도 큰 아쉬움 없을만한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추천할만 하네요.



사족 : 사실 이 영화랑 '언니'는 코엔 형제 때문에 보게 됐습니다. 넷플릭스에 그 양반들 신작이 떴다길래 그거 보려고 켰는데 괴상하게도 그 영화만 화면이 정상의 1/4 크기로 나와요. 뭔 짓을 해도 정상으로 안 나오길래 그냥 끄기 아쉬워서 다른 영화 보고. 다음 날 또 그러고. 오늘 또 시도할 예정인데 또 엉뚱한 영화 보게 될까 두렵습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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