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이슈, 일단 들을 것!

2019.04.26 13:12

Sonny 조회 수:1088

https://youtu.be/P5Mpo4JQZhw

제가 전에 임신중단 이슈로 테드 강연이라도 들어봐야겠다고 댓글을 남겼었죠. 그리고 해당 이슈로 이 영상을 접했습니다. (키워드의 문제일까요. 관련 이슈로 유튜브에서는 테드 영상들이 더 많이 검색되네요)

낙태(이 글에서는 일단 이렇게 명칭을 통일하겠습니다)에 대해서 저 강연자는 아주 중요한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뭐든 좋다. 그 전에 일단 낙태(경험)에 대해 여성들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pro-voice라고 소개합니다. 태아가 생명이냐 아니냐, 낙태가 살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낙태를 이야기하는 여성의 목소리 자체를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우리는 낙태를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이 이슈를 우리는 이야기할 준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남성중심적인 사고 아래 금기로 합의되어있기 때문이죠. 어쨌든 죄악이고 망측스럽고 부끄러워해야한다는 이상한 합의 아래 굉장히 많은 조건을 갖다 붙여야 낙태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해집니다. 낙태를 한 나는 왜 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고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는 서사를 갖다 붙여야 발화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그래야 할까요? 낙태를 조금 더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본격적인 토론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새삼 <우리의 20세기>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생리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구요~! 자 다들 외쳐보아요 멘스트루에이션~!!" 이 영화의 배경은 격동의(...) 1970년대였지만 지금 한국은 아직도 생리를 터부시하는 문화가 여전합니다. (그러나 김보람 감독은 멋지게 <피의 연대기>라는 영화를 내놓고 생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물며 낙태는요? 한국에서 낙태를 뭐 얼마나 이야기한 적이 있기나 합니까.

낙태의 주체는 결국 여성입니다. 그런데 낙태의 주체들에게서 낙태가 왜 어떻게 결정된 선택이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낙태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들은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습니다. 누가 그걸 이야기해줍니까? 어떤 여자가 작금의 상황에서 낙태는 죄 어쩌구 할 게 아니며 자신이 무슨 경험을 했는지 남자들에게 왜 이야기를 하겠어요. 바로 살인자에 년 자 소리가 나올 텐데요. 낙태에 대한 여성의 발화는 두루뭉실한 도덕 아래 꽉 막혀있습니다. 그 결과 낙태를 가장 자유롭게 시끄럽게 크게 이야기하는 것은 남자들밖에 남지 않습니다. 차별의 궁극적 진화는 도덕이라는 한 사례를 보는 것 같아요.

여자들이라도 낙태에 대해 경험자와 비경험자, 살아온 환경과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지지 혹은 반대의 입장차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자들이 낙태를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지 않나요. 낙태에 대한 그 어떤 경험담도 듣지 못한채, 당사자들의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한 채 여자들을 단죄하는 데만 열심이라니요. 무자격의 심판관들이 결정권을 휘두르려하는 것은 씁쓸한 코메디처럼만 보입니다. 당연하겠죠.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원래 너무나 보편적이고 절대 현실에 끼워맞출 수 없는 절대적 도덕을 갖고 올 뿐이니까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 여자들에게, 일단 단죄부터 하던 그 논리가 갑자기 사라질리가 있겠습니까. 세상 편하게 산다는 건 모르는 채로 욕하면서 살고 싶다는 거죠 뭐. 아무튼 나쁘니까!

제가 저희 어머니의 낙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저희 할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제 멋대로 애를 지웠다, 내가 키워준다고 해도, 그렇게 집에 복을 갖다줄 아이라 해도 너희 엄마가 아주 "똑 떼어버렸더라!"라는 말을 했거든요. 뭔가 굉장한 비밀을 당신의 손주에게 고발하듯이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어렸을 적에는 저희 엄마를 조금은 불편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젠 알아요. 그건 엄마 혼자의 선택이 절대 아니었고 무조건에 가까울만큼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단 걸. 심지어 저희 엄마는 무슨 하소연으로 풀어놓지도 않았답니다.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너희 할머니가 나한테 또 시어머니질을 한다고 비웃었을 따름이죠. 그건 맞는 말입니다. 가부장제의 화신이자 집안의 왕으로 군림해야 속이 풀리는 저희 할머니의 호언장담은 당시 불안했던 저희 부모에게 그 어떤 대책도 되지 못했으니까요.

2017년이었나요. 벌써 세월이... 저는 검은 시위에 참여했었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검은색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추고 낙태죄폐지를 소리높였던 시위였죠. 거기서 저는 아주 의외의 광경에 맞닥뜨렸습니다. 싸튀충을 처벌해라~ 라며 자유롭게 웃고 세상 당당하게 있던 "쎈 룩"의 여자들이 낙태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거진 다 처절하고 슬퍼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낙태죄폐지의 최전선에 선 여자들도 결국 개인적으로 진솔해질 때는 눈물을 참으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보편적 관념에 익숙한 여자들은 오죽할까요. 낙태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고 어렸을 적부터 주입받아온 도덕의 굴레는 전력을 다해도 벗기 어려운 것일테니까요. 어떤 남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낙태는 절대 가볍고 무책임한 행위가 될 수 없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그렇게 실감하는데 어떻게 자시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없을 수 있겠어요?

낙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자들은 그냥 생각이나 시시한 도덕이 아닌, 아주 많은 사례들을 먼저 첨부해야 합니다. 그 사례들이라도 들고 와야 그나마 좀 주워들었고 생각이라도 해봤겠구나 하지 않겠어요. 낙태란 남자들에게 뭘 이야기할 계제도 아닙니다. 일단 들을 차례에요. 뭐가 나쁘다도 욕하는 건 애들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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