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3 09:44

흙파먹어요 조회 수:703

신학기 남고의 일상은 쉬는 시간, 별안간 드르륵 열리는 뒷문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미간을 찌푸리 채 코를 벌름거리는 놈팽이 하나가 문간에 서서 외치는 거지요.
"야! 순돌이(가명)가 어떤 XX야? 나와!"

보다시피, 누구도 뭐라 한적 없지만 늘 화가 나있는 래퍼들처럼 그들은 자기가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 짧은 10분의 골든타임. 오줌도 싸고, 매점에 뛰어가 고로케라도 하나 집어먹어야 할 소중한 시간일진데,
호명된 자는 굳이 또 그 도발에 응해줍니다.
이제 그 순돌이가 고개를 좌상향 15도로 꺾은 채 쳐주는 대사로 이 소동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내가 순돌이다 이 바밤바야. 니 먼데?"
"니가 XX 2학년 짱이라고 씨부리고 다녔냐?"
"아니? 나는 안 그랬는데 다들 그러대?"
"2학년 짱은 나다. 니 깝치지 마라."
"뭐 이..."

당장이라도 교실 뒤켠이 피바다가 될 듯한 모양새지만, 곧 선생님도 들어오시고, 남은 시간에 오줌만은 싸고와야 하기에
그들은 빨리빨리 싸우고, 빨리빨리 씩씩 거리다가 훗날을 약속하며 헤어집니다.
그럼 어느 청소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교복 칼라를 세우고 방과 후에 주먹을 나눌까요?
그럴리 있습니까? 그건 일종의 상견례 같은 것이지요. 작년에 다 해놓고 굳이 또 하는 허례허식.

그럼 저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요?
저의 일상은 그 먼지나는 순위결정전의 혈투와는 무관하게 늘 고요했습니다.
시비를 거는 놈이 민망해지는 싸움계의 불가촉천민.
뒤져서 나오면 십원에 한 대라던 애들이 학기말 되면 데리고 나가 포카리 한 캔씩 사주던 거지왕.
야야야 쟤는 냅둬 할 때의 바로 걔.

이 아웃 카스트 생활은 대학과 군대, 사회로 이어져,
저는 인간관계에 있어 쭉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서 있는 무언가였습니다.
이성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남녀가 떼로 어울려 과업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모임에는 한 번도 껴본적이 없었어요.
그런 제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 어제 드디어 선이라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전 정말 신났다구요. 요후~

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코에이사의 삼국지 게임과 비슷했습니다.
조금 미화된 인물의 면상을 보고, 케릭터의 무력, 지력, 통솔, 정치 등으로 수치화 된 스펙을 가늠했어요.
가령, 삼국지3 에서의 여포는 무력은 100 이지만 지력은 21, 매력은 겨우 12.
집에서 승질 난다고 느닷 없이 밥상 엎기 딱 좋은 인간이라는 걸 굳이 안 봐도 알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수치 만으로는 알 수 없는 케릭터도 있는 법입니다.
위연은 통솔, 정치, 무력, ... 뭐 하나 빠질 것은 없어 고만고만하게 제법 쓸만한 케릭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 형 그런다고 사람이 안 죽어?"라며 제갈량이 세운 제단을 엎어버렸죠.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런 거라니까요?
어쩌면 그 시절 순돌이와 좋은 친구들은 이 진리를 알았기에 굳이 대면식을 갖었었는지도요.

선 얘기의 결론을 말 하자면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눈치가 식사하러 나오신 것 같기에 편하게 밥 먹자고 온갖 개드립을 쳐서 웃기고 잘 보내드렸어요.

거의 숨겨왔던 개그보따리 대방출이었달까?

하긴, 제가 봐도 저의 스탯, 자룡보다는 올돌골이나 맹획.

곧 봄이 오려나봅니다.

여친렌즈 중고로 좋은 거 하나 나왔던데,

벗꽃 피거든 마운트 해가서 카메라를 지팡이 삼아 봄날을 즐겨야 겠어요.

다 지나가겠죠

그 시절에 순돌이와 좋은 친구들도 서로 죽일 듯이 욕을 주고 받았지만
결국 누구도 죽지 않았고, 무슨 일 있었냐며 시간은 흘러갔듯이요.

라이프 고스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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