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3 01:58
현 제사상 차리기는, 덕수 이씨 방법, 송씨 가문 방법, 또 어떤 이씨 가문, 기타 몇몇 가문 조합식이죠. ㅎㅎㅎ 알면 알수록 웃기는 짬뽕이 현 제사 상차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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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기사입니다.)
아래 기사의 댓글에서 가져왔습니다. 놀랍네요. 제사 음식은 조선 시대부터 정해진 것인줄 알았는데, 명문 가문 몇몇 집안의 예법이 일제 강점기 이후 정해진게 전부…라니…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의 인터뷰네요.
기사 아래 달린 댓글들도 거의 의견일치…
지금 한국인들에게 명절 스트레스라는게 어떤건지 잘 보여주는듯 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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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나서서 차례상을 세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우리는 유교국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교 예법인 차례를 국가가 국민들에게 '이렇게 차려라' 하고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크리스마스에 케이크 가격이 어떻다고 물가 자료를 안 내놓잖아요. 석가탄신일에 사찰의 시주금액이 얼마인지도 내놓지 않고요. 그와 마찬가지로 차례상의 물가 자료를 내놓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에서 국가가 차례상 음식까지 지정해 물가를 내놓는 일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에서 그렇게 하니까 국민들 입장에서는 차례상을 꼭 그렇게 차려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죠. 유교의 예법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유교 예법에는 어떤 음식을 올리라고 지정한 적이 없어요. 유교의 성경 격인 '주자가례'를 봐도 밤, 배, 조기, 시금치, 고사리 식으로 지정한 바가 없습니다. 포, 채, 과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 놨을 뿐이죠. 유교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그 계절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을 차례상에 올리는 게 유교 예법이라 할 수 있죠."
'홍동백서' '조율이시'로 표현되는 지금의 규격화된 차례상은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 황 씨에 따르면,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말 본격화했다.
"집에서 지키는 유교 예법이 '가례'입니다. 그것이 집집마다 모두 다르니 '가가례'라고 부르죠. '홍동백서 등이 만들어지는 것은 대략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조금 보이고,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말 본격화합니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식으로, 마치 그런 예법이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진 거죠."
여기에는 조선 말 계급질서 붕괴도 큰 역할을 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 예법을 지키던 이들은 양반들이었잖아요. 양반이 아니면 차례를 지낼 필요가 없었던 거죠. 조선 초기에 양반이 전체의 5~10%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머지는 상민이었으니, 90% 이상의 사람들은 차례를 안 지냈어요. 그런데 조선 말에 와서 계급 질서가 무너집니다. 양반 계급이 약 70%가 되는 거죠. 양반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늘어난 게 아니라, 상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했기 때문이죠."
대다수의 사람이 양반으로 신분을 세탁했고, 유교 예법을 지키게 된 입장에서 자연스레 차례를 지내게 됐다는 말이다.
"갑오경장을 통해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양반'이라는 인식이 확산됩니다. 해방 후에도 양반인 것처럼 행세해야 사회적인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 양반이 해야 하는 일인 차례를 지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지낼 줄 몰랐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집의 '가가례'를 지켜보면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조율시이' 등이 만들어져요. 그렇게 만들어져 돌던 것을 1970년대 국가에서 확정했습니다. 사실 유교식으로 따졌을 때 아무 근거도 없고, 맞지도 않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79&aid=0002873261
(클릭하시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댓글들도 재밌는데요...
한참 웃었습니다 ㅎㅎ
피에르 부르디외 식으로 구별 짓기.. <예서>에는 안 나오는데, 룰이 쉬우면 개나 소나 다 따라 하니까, 스스로 룰을 어렵게, 복잡하게 만드는 거지.. 신분제 풀리고 이번에 새로 제사 지낼려는 상놈들 감히 못 따라하게.. 이거도 그 짝이여.. 지금 우리가 영구불멸의, 한민족의 전통이라고 철썩같이 믿고있는 게 대부분 일제시대, 좀 오래됐다 싶어도 19세기 중후반 정도에 형성된거여.. 꼰대들아..
태클 걸 꼰대들 때문에 덧붙이자면, 고전번역원 연수원에서 3년동안 한문공부 했고, 사서는 다 뗐다. 소학, 서경, 시경, 주역은 발췌로 강독했고.. 주자가례, 의례, 상례비요, 사례편람, 예서도 통독은 아니지만 대충 봤어.. 근데 그렇게 깨알같지 않어..
2017.10.03 02:17
2017.10.03 02:40
"갑오경장을 통해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양반'이라는 인식이 확산됩니다. 해방 후에도 양반인 것처럼 행세해야 사회적인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 양반이 해야 하는 일인 차례를 지내고 있는 거죠."
본문에 있는 황교익 선생의 말인데, 이 사태를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양반' 사실 이게 젤 문제죠 ㅎㅎ
언젠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강연 중에 최갑수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가 한 얘기가 생각나네요. 프랑스는 대혁명 과정에 왕과 귀족들을 학살하면서 국민 모두가 평등하게 '상것'들이 되는 것을 선택했고...우리는 조선이 망한 이후에 모두가 '양반'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요....
'저딴걸 쳐만든 자의 뇌구조' 가 대충 이럴겁니다.
우린 모두 양반이야!
제사 지내면서 이 생각이 정말 간절할 듯...
실제로 제삿상의 홍동백서가 상징하는 것이 조선시대 관료들 벼슬자리 이름들이던데요ㅎㅎ
2017.10.03 02:58
대충은 짐작했던 건데... 상상했던 내용보다 더 디테일하게 천박하고 졸렬하네요 ㅋㅋㅋㅋ
2017.10.03 03:09
역사를 알면 알수록 이 근대의 '만들어진 전통'에 대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결론은 제대로 된 민주 공화국의 시민 의식이 확고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저런 쓸데없는 신분제 사회의 심리적인 유습에서 벗어날 수 있죠.
저 짤 붙이면서 다시금 생각한건데 말이죠.
앞으로는 가가제사를 다 없애버리고 명절 때 마다 저런 식으로 지역 축제로 제사 지내기 같은거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역마다 향교나 서원들이 있으니까요. 거기 가서 지역 주민들이 모두 모여 '제사 축제'를 즐기는 거죠. 물론 의관도 저 짤만큼 화려한 한복으로 입고 말이죠.(조선 시대의 한복 아니면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 한복도 괜찮고 ㅎㅎ)
어느 분 말씀처럼 제사를 전통 축제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7.10.03 03:23
프랑스에서 유학하셨던 제 교수님이 유학 시절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셨는데 - 언젠가 프로방스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가 진풍경 하나를 보게 됐다구요. 마침 그 지역에서 전통 프로방스식 결혼식이 엄청 성대하게 열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찌나 요란하고 대단하던지 그 지역 주민들 전체가 종일 들썩이더랍니다. 그래서 제 교수님도 그 주민들과 결혼식 구경을 갔는데....놀랍게도 신랑 신부가 프랑스 인이 아니었답니다! 베트남 젊은이들이었어요!(물론 엄청 부유한 집안 자제들이긴 했습니다만...) 여하간 외국인이 프랑스 사람 보다 더 철저히 프랑스 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주변에서 이런 얘기들이 들리더랍니다.
"우리 전통 혼례가 저렇게 하는 거야?" "몰라, 그런가봐. 나도 첨 보는 거라서..."
....-_-;; .....
그렇다고 합니다. 교수님 말씀이, 프랑스 사람들도 다 잊어버린 프로방스 전통 혼례를 그토록 열씨미 치르는 그 베트남 사람들 참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2017.10.03 03:51
기제사나 추석 차례 풍습이 근대의 산물은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초기에는 양반가에서나 지내던 것은 맞는데 임진왜란 거치고 조선 후기로 가면서 국가의 유교 보급 노력이 꽤 결실을 맺어서 그래도 사람답게 살려면(인륜지도)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는 정도의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었죠.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제사도 지냈고요. 그렇게 되자 양민층에서도 대를 잇는 문제가 중요해져서 가까운 일가붙이 중에서 양자를 들이거나 하는 사례가 증가합니다. 가톨릭이 처음 전래된 건 벌써 18세기 말의 일인데요. 서학으로 도입된 측면도 있지만 결국 종교를 받아들이고 전통으로 삼는 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초기에 제사 안 지낸다고 핍박받아가면서 신앙을 고집했던 것도 결국 대부분 양민층이죠.
다만 지금처럼 제사 상차림에 특정 품목을 고집하거나 말도 안 되는 형식을 전통이라고 고집하는 건 상당 부분 박정희 시대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의 공
2017.10.03 10:14
제가 인용한 글에서는 가가제사 전통이 빨라야 19세기 중반에 시작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즈음에는 이미 전국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생각했습니다.
제사 전통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신분제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 시기가 임란 이후 광해군 때 판매한 공명첩 제도부터 시작일텐데 - 아무래도 공명첩 사서 양반 행세 하는 사람들이 가문의 종가 제사에 참석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 인간들이 끼워줄리가 만무…―,.― ) - 이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제사 지내면서 가가제사 전통이 시작됐을 겁니다.(거기에 일반 서민에까지 유교식 예법을 전파시키려는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도 상당했으니) 아무래도 조선 후기 내내 서서히 정착한 듯 싶습니다. 신분을 사고 파는 일이 조선 후기 내내 진행됐으니 말입니다ㅎㅎ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
2017.10.03 08:00
2017.10.03 10:22
음식이 흔한 오늘날 한국에서도 제상 한번 차리는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인데, 기근 한번 들면 사람이 굶어죽던 전근대 사회에서 매번 집집마다 제사 지내는 일이 있었다는 건 정말 말이 안돼는 일이죠.
결론은 양반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종가에서 합동 제례를, 서민들은 동네에서 한데 모여 마을 제사를 함께 지냈던거죠. 그러니 제사란 가문 전체의 행사이거나 지역 축제였다는 ㅎㅎ
2017.10.03 15:52
2017.10.03 19:27
2017.10.03 10:08
2017.10.03 10:28
2017.10.03 10:30
2017.10.03 14:47
정말 대박이죠 ㅎㅎ 저는 초등 6때 사회 시간에 저 '족보 사서 양반 행세하는 역사'를 첨 배웠었는데 - 양반이란게 무슨 영국의 귀족과도 같은 것이라는 거하고 - 그런데 실은 모두가 양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에…어린 마음에도 정말 놀랐었죠…@_@ 이 문제로 사촌하고 논쟁했던 기억도 나고…ㅎ
2017.10.03 15:53
2017.10.03 13:31
정말 저런 예쁘고 멋진 한복을 입고 노는 그런 행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음 놓고 좀 놀 수 있는 그런 거.
2017.10.03 14:51
황교익의 칼럼 중에는 무척 맘에 드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저딴걸 쳐만든 자의 뇌구조가 궁금해요.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