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함, 더치페이, 인천공항

2017.10.03 02:56

사이드웨이 조회 수:1549

개인 SNS에 쓰던 글이 갑자기 불타올라 장문이 되었네요... 여기에도 한 번 옮겨 봅니다. 명절을 앞두니 역시 생각이 많아지네요. 역시 아래에도 '며느라기' 관련 글이 있네요. :)


평어체 양해 부탁드립니다!


*   *   *


이젠 김해의 큰집에 내려가지 않지만, 명절과 기일마다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내긴 한다. 어머니한테 제사는 제발 간소하게, 음식은 다 사서 지내자고 말씀드린 게 벌써 몇 년째다. 약간씩 간소해지긴 하는 것 같은데, '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라고 고집을 부리는 건 여전하다.


제삿상 차리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기일마다 친지들이 모이면 어머니가 대부분의 설거지를 맡게 되곤 한다. 내가 돕겠다고 나서는데, 어쨌든 그렇게 밥을 치우는 순간부터 짜증스러워지는 건 이제 일이 아니다. 일의 불공평한 분배다. 누구는 일하는데 누구는 놀고 있는 저 모습이 견딜 수 없이 밉살스럽다.


누군가는, 심지어는 어머니보다 항렬이 낮은 친지는 올 때마다 별반 도울 생각도 없이 뻔뻔스레 놀고 먹다 간다. 수북한 설거지 더미들이 저기 있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잘 먹다 가요~" 라고 그냥 간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그런 뻔뻔함은 "잘 먹고 가요. 설거지는 며느리인 님이 하셈~"이란 말과 전혀 다르지 않다.


약 3~40명이 모이던 김해 큰집에선 간혹 젊은 남자들이 설거지를 돕는 게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았고, 난 항상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도맡아서 하곤 했다. 그것까지 나이든 형수와 큰어머니들에게 맡기는 일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명절엔 꼬박꼬박 삼십여 명을 치러내던 큰집 형수의 어깨를 안마해드린 적이 있는데, 솔직히 말해, 좀 끔찍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벽돌이란 비유도 무르게 느껴질 딱딱한 어깨였다.


어차피 나도 구조를 깨부술 자신은 없고, 구조에서 도망칠 배짱도 없고, 그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착한 남자'를 연기한 걸 잘 안다. 올해도 연기하고 있다. 내 아버지는 여러모로 선한 사람임이 분명하나, 이런 문제에 관해선 가부장제의 관습에 적당히 기댄 채 '좋은 친척,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는 딱 그정도의 선함만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위선적이다. 이 문제로도 벌써 몇 년째 아버지와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그다지 바뀔 기미는 없다.


나는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이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다. 난 사실 친척들을 좋아한다. 다들 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입이 모이면 일이 느는데, 그 일을 철저하게 공평하게 나눌 자신이 없다면 제발 각자 집에서 쉬든지, 아니면 나가서 오순도순 밥을 사먹고 더치페이를 하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 집안에 조금씩 얘기를 하려고 한다. 여전히 '착한 인간'의 탈을 버리진 못한 채, 좋게, 좋게.


35년 가까이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결국 일을 '공평하게' 짊어진다는 건 이 땅에 사회주의의 천년 왕국을 세우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확신을 갖곤 있다. 명절이니 뭐니 다 떠나서, 무임승차자는 정말 어디에나, 어느 순간에나, 어느 집단에나 수두룩하고, '우리 일'을 '내 일'처럼 앞장서서 하는 인간은 정말 드물디 드물다. 결국 누군가 선량하고 약한 이가 묵묵히 희생되는 구조로 고착되는데, 그러니까 인간은 모이면 모일수록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루소의 말이 그렇게도 적확했던 거다.


<며느라기>를 보며, 남자 입장에서 현실 속 내 아버지와, 작품 속의 허허로운 시아버지를 탓하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지점이다. 힘을 가진 가부장들은 호칭을 공평하게, 일을 공평하게, 돈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다. 그들은 시대에 맞게 제도를 바꿀 수 있고, 버릴 수 있다. 조금만 더 민감하고, 조금만 더 단호하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의 집안 안에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


사회주의란 말이 거슬린다면, 휴머니즘적이라거나, 정의로운이라거나, 좀 더 공정하고 아름다운이라거나, 여하간 아무 말이나 갖다 붙여도 된다. 그리고 그런 유토피아를 만들라고 그들에게 권력을 준 게 가부장적인/유교적인 가족주의다. 치국(治國)보다 더 먼저 챙길 게 제가(齊家)라는 것 아닌가. 섣불리 국가의 정치를 논하기 전에, 너희 집안부터 바로세우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계속 좋은 친척, 좋은 아버지로 남고 싶다. 얼굴을 찡그린 채 오랜만에 본 친지들과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다. 바깥일들이 워낙 중대해서인지 집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껏 며칠 고생하는데 그 정돈 참을 수 있다고, 세상 뭐 그렇게 각박하게 사느냐며 심드렁하다. 그들에겐 '공평함'과 '공정함'이란 감수성이 저 먼 후순위로 밀려 있다. 그들이 그렇듯 태평하게 제삿상을 받는 순간, 유토피아는 이미 곪고 박살나 있다. 그들 자신이 만들 수 있던 훈훈한 명절이.


저 과거에 살고 있는 가부장들이 세월아 네월아 하는 동안에 어느덧 2017년이 됐고, 인천공항은 명절마다 미어터지고, 가부장제를 뿌리째 뒤흔드는 페미니즘이 도처에 유행하며, 남녀 친족 호칭의 비대칭적인 본질이 (이제서야) 쟁점화되고 있다. 그리고 어동육서의 규칙을 지켜 차린 제삿상을 받고 조상이 복을 내려주신다는 차례 제도의 기복성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냉소하며 의심해 가고 있다. (어찌 냉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모여서 함께 웃고 떠드는 일은 참 복되고 귀중하다. 결국 명절의 본질은 제삿상이 아니라 가족과 친지가 함께 나누는 잔잔한 이해와 사랑이다. 제사의 기복성을 믿던 앞선 세대들이 떠나갈수록 점점 더 그 본질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전쟁 이후 약 60년간 대한민국의 가부장제는 그 본질은 완전히 망각했다. 내 아버지와 <며느라기> 속의 시아버지, 그리고 이들을 닮은 이 땅의 많은 가부장들은 '좋은 명절'을 만들 수 없고, 나아가 절대로 '좋은 가족'을 꾸릴 수 없다. 이런 불신이야말로 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가족관계에서의 탈주를 꿈꾸는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가부장제라기보단, 누군가가 과일을 깎고 설거지를 전담하는데, 태연하게 그것을 받아먹고 뒹굴거리는 뻔뻔함이다. 어릴 때도 그런 뻔뻔함이 견딜 수 없었고, 나이가 들수록 더하다. 내가 어찌 늙어갈지 알 수 없고, 수십 년 후엔 명절마다 일가친척이 모이는 일이 지금처럼 요란하지 않을 건 분명하지만, 나와 내 아내(가 만약 생긴다면)가 집안의 어른이 된 이후엔 그런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각자 잘 먹고 잘 쉬자는 식으로 정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러고도 아직은 이런 날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고, 격려하는 일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나야말로 인간을 좋게 보려 발버둥치고, 과거의 그늘에 단단히 사로잡힌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인천공항과 더치페이가 우릴 구원할 유일한 답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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