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1 15:26
페이스북 친구분의 대문에서 가져옵니다.
지난 번에 올렸던 마루에서 뛰어내려와 손잡기와도 일맥 통하는 부분이 있겠습니다.
어느 부분 제 마음을 다스려주는 부분이 있어 나눠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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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名句]그 이면을 살피라
윗자리에 있을 적에는 아랫사람이 명분을 들어 자신을 공격하게 만들지 말고,
아랫자리에 있을 적에는 윗사람이 위엄으로 자신을 꺾게 만들지 않는다면, 처세를 잘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在上位, 無使下位攻之爲其名, 在下位, 無使上位折之爲其威, 則處世也幾矣.
재상위, 무사하위공지위기명, 재하위, 무사상위절지위기위, 즉처세야기의.
- 청성(靑城) 성대중 (成大中 : 1732~1809)「질언(質言)」『청성잡기(靑城雜記)』
[해설]
남에게 비방 듣고 꺾임 당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호인(好人)’ 소리 듣기 쉽잖은 것이 세상 살아가며 절절히 느끼는 사실이지요.
연약한 것이 사람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관계 속에서 생겨난 가슴 속 생채기를 부여잡고 속으로 울지 않습니까? 잠 못 드는 날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말없는 하늘은 청청하고 겉으로야 일 없는 척, 더한 경우는 속으로도 일 없는 척 스스로를 달래고 일어나야 하니, 세상살이 참으로 쓰기가 씀바귀 같습니다.
명분과 위엄. 정말이지 당해 낼 재간이 없지요. 맨 몸으로 받을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아랫사람이 명분을 들고 윗사람이 위엄을 내세운다는 것은 작심하고 나를 힐책하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아랫사람 혹은 윗사람이 됩니다.
그 사이에서의 번민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기실 『청성잡기』가 제시한 상황은 항용 벌어지는 일일 테지요.
우리는 흡연실 한 모퉁이, 화장실의 물방울 자국 어린 거울 앞, 사방으로 둘러싸인 파란 파티션 속, 뽀얗게 김이 서린 퇴근 무렵 버스 창가, 어느 술집 말간 소주 잔 앞에서
오늘 나를 향해 휘둘러진 명분과 위엄을 곱씹고 분개하며 숱한 날 흔들리는 자아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청성의 말이 참으로 좋으나, 이 말이 활구(活句)가 되게 하려면 그 이면을 살펴야 합니다.
아랫사람이 명분으로 공격하고 윗사람이 위엄으로 꺾는 상황이 오지 않게 하는 방도가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단박 깨쳐야지요.
우리는 대개 비방을 듣고 꺾임을 당하면 그 상황에만 집착한 나머지 사태의 본질을 올바르게 직시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분노와 억울함에 가려진 나머지 명분으로 공격해 오면 그 명분을 붙들고 늘어지고 위엄으로 꺾으면 위엄의 권위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면 싸워야 할 대상이 명확해지고 쟁론하기가 편해집니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은 언제나 제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장쟁투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녹초가 될 동안 그저 팔짱만 낀 채 지켜봅니다. 몹쓸 노릇입니다.
하지만 심호흡 한 번 하고 고요히 생각해 보면, 아랫사람이 명분을 든 것은 그것 밖에 나를 후려칠 무엇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윗사람이 위엄을 든 것은 그것 밖에 나를 누를 무엇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나움은 두려움의 자식입니다.
두려움의 태중에서 조금씩 두려움의 양식을 먹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때 박차고 세상에 나오는 아이. 그것이 사나움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를 향해 명분을 들고 위엄을 든 저들이 나를 두렵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그 두려움을 감내할 수 없게 된 순간 나에게 사나움을 토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다시 나의 두려움의 태중에 배태되어 또 다른 아랫사람,
또 다른 윗사람에게 새로운 씨앗을 뿌리겠지요. 이것의 단절. 그것이 이른바 ‘처세를 잘했다’는 것의 이면이요 요체라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요?
같은 글은 아니지만 이 글이 저 글을, 저 글이 이 글의 내용을 보충해주어 상호표리(相互表裏)가 되는 글을 호문(互文)이라 합니다.
끝으로 위에 제시한 구절의 호문이 될 만한『청성잡기』의 또 다른 글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그 기미를 살필 일입니다.
“나를 찍는 도끼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내가 남을 찍던 도끼요, 날 때리는 몽둥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내가 남 때리던 몽둥이다.
내가 남에게 해 끼칠 때에 계략이 교묘하고 술책이 치밀해도 잠깐 사이에 되려 상대방에게 이롭게 되어 내가 나를 포박하는 꼴 되니, 지혜도 용기도 아무 짝에 쓸모없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찍지 않기 바라면 먼저 내 도끼 버리고, 남이 나를 때리지 않기 바라면 먼저 내 몽둥이 버려야 한다.
남을 어찌해 보려는 마음 일소되면 온갖 해로움 다 사라지고, 나쁜 마음 한번 동하면 온갖 재앙 다 일어난다.
[伐我之斧非他,卽我伐人之斧也,制我之梃非他,卽我制人之梃也. 方其加諸人也,計非不巧,機非不密也,
毫忽之間,反爲彼利,而我若自縛以就也,智勇並無所施也. 故欲人無伐,先屛我斧,欲人無制,先捨我梃,機心一消,百害俱空,禍心一動,萬災俱熾.]”
*『청성잡기』에는 오늘날에도 경구가 될 만한 글들이 많이 실려 있어 현대인의 일상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본이 나와 있으며, 그 외 몇 종의 발췌번역본이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글쓴이 : 이승현(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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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이 살던 때에도 저런 해설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요.
해설이 없든 시간은 없다 라는 생각도 들고
있든 없든 다른 시간은 없다란 생각도 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