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도구로서의 문자의 한계

2013.02.01 21:27

egoist 조회 수:2101

제가 대학을 막 다니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아직 핸드폰이 보급이 되기 않았습니다.

어얼리 어답터들은 씨티폰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삐삐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문자나 통화라는 것이 당연히 없었습니다(어디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나이 자폭한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여하튼 그런 시절이었기에 어느 동아리방에나 그렇듯 제가 있던 동아리방에도 잡기장이 있었습니다.

대학 특성상 워낙 다들 수업시간과 스케줄이 제각각이다 보니 사람에 따라 시간표가 엇갈리면 동아리방에서 거의 마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해서 잡기장은 동아리 사람들간의 유일한 통신수단(?)이었죠.

간간히 존재하는 회의시간이나 술자리를 제외하면요.

다들 달라붙어 자기 이야기나 소소한 일과를 알리는 글을 쓰기도 하고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해서 노트 한권이 반학기도 남아나지 못했습니다.

 요즘 동아리들도 잡기장을 적극 활용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잡기장의 기능이 카톡이나 페북으로 넘어갔나요?

 

그런데 이 화목하고 평안하던 동아리에 바로 이 잡기장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둘의 이름이 받침 하나만 빼고 똑같아서 가장 먼저 친해졌고 그 이전까지 정말 사이가 좋던 저의 동기와 1년 후배, 이렇게 선후배간에 잡기장에서 싸움이 난 것입니다.

저는 마침 싸움이 벌어진 당시에는 과제전 때문이었나 열흘 정도 동아리방을 비웠었는데, 그 사이에 이미 잡기장의 싸움은 후배와 그 남자친구가 저의 동기들 대다수와 척을 지고 서로 보지 않는 사이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모르고 있다 사건이 종료되고서야 발단이 된 글들을 봤는데, 이게 제 3자로서 보기에는 참 어이가 없던 것이 문자 자체의 전달력 부족에서 비롯된 사소한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글이라는 것이 시공을 초월하게 해 주는 참 편리하고 귀중한 소통 수단인 것과는 별개로 명백하게 가지는 한계는, 직접 대화를 하는데 있어 동반되는 표정과 제스쳐, 말투 같은 것들이 전달이 안되기 때문에 결국 해당 문자를 읽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말투와 톤을 설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태여 영어를 예로 들어 송구스럽지만 영어 표현 중에 "this is it"을 보자면 this is it!!! 하고 감탄조로 말하는 경우, this is it? 하고 의문형으로 말하는 경우 뿐 아니라 망설이듯 이야기 하는 경우와 신나는 투로 이야기하는 경우, 비꼬는 투로 이야기하는 경우 등에 따라 전부 의미가 달라집니다.

결국 어떤 표정과 어떤 말투를 사용했는지 모른다면 오해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문자라는 것이죠.

심지어는 욕설조차도 만약 친구끼리 장난을 치다가 서로 깔깔거리며 "x발, 죽인다"라고 하는 것과 조폭이 심각한 톤으로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주 크게 다르잖아요.

 

다시 잡기장의 글로 돌아가서, 이 경우에도 대충 요약하자면 한명이 별 의미 없이 남긴 문구에 대해 비꼬는 것으로 오해를 한 반응이 나오고,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받아치는건 너무하지 않냐"는 내용의 글과 여기에 발끈하는 글...이런 식으로 발끈과 오해가 중첩되며 증식되다가 후배의 남자친구(역시 동아리 사람)가 끼어들어 중재를 한다는게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결국 나중에는 단어 하나하나와 웃는 얼굴 이모티콘( ^^;) 같은 것들까지 무슨 의미냐며 싸우고 있더군요.

원래부터 껄끄러운 사이였다면 모를까, 정말로 친한 사이였음에도 이 전 과정을 서로 얼굴은 전혀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한동안 진행시키고, 여기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어 싸움이 확장되고 하다가 그대로 서로 얼굴도 안보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잡기장에서만 저렇게 글을 주고받는 대신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했었다면 미소 섞인 사과 한번에 싹 녹으면서 분명 별 일 없이 풀리고 넘어갈만한 일이었고, 심지어 통화만 했더라도 풀렸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100% 확신 할 순 없지만요.

 

제가 듀게 말고도 이런 저런 게시판들을 보며 느끼는 것은, 문자라는 것이 참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특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침 신경이 날카롭거나 , 화자를 좋아하지 않거나, 그냥 기분이 나쁜 상태거나, 아님 피해망상이 있거나 등등 해서 내용을 꼬아서 보게 되면 답이 없죠.

가장 좋은 해법은 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최대한 줄이는 것, 그러니까 read between the line (우리 말에 여기에 해당하는 표현이 뭐가 있죠?)을 하지 않고 최대한 써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어떤 글의 내용이 아닌 어투가 기분이 나쁜 경우, 일단은 무조건 그런게 아닌데 내가 어투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물론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진 않습니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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