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boo님이 쓰신 깨시민이라는 조어(혹은 용법)의 천박성이 문제죠.라는 글에 대한 답변성 글입니다.


윗 글을 읽어 보니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화가 생각보다 좀 많은 것 같아서 아예 그냥 글을 써서 하나씩 답변드리고 싶었습니다.  글이 너무 넘어가서 답글 달기보다는 새로 썼구요.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잘 쓰인 글 하나를 소개하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게시판 주인이신 듀나님이 2005년에 쓴 무례함의 예술을 가르치자.라는 글입니다.


1. 깨시민이란 표현은 천박해서 문제다? (by soboo)

문제 없습니다. 일단 정치적 수사가 고급스럽다고 해서 정치 활동이 고급스러워 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듀나님도 언급하셨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고급스러운 수사가 가장 발달하는 곳이 바로 독재 정치권입니다. 전두환은 구국의 영웅이었고, 김일성 김정일은 민족의 영도자지요. 

볼 때마다 아주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칭찬합니다. 노무현이나 이명박은 그런 식의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겁니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조롱과 독설의 기술을 발달시키죠. 


역사적으로도 저열성이나 천박함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꼬기계의 지존이라고 일컬어지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겸손한 제안은 아일랜드 아동들을 요리해서 잡아먹자는 내용을 담고 있거든요. 깨어있는 시민 정도로 비꼬는건 양반이죠.

그리고 이 글이 300년을 살아남아 당시 영국에도 아일랜드의 현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오글거리는 표현을 쓰자면 영국 정치의 선진성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저열한 수사를 쓴다고 해서 정치가 저열해 진다는 보장도 전혀 없는거죠.

저열성, 천박성. 사실 그건 조롱을 하는 사람의 선택권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소극적으로 깔작대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같이 진흙탕에서 뒹굴면서 막심한 피해를 주고 싶다면 그것도 방법입니다. 

알고보면 당하는 입장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내용이 아니죠. 복서가 싸움상대에게 펀치 방향을 주문하는 형세라고나 할까요.



2. 깨시민이라는 표현은 센스가 없다? (by 게으른 냐옹)

조롱, 야유, 비꼬기. 영어로 말하자면 sarcasm이란건 영미권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서 연구해 온 하나의 장르입니다. 정치적인 입장과 상관없이 영화 평론하듯이 기계적으로 넌 잘했어 넌 못했어 평가가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한 분야란 거죠.

듀나님의 말을 빌려올까요. "무례함은 정교한 악기와 같아서 단순히 다루는 기술만 익혀서는 제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어떤 말들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왜 그 말들이 그런 상처를 주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지요. 이 예술에 통달하려면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심지어 그들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통찰력과 섬세함, 상상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능력은 전혀 없으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통쾌하게 들리는 말을 한두마디 내뱉는 수준이라면 이상배 의원처럼 됩니다."

이건 조롱을 평가하는 채점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들은 상대방이 상처를 받으면 성공이고, 저 혼자 통쾌하게 생각하다가 역공을 당하는 수준이면 대실패인거죠.
깨시민은 어느 수준이죠? 사람들이 '질색팔색'을 하고, '파르르' 떨고, '깨어있으려고 노력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찬물을 확 끼얹어서 화가 나게 만드는' 단어고, '맘에 안드는 말이니까라는 게 노골적인 속내'고 그렇죠. 
쓰는 사람만이 통쾌한 수준은 명백히 벗어났다고 볼 수 있죠. 이 정도면 상당히 센스있는 것 같은데요?


3. 깨시민이라는 조어법은 일베 식이라서 문제다?(by soboo)

이건 단순히 일베식이기 때문에 덮어놓고 안된다는 식의 논리밖에는 안되죠. 그래서 제약이 많은 곳에선 혁신이 없는 겁니다.

일베충 여러분이 듀게 깨시민분들보다 더 뛰어난 조롱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지도 모르는 겁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제가 최근에 들은 단어들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난닝구'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http://www.dailyjn.com/news/photo/201112/7056_4007_1048.jpg

이 뉴스에서 따온 단어죠. 듀게에서 많이들 쓰셨지만 전 이것도 상당히 일베스러운 작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칭찬입니다. 



4. 깨시민이라는 표현은 단어 자체에 있는 좋은 의미를 퇴색시키니까 문제다? (by 로얄밀크티)

문제 없습니다. 

사상은 표현과 별개거든요. 표현에 사상이 묶여있다고 생각한 것이 언어 결정론인데 이건 50년 전에 노엄 촘스키라는 사람이 시원하게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조롱이 단어 자체의 의미는 퇴색시킬지 몰라도 사상을 공격하지는 못하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래서 PC운동이 쓴맛을 봤죠. 미국에서는 slum을 getto로, getto를 inner city로, 그리도 마지막에는 다시 slum으로 바꾸었지만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 대한 경멸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원리로 깨시민이 조롱거리가 되더라도 깨시민 분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공격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조롱당해서 그 사상이 사장되어 버리는 사례들은 그 사상 자체가 공격당한 다음에 일어난 결과적인 일일 뿐입니다. 

민주주의가 당연하고, 시민이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번 경우에는 해당 사항 없죠. 미안하지만 깨시민이라는 단어가 조롱하는 대상은 바로 깨시민분들 그 자체죠.

(이게 싫다고 말씀하는 분들은 이응달 님 말씀처럼 아예 야유, 비꼼, 조롱 등을 일관되게 원천적으로 하지 말자고 해야죠.)

그렇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사상은 다른 표현을 통해서 전달되면 됩니다. 그래서 항상 단어들이 생겼다가 사라지죠. 공산당에서 빨갱이로, 빨갱이에서 종북주의자로 표현은 진화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굳이 누군가가 조롱질을 하지 않더라도 많이 쓰인 단어는 신선함이 사라져서 사람들은 대체제를 바라게 됩니다. 그게 인류 등장 이후 몇십만년간 우리가 언어를 소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이란 표현이 참 맘에 들고 오랫동안 쓰고 싶으셨다면 아쉬운 일이지만 떠나야 할 때가 된 겁니다. 그 표현의 위신은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프로필을 달고 고종석씨 트위터에 맹공을 퍼부을 때 사실 사라진 거죠. 

그러니까 깨시민이라고 조롱받는 바람에 부당하게 표현이 먹칠당한 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현실을 직시하셔야죠. 뒤집어서 고민해보세요. 김수환 추기경의 유언이나 김구의 어록을 어떻게 조롱할 수 있을지. 

인류 역사상 조롱을 비롯한 언어 능력들은 성 선택의 적응도 표지였죠. 언어가 유행을 타는 이유는 아마 유통기한 지난 표현들을 붙들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도태시키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표현을 찾아 떠나세요. 사람이 먼저다, 저녁이 있는 삶, 지하경제 활성화 등등. 이건 게임이죠. 사람으로 태어나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피할수 없고 무조건 참가해야 하는 게임요.

좌파세력에 배울 점이라는 칼럼에서 조선일보의 한 기자가 고백했듯이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무기는 새로운 표현으로 프레임을 선점하는 능력입니다. 철 지난 표현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지만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쉽게 놓치시는 것 하나. 

단어에 있는 좋은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 그렇게 걱정이면, 깨시민 분들이 민주주의나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가면서 뻘짓을 자행하신 것이 백배 천배 더 문제인 것 아닙니까? 그거야말로 단어의 의미를 퇴색시킨 주범 아니겠습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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