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감상

2013.01.21 17:17

영화처럼 조회 수:3031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아이들과 함께 감상했습니다.
원작 소설의 내용이 아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듯 했지만, 호평이 이어지는 뛰어난 영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예고편과 사전 정보들이 아이들도 볼 수 있을 듯 했습니다.
감상 결과 아이들은 별 무리없이 영화를 소화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작은 아이는 많이 지루해하고 좌석이 접혀지는 극장의자가 불편해서 영화에 잘 집중하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인 큰 아이는 너무 재미있었다며 만족해 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를 소화해 낸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영화를 보기 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부담스러웠던 것은 두번째 이야기 부분과 미어캣 섬의 진실, 또다른 조난자와의 조우 부분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두번째 이야기는 담담하게, 미어캣 섬의 진실은 몽환적으로 표현되었고, 또다른 조난자와의 조우는 생략되었습니다.

소설이 영화로 옮겨지면서, 활자와 영상의 차이, 시간의 제약, 감독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원작에서 상세하게 묘사되었던 부분들이 그대로 영상화되면 상당한 수준의 고어물이 될 수도 있는 터라, 어느 정도 수위 조절이 되었습니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잡아먹는 장면들은 자세한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 식으로 처리되었죠.
다양한 물고기, 거북, 새를 잡고, 처리하고, 먹는 일련의 과정이 생존의 절박함이 느껴지도록 공들여 묘사되었던 부분들은 대폭 생략되었고, 파이가 날고기를 먹는 장면은 참치를 먹는 장면만 보여집니다. 아무래도 참치회는 익숙하기 때문인 것 같네요.
소설에서 파이가 즐겨 잡았던 바다거북을 잡는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호종이어서 일까요?

영화는 소설보다 신에 대한 믿음이란 주제의 묘사에 더 주력하고 있습니다.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리차드 파커에게 신을 만나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나 고래와 해파리가 등장하는 밤바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환상적인 정경들은 소설에는 없거나 확대된 장면들입니다. 식인섬의 모습이 누워있는 비누슈 신의 모습을 한 것도 영화에서만 표현되는 부분입니다.
리처드 파커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땟목 쪽으로 헤엄쳐와 기겁하고, 호랑이가 배에 올라가지 못해 쩔쩔매고, 그 사이에 배를 뒤져 땟목을 보강하고 호랑이가 배에 올라탈 수 있게 도와주는 장면은 소설에 없는 장면인데, 소설에서 리처드 파커를 경계하며 물품함에서 하나씩 도구를 꺼내 땟목을 만드는 장면을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담아내는 데 당위성을 제공했고, 영화 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갖게 하는 효과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소설에서 파이는 동물원에서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끝까지 리처드 파커와 영역을 나눠 자신을 보호하지만, 영화에서는 굶주림에 지처 죽어가는 리처드 파커를 무릎에 누이고 쓰다듬기까지 합니다. 하찮은 인간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던 소설 속의 리처드 파커가 눈만 마주쳐도 온몸이 얼어버리는 호랑이라면, 영화 속의 리처드 파커는 좀 더 앙칼지고 좀 더 사람과 친밀한, 크고 위험한 고양이라는 느낌입니다.
수학시간에 파이 값을 칠판 가득 적어가는 장면도, 아난디와의 짧은 러브스토리도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죠. 
항해 중에 요리사와 충돌하는 장면, 구명보트에 요리사가 먼저 타고 있다 튕겨져 나가고, 리처드 파커가 헤엄쳐서 구명보트에 오르는 장면도 원작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영화에선 두번째 이야기의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영화의 3D효과는 이제껏 봤던 영화들 중 최고였습니다. (휴고는 3D로 보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레이어를 겹친 수준이 아니라 원근감이 실감나게 표현되었고, 피사체가 아닌 배경까지도 앞쪽의 바다와 뒤쪽의 바다가 입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코앞까지 접근하는 동물들이나 심연까지 가라앉는 바닷속 장면, 배멀미를 느끼게 할만한 폭풍우 장면, 피신 몰리토 수영장의 장면 등 경탄스러운 시각적 체험을 제공했습니다.

소설에서는 마지막 부분의 반전의 충격이 엄청났었는데, 영화에서 느껴지는 반전은 약간 당황스러운 정도였습니다.
소설에 비해 표류 생활의 비중이 크게 줄어들고 묘사가 단순화되면서 환상적인 영상이 더해져 판타지의 성격이 강화됨에 따라 표류의 치열한 위태로움이 희석되었기 때문인 듯 하네요. 그래서 보다 가족영화에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예고편 영상들도 그렇게 타겟팅 한 것 같고.

결국, 파이는 가족을 모두 잃고 277일 동안 지옥같은 표류를 이겨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며 그를 지탱하게 한 건 리차드 파커로 표현되는 내면의 강함이었고, 그 과정에서 파이는 영존하는 신의 섭리와 조우합니다. 
과연 그가 건너온 지옥의 진실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얼마나 중요할까요?
저도 리처드 파커가 나오는 이야기가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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