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라다크라는 작은 마을이 세계화의 물결, 혹은 물질주의에 함몰되는 과정을 그린 사회학 서적인데요. 처음 나온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요즘 읽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도시화, 핵가족화, 지역 공동체의 붕괴에는 주거 양식이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여 서있던 골목이 사라지고 빌라촌이며 아파트가 산업화의 상징 혹은 도시화의 첨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는 옆집 사람과 눈인사를 하고 지내기는 해도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가족이 몇인지, 요즘 고민이 무언지까지는 알지를 못하죠. 그리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세대차이가 있겠지만 제가 자라던 시절에는 아파트라는 것이 생소했고 동네 사람들은 대강 사는 사정을 알고 지냈죠. 대부분 가난했고 먹고 입고 쓰는 것들이 풍요롭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은 술도 많이 드시고 싸움도 많이 했지만 어려운 집 아이들은 동네 어른들이 지나가며 용돈이라도 조금씩 쥐어주곤 했습니다. 옆집 사는 아저씨가 아니라 옆집 순돌이 아빠 누구였죠. 하지만 요즘에 누가 그런 관심을 보인다면 기쁘기보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겠죠. 시대가 변했습니다.

 

힘을 모아 달려가자는 시대 정신은 나 하나만 아니면 된다는 개인주의로 바뀌었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생존 방법이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익명성이라는 괴물을 태동시킵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니 가장 선정적이고 날카로운 말로 찔러놓고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특히나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상대방의 얼굴도 인격도 정체도 알 필요가 없으니 더욱 좋지요. 아다르고 어다른게 말인데.. 전화로 해도 표정이 보이지 않으면 오해와 지레짐작이 난무하는 의사소통에서 글 한줄 가지고 상대방의 의중을 지레 짐작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익명성에 기대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화를 내고 분노하고 심지어 타인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수도 있습니다. 전혀 죄책감없이 말이죠.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확신과 남의 말을 교묘하게 비틀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아니다 싶으면 사라지는 뻔뻔함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익명성의 시대라 해도 스스로가 뱉은 말의 궤적, 글의 흔적은 어디엔가 남아 있습니다. 다 지우고 떠날수 있는 것 같지만 스스로에게라도 그 흔적은 남겠지요. 그리고 영향을 미치게 될겁니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가끔씩 떠올리며 마음이 무너집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선하기야 하겠습니까? 말썽도 부리고 알게 모르게 나쁜 짓을 하는 아이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시스템이었다면 그렇게 생매장되듯이 죽어갈 아이들은 아닙니다. 아니죠. 아이들만이 아니라 세월호에서 스러져간 모든 생명들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월호를 둘러싼 문제들은 원흉으로 지목된 사람의 죽음으로 갈무리되어 갈 것 처럼 보입니다. 익명성에 기대어 이 시스템을 만들고 어떻게든 엮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은 심정입니다. 너와 너의 자녀와 너의 후손들이 영원히 저주받고 죽어서도 안식을 구하지 못하리라고 말이죠.

 

세상의 반이 악인이라 해도 나머지 반은 평범한 좋은 사람들일겁니다. 우리는 모두 남들의 호의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스스로도 작은 호의를 베풀기도 하구요.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고 무조건 착하기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악인이기도 선인이기도 하지요. 이 게시판에서도 그런 묘한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그건 사람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해요. 익명성의 시대지만 좋은 사람들 또한 그 익명성에 기대어 좋은 일들을 합니다.

 

"작은 집 큰 생각"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 똘이가 죽고나니 사이좋게 지내던 오리 뽀리도 며칠만에 죽어버리는 장면이 마음을 먹먹하게 하더군요. 애완동물을 키울때 가장 힘든게 그런 것 같습니다. 생명의 빈자리는 사람이던 반려동물이던 같은 무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구요.

 

어찌보면 요즘처럼 사람의 목숨이 함부로 다뤄지는 때도 없는 것 같지만..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말이 길었는데.. 게시판에 글쓸때만이라도 화면 너머에 나처럼 살아 숨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좀 기억했으면 싶어서 졸필을 남깁니다.

 

마음 따뜻한 하루 되시길. 저녁에는 녹두전에 막걸리나 한사발 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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