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젠 정말 어떻게 핑계를 대도 젊은 축에는 못 넣어줄 나이가 된 탓인지.

예전의 저에 비해 '독한' 영화들보단 좀 온화한 성향의 영화들을 선호하게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특히 작가가 자기가 만든 인물들에게 정말 일말의 자비심도 없어 보이는 류의 영화들을 보고 나면 재밌게 잘 보고도 뭔가 내내 찝찝하고 아쉬워져요.

그런데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본 이 두 영화는 그와 반대로 등장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철철 넘치는 게 막 느껴지는 것 같아서 참으로 훈훈한 맘으로 즐겼습니다.

사실 두 영화 모두, 그리고 특히 '우리들'의 경우엔 훈훈함과는 격하게 거리가 먼 영화이긴 합니다만. 뭐 일단 그런 셈 치고요(...)


그리고 보통 비평가들의 환호를 받지만 개봉관을 잡지 못 해 소수에게만 극찬을 받으며 사라져가는 영화들을 챙겨 보다 보면 '재밌고 괜찮긴 한데 그래도 왠지 이런 소수 취향 영화 보호를 위해 비평가들이 맘 좀 크게 썼군' 이라는 느낌이 들거나. 아님 '정말 좋은 영화이긴 한데 기대보다 재미는 좀 별로로군?' 같은 감상이 남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영화는 둘 다 그냥 재밌었어요. 그래서 참 좋았습니다.



2.


'족구왕'은 사실 좀 난감한 구석이 있는 영홥니다.


"인생 짧고 젊음은 아름답단다. 그 좋은 시절 낭비하지 말고 재밌는 거 하며 즐기고 살자."


대충 이렇게 요약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데 말입니다. 이거 사실 꼰대질이잖아요?(...)

이런 건 당사자가 이것저것 다 겪어 보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일이지 남이 뭐라 뭐라 훈계하고 가르치려 들 일은 아니죠.

실제로 영화 속 주인공이나 등장 인물들의 영화 속 사건 이후의 삶을 상상해 보면 더욱 그래요. 영화 속 이벤트 한 번으로 만족하고 끝낸다면야 별 문제 없겠지만 계속 저런 스피릿으로 산다면 나중에 어디 입에 풀칠이나 하겠습니까. 막판에 설명되는 주인공의 그 스피릿의 동기(...)를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덕에 참 낭만적이긴 한데. 그것 때문에 주장의 설득력은 더 떨어지죠. 그러니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어여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십... (쿨럭;)


그런데 그런 어설픈 메시지가 별로 어설프게 느껴지지 않고 팍팍 와닿습니다.

그게 왜 그런지 잘 설명은 못 하겠는데. 혼자서 한참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이제 내가 늙어서.' 였습니다. ㅋㅋㅋㅋㅋ


아니 그냥 막 부러운 겁니다.

도대체 저런 쓸 데 없는 일에 저렇게 쓸 데 없는 시간과 노력을 퍼부어서 저렇게 고퀄로 완성해내는 쓸 데 없음이라니!!

라고 생각하다 보니 제가 영화 속 주인공 또래였을 때도 종목은 다르지만 대체로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참으로 오랜만에 깨닫게 되는 거죠.

그렇게 쓸 데 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처박던 그 시절의 공기와 기분, 감정 같은 것들이 마음 속에서 순간적으로 되살아나서 클라이막스에선 거의 눈물이 흐를 뻔(...)

다만 이 영화 속 주인공들과 비슷한 상황,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들이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그게 좀 궁금해지긴 하더군요. 사실 참 배부른 소리잖아요 저거.


암튼 뭐 이런 개인적인 감흥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의도된 촌스러움과 의도된 유치함을 컨셉으로 하는 영화는 정말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그냥 정말 촌스럽고 유치한 영화가 되기 쉬운데 그런 부분을 참 잘 조절했던 것 같고.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다 정이 가고 사랑스러워서 그냥 막 좋게 보고 좋게 얘기해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ㅋㅋㅋ

그리고 참 예쁘고 보기 좋은 장면들이 많아요. 상영 시간 내내 미소를 띄고 좋은 기분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 주인공 역할의 안재홍은 응답하라 1988 덕에 꽤 인기인이 되었고 여주인공 황승언은 맥심 화보(...)로 역시 나름 유명해져서 snl에 나와 몸매 자랑으로 이름도 알리고 먹고 살기도 했고 그렇습니다만. 여기 나오는 전직 축구 선수 역할의 배우는 최근 국정 농단 사건 덕분에 유명해졌죠. 정윤회씨 아들이라고(...)



3.


제 밥벌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라서 아주 약간은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들은 물론이고 그에 따른 주인공들의 반응과 감정들. 그리고 그걸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 디테일들까지 거의 다큐멘터리 수준이에요.

그래서 정말 답답 먹먹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영화를 보게 되더라구요. 제겐 근 몇 년간 본 영화들 중 최고의 스릴러 무비였습니다. ㅋㅋㅋ 후반 30분은 정말 아우...;;


영화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하나 하나 뜯어 보면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측면에서 보면 흔하디 흔한 어린 여학생들의 친구 관계 트러블 이야기일 뿐이고.

그 외의 뭐 촬영이나 영상미나 음악이나 기타 등등 어딜 봐도 '특이한' 구석은 없어요. 다만 그냥 그 모든 게 굉장히 훌륭합니다. ㅋㅋ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 하겠네요. 걍 훌륭해요.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다른 감상들을 봐도 모두가 지적하듯이) 연기 지도겠죠.

내용상 어린애들이 잔뜩 나오는 영화인데 '모두 다' 연기를 잘 합니다. 주인공 둘은 물론이고 몇몇 조연들과 얼굴 안 보이는 목소리들조차 연기를 잘 해요(...)

도대체 애들에게 뭔 짓을 한 건가 궁금해서 감독 인터뷰를 찾아 봤더니 촬영 전 리허설과 면담을 통해 준비는 최대한 많이 해놓고 실제 촬영 상황에선 극중 상황만 던져 주고 배우들에게 재량을 많이 줬다더군요. 흠. 말로는 쉽지만 그래도 이걸 이 정도로 해 내서 이런 결과물을 뽑아내다니 참 훌륭한 사람인 것 같구요.


또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건 감독이 캐릭터들을 그려내는 방식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주인공 선이는 말 그대로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주로 당하고 사는 피해자의 입장이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착하지는 않아요. 꾸준히 실수를 저지르고 자기도 좀 살아 보고자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며 그 와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 놓고 자신의 처지에만 감정 이입을 해서 슬퍼하고 억울해하죠. 그런 모습들을 상당히 담담하게 보여주고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악당 역할을 맡고 있는 보라라는 아이를 다룰 땐 '아. 나름 얘도 깝깝한 사연이 있겠구나...' 라고 생각할 여지를 살짝 부여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아이의 행동에 면죄부를 주진 않습니다. 뻔한 이야기와 뻔한 상황에 처한 뻔한 캐릭터들이지만 그걸 그냥 양식화해버리진 않는 거죠. 그래서 이런 이야기의 흔한 가해자/피해자 캐릭터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다 그냥 살아 있는 현실 세계의 아이들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선이의 엄마와 담임 교사. 다 상당히 괜찮은 사람들이고 자식/학생에게 관심도 많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 합니다. 이런 게 정말 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정말로 그렇거든요. 아무리 선의와 관심을 가진 주변 어른이라고 해도 애들에겐 자기들끼리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거죠.


이렇게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인물들 하나 하나가 다 살아 있는 사람 같단 느낌이 들고 정이 갑니다. (아니 사실 보라는 정이 가는 것까진 아니긴 하지만...;)

그래서 어찌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는 이 영화 속 이야기에 그렇게 몰입이 되고 감정 이입이 되고 그랬던 거겠죠.


음... 사실 결말에 대해서도 주저리 주저리 할 말이 많은데.

이 글은 안 보신 분들 좀 챙겨 보시라고 영업하고픈 맘에서 쓰는 글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는 끝까지 참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


암튼 많이들 보셨으면 하는 맘이 드는 좋은 영화였네요.

특히 여성분들은 보면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성분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냥 잘 만든 영화'라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이 어린 배우들이 뭐하고 사나 싶어서 검색을 해 봤는데 이후로 작품이 하나도 없군요. 도대체 왜!!!

 그러고 보면 작년은 어른들 영화제에서 큰 상을 줘도 충분할만한 연기를 보인 어린 배우들이 참 많았던 해였습니다. '곡성', '탐정 홍길동'에 이 영화까지요. 개인적으론 '탐정 홍길동'의 말순이가 갑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 영화까지 보고 나니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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