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첫인상)

2017.08.16 17:30

여은성 조회 수:779


 #.어느날 찻집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눴어요. '호날두 저 녀석, 정말 대단해지지 않았어?'라고 친구가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대답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호날두를 볼 때마다 헛다리를 짚던 비쩍 마른 소년을 보지. 그가 아무리 대단해져도 말야.'라고요.


 친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어요. 우리에게 호날두는 언제나 처음 봤을 때의 그 소년으로 남아 있을 거라는 걸요. 우리에게 호날두는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돌파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던, 포르투갈에서 온 유망주 소년일 거라는 걸 말이죠.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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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어느날의 이야기는 보통 꽤 과거의 얘기지만...오늘은 오늘의 얘기예요.



 2.저번에 썼듯이, 고용한 여자와 애나벨2를 봤어요. 닉네임은 밴시라고 해 두죠. 일전엔 돈을 주고 구했다고 했지만...엄밀히 말하면 이건 틀린 말이예요. 왜냐면 아직 지불이 안 됐거든요. 돈을 준다는 건 명시된 금액을 현금으로 건넨다는 뜻은 아니니까요.(아주 가끔 그럴 때도 있지만) 내 기분에 따라, 상대가 원하는 지불의 형태에 따라 고무줄처럼 바뀌어요. 실물을 사는 걸로 지불할 때는 비교적 적고 그녀의 가게에 가 주는 걸로 지불할 때는 꽤 많아지죠. 


 밴시는 내게 늘 특별했어요. 밴시가 특별하다기보다는, 밴시를 만났던 시기가요. 내가 아직 아팠던 시절에 본 여자니까요. 그 시기에 본 사람들 중 남아있는 사람은 이제 밴시 뿐이예요. 내가 힘들게 지냈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이라 계속 특별하게 여겨왔어요.

 

 어쨌든 밴시를 불러냈으니 다른 사람을 불러낸 것보다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어요. 밴시가 어지간히 큰 걸 불러도 그냥 들어 주기로 마음먹고 있었어요. 밴시가 원할 때 가게에 3번 와달라거나...그에 준하는 현물 정도까지는요.


 

 3.애나벨을 보고 밴시가 식사와 술은 자기가 내겠다고 했어요. 내 마음은 너무 기뻐졌다가...1초 뒤 가라앉았어요. 밴시가 식사와 술을 그냥 자신이 낼 리가 없으니까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어요. 밴시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오늘은 좀 심각한 얘기가 있어.'라고 말했어요.


 '그야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며 어떤 종류의 말인지 물어봤어요. 밴시는 '우리 같이 장사 해보지 않을래?'라고 운을 뗐어요.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이해했어요.


 '우리 장사 같이 해보지 않을래?'는 '가게를 새로 차리고 싶으니까 돈 좀 대줘.'라는 뜻이라는 걸요. 다른 인간이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시전했다면 이 시점에서 정색+쌍욕콤보가 나왔을 거예요. 이런 말을 할 거라면 상대 앞에 납작 엎드려야죠.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당당함도 뭐도 아닌 그냥 무례한 거예요.


 

 4.휴.



 5.하지만 상대가 밴시니까 그냥 넘겼어요.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어요. 생각하기에 따라 이건 꼭 나쁜 일 같지는 않아서요. 밴시의 가게에 투자해 주면 밴시와의 관계에서 레버리지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요. 돈을 버는 게 목적이면 술집이든 음식점이든 남의 가게에 투자할 일은 없죠.


 그리고 밴시는 다시 한 번 나를 실망시켰어요. 빌어먹을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탐앤탐스로 나를 데려갔어요. 여기서 밴시와 나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잖아요. 나는 투자자고 밴시는 투자 설명회를 연 사람인 거죠. 상대를 위해 돈을 굴려주는 슈퍼을들은 목에 힘주고 살아요. 하지만 그들조차도 남의 돈을 끌어올 때는 제대로 된 곳에서 접대를 하는데 장사 밑천을 대달라는 사람이 탐앤탐스로 나를 데려간다...이 상황이 슬슬 열받기 시작했어요. 옆자리 앞자리 뒷자리에서 빌어먹을 놈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내 신경을 마구 긁어댔어요. 내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보고 밴시는 기분이 나쁘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대답했어요.


 '나는 지금 이딴 곳에서 이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분이 나빠.'


 이 말을 들은 밴시의 기분이 나빠진 걸 알 수 있었어요. 아마 밴시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지금의 나였다면 밴시는 이런 걸 문제삼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밴시에게 익숙한 버전의 나는 지금 버전이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의 버전이기 때문에...밴시는 지금의 나에게 익숙하지 않아요.



 6.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어요. 내가 살 테니 근처의 괜찮은 곳으로 가자고요. 밴시가 자신의 사업 계획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나의 신경이 건드려지지 않을 조용하고 아늑한 곳으로 말이죠. 


 그렇게 내 돈을 써가면서 밴시에게 사업 계획을 설명할 기회를 줬어요. 그리고 아마도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한번만 더 신경이 건드려지면 밴시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밴시는 술을 홀짝거리다가 입을 삐죽거리며 '오늘 널 괜히 만났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바로 일어나 가게를 나왔어요. 



 7.밴시는 나에게 종종 말하곤 했어요. 넌 갈수록 점점 재수없는 사람이 되어간다고요. 그러나 아니예요. 나는 재수없는 사람이 되어간 게 아니라, 아팠다가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거였거든요. 밴시가 처음 만났을 때의 내가 가장 원래의 나에서 멀었던 시기인 거죠.


 언젠가 모임의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모임에서 약간 틱틱거려서요. 그래서 '지금 이 차 안에서 가장 싸가지없는 사람은 바로 나야.'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이해관계가 없는 너희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싸가지있는 사람을 열심히 연기중인 거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너희들도 연기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진짜로 싸가지없는 버전의 나를 한번 보게 될 거라고요.


 '싸가지가 없다는 게 자랑인 건가?'라고 한다면 그런 뜻은 아니예요. 다만 나는 전에 썼듯이 인간관계가 없어요. 놀 때도 돈벌 때도 누군가의 발목을 잡지도 잡히지도 않죠.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않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굴 이유가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밴시 주위의 남자들은 전문직이든 사업가든, 인간관계가 있어요. 인간관계가 있는 그들이 친절하게 구는 건 얻고 싶은 게 있어서이고 재수없게 굴지 않는 건 재수없게 굴면 피해를 입기 때문이예요. 


 한데 나는 인간관계가 없으니까요. 인간관계가 없으면 친절하게 굴어봐야 어차피 공짜 호의를 얻을 것도 없고, 재수없게 굴어봐야 내게 손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귀찮게 친절을 가장할 필요가 없어요. 친절한 태도를 가장해서 얻어지는 이점이 전혀 없으니까 그럴 이유가 없죠. 하지만 밴시는 나를 만난 타이밍이 좀 이상해서, 나의 그 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냥 내가 재수없어져 가는 걸로만 보이겠죠.


 여기서 말하는 '재수없는'은 무슨 나쁜 짓을 한다는 게 아니라 생각을 정제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말한다는 뜻이예요. 그게 다예요. 오해를 살까봐 써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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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어제-오늘은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어요. 호날두가 아무리 대단해져도,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우리에겐 실속없고 화려한 기술을 구사하는 걸 즐기던 그 소년일 거라는 대화요. 


 밴시에게 있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유약하고, 술을 마시다가도 군대에 끌려갈까봐 우울해하던 그 청년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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