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0 16:23
오후만 있던 날의 커피
취업준비생 이철희의 커피이야기
조원진 듣고 쓰다
곰을 만나는 일을 생각해본다. 책에서 본 것처럼 죽은 척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미 몸속의 모든 피는 심장 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치게 될 경우 출혈을 최소화해야한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처음 증상이 찾아왔을 때를, 그는 곰을 만난 상황에 비유했다. 무조건 집으로 향해야 했다고, 일찍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고 일어나자마자 삼계탕을 사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좋아질 것 같았던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 같은 증세로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꿈을 꾼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몸을 일으키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허정허정 걸어 집으로 돌아왔고, 몇 번의 같은 일이 있은 후에야 그는 자신이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커피를 마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가끔씩 꿈을 꾼다고 한다. 배설물이 묻은 꼬리를 흔드는 소가 좁은 길목을 가로막고 있으면, 박자를 맞춰 피해가야 했던 무더운 바라나시의 시장통이었다. 갠지스강을 따라 게토처럼 어지럽게 자리 잡은 도시를 걷다보면 새카만 코딱지가 묻어나오기도 했었다. 무엇이라도 마셔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던 그 때, 그는 시장 길 끝에서 카페를 만났다. 그 카페에서 내어준 것은 분명 ‘꾸정물’ 같은 커피였다. 설탕을 넣어 마시면 설탕을 넣은 ‘꾸정물’ 맛이 났다. 하지만 먼지에 뒤덮인 더위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시원한 그 커피를 마셔야만 했다. 이상하게 오랜시간이 지나도 그 ‘꾸정물 커피’는 잊혀지지 않았다. 바라나시에 머무는 동안에 매일같이 그곳을 찾았다고, 일기도 쓰고 여행 중에 만난 친구를 데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그는 23살에 떠났던 인도여행에서 마셨던 그 커피를 아주 가끔 꿈에서 만나곤 한다. 아직도 그의 커피는 바라나시의 한낮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여행 후에 그가 만났던 커피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출근 전에 한 잔, 점심식사 후에 한 잔. 상경 후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그는 하루를 버티기 위해 두 잔의 커피를 마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은 곧잘 했다. 배울 것도 많았고, 인턴에게는 무리다 싶은 중책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직원이 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기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허탈한 마음에 내려간 본가에서는 어떤 위로도 받지 못했다. 네가 잘한 것보다, 못한 것들을 생각하라는 주변의 말들이 미웠다. 불합리적인 불안이 그를 감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면도를 하다가도 덜컥 찾아오는 공포에 그는 매일같이 습관적으로 마시던 커피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수개월을 치료에 집중했고, 몸과 마음을 단단히 하려고 부단한 하루를 보냈다. 아프고나니 욕심이 줄었고, 당장에 찾아온 기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만 있는 것 같은 주말에는 자취방 앞 카페를 찾았다. 아이스 커피를 시켜 테라스에 앉으면 바라나시의 한낮을 생각할 수 있었다. 취업준비를 할 때도,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 맞은 휴일에도 그는 오후의 여유로움을 즐기기 위해 바라나시에서의 커피를 생각하며 그곳을 찾았다. 공황장애를 겪고 나서는 초콜렛 음료를 주로 마시지만, 여행에서의 커피가 코끝을 찡끗하게 할 때가 종종 생각나 커피를 마시는 날도 꽤 있다. ‘두려움은 가장 하찮은 감정이다. 지금이라도 네 인생을 살아라.’ 오드리햅번이 등장하는 지하철역의 광고 카피를 마주했던 때는 카페에서의 오후가 줄어들고 있던 어느 봄날이었다. 큰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찾은 일터에서 그는 문득 머지않은 미래에 똑같은 두려움을 마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사표를 내밀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온 그의 책상에는 아직 커피가 없다. 자유롭고 걱정 없던 바라나시의 그 ‘꾸정물 커피’가 생각날 때가 있지만, 아직 그에겐 그 한잔을 즐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잠이 부족하면 커피를 마셨고, 즐거움이 없으면 술을 마셨다. 그래도 건강해야지 않겠냐며 숨이 가쁠 정도로 운동을 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으니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 뭐든 필요이상으로 했다. 아플 수밖에 없는 지난날이었다. 걱정이 없지는 않은 백수의 날이지만, 이제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가뿐하다. 하루 종일 이력서에 파묻혀 살면서도 두려움이 크지는 않다. “2샷을 넣으면 머리가 아파요. 딱 1샷, 그리고 사계절 내내 아이스로만 먹어요.” 커피 취향을 묻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다. 커피를 시켜놓고 한적한 오후를 즐겼던 여행지의 하루를 기억하며,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미래를 생각한다. 앞으로 다시 마주할 한 잔의 커피는, 바라나시의 어지러운 골목길에서 만난 커피보다 더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는 이야기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