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2018.03.21 00:50

정리 조회 수:1205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왔습니다. 얼마 전 듀게에서도 이 모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있어 여러가지로 의견이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저에겐 영화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더군요.


꽤 오래 전 일인데, 제가 가고 싶던 공연이 매진이라 그 가수의 팬 커뮤니티에서 티켓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동행이 못 가게 되어 한 장 양도한다고요. 저에게 티켓을 양도하기로 한 분은 저와 동갑인 남자였는데 공연 직전에 만나서 자연스럽게 공연을 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보던 중 제가 여자 중에서도 키가 작아서 자꾸 까치발을 들고 무대를 기웃거리는 걸 그 친구가 보고는 갑자기 공연장 밖으로 나가더니 두꺼운 책을 몇 권 가져오더라고요. 바닥에 깔고 서서 보라면서요. 공연장에 흔히 비치되어 있을 법한 전단지나 얇은 잡지가 아니라 공연장 사무실 직원 책상에서 슬쩍 해온 게 분명한 그런 책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정말 너무 놀랐는데 저에 대한 온전한 호의로 가져온 거라 그 자리에서 아니 남의 물건을 이렇게 함부로 가져오시면 어떡해요?”라고 거절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책을 가지고 돌아온 그 친구 표정은 제가 당연히 기뻐할 거라고 기대하는 얼굴이었고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최대한의 임기응변을 발휘해 바닥에 책을 깔고 그날 공연의 전단지를 그 위에 덮은 뒤에 올라가서 공연을 봤답니다. 그 이후론 공연에 집중을 좀 못했던 것 같아요. 방금 있었던 일의 충격도 꽤 컸던 데다 책 몇 권을 쌓고 그 위에 올라서면 물리적으로 꽤 불안정하기도 하고요.  


공연이 끝난 후 그 친구는 티켓 값 대신에 저녁을 사달라고 했고 저도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제 주변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사람이어서 궁금했던 것 같아요.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음악이란 걸 듣기 시작한 계기가 국민학교 고학년 때 남의 차 문을 따고 이런 저런 걸 훔치곤 했었는데 그때 처음 카세트 테이프라는 걸 손에 넣으면서였다고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거의 집을 나와 생활했고 고1 때부터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했고요. 어린 시절엔 펑크록에 미쳐서 피어싱도 엄청 하고 머리도 막 세우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다른 음악들이 더 좋아졌다고도 했습니다. 제 눈엔 여전히 그 친구의 옷이 펑크 스타일로 보여서 좀 웃었네요. 돈을 벌기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는데 최근엔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왜 사는지가 궁금해졌다고 했어요. 생각을 하다 보니 살아갈 이유를 못 찾겠어서 자살을 시도했는데 잘 안됐고 그럼 어떡할까 하다가 절에 들어가기로 하고 집을 다 정리했대요. 곧 있으면 절에 갈 건데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가수 공연을 보러 왔다고요.


그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당연히 제 얘기도 어느 정도 하게 되었는데 사실 저는 그저 평범한 외모에 보통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인데 저를 너무나 대단한 사람으로 대해주더라고요. 자기는 너처럼 멋진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그게 되게 입에 발린 말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약간 슬퍼졌어요. 제 주변 기준으로는 제가 너무 평범한데 그 친구 주변엔 이 정도 학력자본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고 그런 사람이 진짜 드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러고 지금 저는 앞날이 캄캄한 백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ㅎㅎㅎ)


그 친구는 그 날 저와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고 저랑 친해지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저는 음뭐랄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날까지 그랬듯이 그날 이후로도 제 삶의 바운더리 안에는 이 친구 같은, 그리고 헤일리와 무니 모녀 같은 사람이 들어온 적이 없어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면서, 그 안에서 헤일리와 무니 모녀를 대하는 윌렘 데포 캐릭터를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그 친구로부터 한 번 연락이 온 적 있어요. 진짜로 산에 들어가서 절에서 지내고 있다고요. 머리를 빡빡 밀고 회색 법복을 입고 웃고 있는 사진이 첨부된 문자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답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주 가끔 그 친구 생각이 날 때가 있고 그때마다 부디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기를 기도하게 되네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0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6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11
125982 리플리에서 일 마티노 지 보고 마침 이강인 기사 daviddain 2024.04.13 125
125981 프레임드 #764 [6] Lunagazer 2024.04.13 47
125980 2024 코첼라 시작 [4] 스누피커피 2024.04.13 277
125979 칼라판 고지라 - 아마도 고지라 최고의 흑역사? [6] 돌도끼 2024.04.13 213
125978 넷플릭스 [리플리] [11] thoma 2024.04.13 331
125977 Eleanor Coppola 1936 - 2024 R.I,P, [1] 조성용 2024.04.13 143
125976 #기생수더그레이 6화까지 다보고..유스포 [5] 라인하르트012 2024.04.13 393
125975 [웨이브바낭] 알뜰 살뜰 인디 아마추어 하이스트물, '터보 콜라' 잡담입니다 로이배티 2024.04.13 116
125974 [KBS1 독립영화관] 교토에서 온 편지 [2] underground 2024.04.12 227
125973 프레임드 #763 [4] Lunagazer 2024.04.12 53
125972 넷플릭스 시리즈 종말의 바보 공식 예고편(이사카 코타로 원작, 안은진 유아인 등 출연) [2] 상수 2024.04.12 289
125971 칼 드레이어의 위대한 걸작 <게르트루드>를 초강추해드려요. ^^ (4월 13일 오후 4시 30분 서울아트시네마 마지막 상영) [2] crumley 2024.04.12 138
125970 '스픽 노 이블' 리메이크 예고편 [4] LadyBird 2024.04.12 197
125969 리플리 4회까지 본 잡담 [3] daviddain 2024.04.12 216
125968 란티모스 신작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 티저,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놀란영화 12편 순위매기기 상수 2024.04.11 187
125967 [왓챠바낭] '디 워'를 보고 싶었는데 없어서 말입니다. '라스트 갓파더' 잡담입니다 [13] 로이배티 2024.04.11 325
125966 프레임드 #762 [4] Lunagazer 2024.04.11 56
125965 스폰지밥 무비: 핑핑이 구출 대작전 (2020) catgotmy 2024.04.11 89
125964 총선 결과 이모저모 [22] Sonny 2024.04.11 1368
125963 오타니 미 연방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 [9] daviddain 2024.04.11 40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