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2012.09.19 21:17

에아렌딜 조회 수:2645

1.
고국에 계신, 혹은 또다른 타향에 계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억하는 분은 없으실 것 같지만 저는 일본 큐슈의 아소 지방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계신 곳은 날씨 어떠십니까?
여기는 아주아주 시원합니다. 아니, 좀 추울 정도입니다.
아소산이 있는 고지대인 탓인지 바람이 매우 차갑습니다.
시원해서 좋네요. 벌써부터 바람이 짜릿한 느낌이 듭니다. 햇살은 아직 뜨겁습니다만 구름이 많은 땅이라 참 좋은 날씨입니다. 더위에 지치신 분은 놀러오세요.
TV는커녕 신문도 거의 읽지 않고, 인터넷도 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뭐 굳이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지만... 원래 미디어에 크게 관심이 없네요) 날씨를 비롯, 국내, 국외, 국제 정세엔 까막눈입니다. 한국은 아직 더운가요.

2. 
이곳 사람들은 쾌활하고 친절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처음에는 좀 데면데면한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웬만하면 다 웃으며 인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같아서는 만나는 사람 모두를 꼭 껴안아주고 싶을 지경입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다 저보다 한참 연상이시라는 게 함정... 가끔 우울증이 도져서 하루 종일 눈물 그렁그렁한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회사 자체는 적자경영이기 때문에 그 부분은 실로 통탄스럽습니다만(천장에서 물이 새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닌데도 오너가 돈이 없다고 수리를 안 해줍니다... 비용을 아낀다고 사무실 안은 냉방도 해주지 않고... 기타 등등)... 그래도 누구 하나 크게 불평을 말하거나 분위기가 침울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모두 미소를 잃지 않고, 가끔씩 농담을 말하거나 하면서 크게 웃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한번은 제가 파리가 자꾸 다가와서 팔을 휘휘 젓고 있었는데, 때마침 직원분이 들어와서 '춤추고 있어?' 라고 물어서 웃었습니다. ㅋㅋ 정말 춤추는 것처럼 보였겠구나 하면서.

새삼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웃는 얼굴이었다고. 태어나서 이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있을 수 있던 곳이 얼마나 되었던지요. 이곳에 오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보고 웃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바보같은 질문에도 화내지 않고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마음이 따뜻합니다. 처음에는 바보같은 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은 바보같이 굴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깨에 힘이 빠진 기분이네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아마 나라에 따라 스테레오 타입(by 코선생님)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의 멘탈이랄지, 기본 마인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대체로 남에게 심한 말을 못하고 배려하는 습성이 붙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말하는 사람은 제대로 말합니다. 하하. 그래도 대체로 상냥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끔 손님과 전화 응대를 하면서 상대가 손님인지 내가 손님인지 헷갈릴 만큼 정중한 응대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괜히 제가 몸둘 바를 몰라서 굽신굽신하게 되네요. 허허허.


3.
국내외 정세라고 하니까 그런데, 요즘 일본과 독도 문제로 마찰이 있다지요. 저는 몰랐습니다만 여기의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더군요.
그런데 뭐 미디어에는 떠들석한 것 같아도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은 사실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뭐 한국도 마찬가지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여기 분들에게 물어봤더니, 일본 사람들은 역사를 배우지 않는다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 시간에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정당성(신라 시대에 이사부 장군이었나 하는 분이 건너갔다거나 하는 등등)을 배웁니다만, 일본은 그런 게 없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에 불리한 역사는 배우지 않는다'는군요... 
아마 일본 사람들의 멘탈에 자국의 역사를 배우면 심한 자괴감을 줄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만... 어쨌든 일본 위정자들은 그런 면에서 심히 좋지 않군요. 과거를 무작정 숨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닐 텐데.
그런 쪽에 관심이 있는 일본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자국이 저지른 참혹한 전쟁의 실태를 조금쯤 알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데 흥미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뱀발로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젊은 시절 영국이었나, 홈스테이를 갔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분이 오는데 너는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네요. 왜냐고 물었더니 그 친척분이 전쟁이 났었을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겠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도 지금은 일본에 와 있으면서 일본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역사와 문화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막말로 우리가 우리 역사를, 뿌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일본 치하에서 일본인이 되건 무엇이 되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힘겹게 독립을 하면서 지켜낸 문화인데 지금의 우리는 그 문화를 소중히 하고 있는 걸까요.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있지만 그만큼이나 우리말, 한글에 대해서 곧잘 생각해보곤 합니다. 자국의 언어야말로 내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니까요. 지금도 맛있는 것을 먹으면 '오이시이'가 아닌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처럼요.

4.
오늘 휴일이어서 모처럼 산책을 나갔습니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데 마침 퇴근하시던 분들이 걸어가는 저를 보고 차를 멈추고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소소한 일조차 기뻤습니다. 
하늘은 한없이 연한 푸른빛에, 구름이 옅게 깔려서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 너머로 흘러가고 있었지요. 어느샌가 길가에는 갈대인지 억새풀인지 모를 풀들이 돋아나 있더군요.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난 줄 몰랐습니다. 행복한 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가지요. 뒤돌아보면 아, 참 행복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던 시간들... 많은 시간 괴로워했었는데, 이 먼 땅에서 내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부디 오래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5.
왜 저는 이런 시시콜콜한 잡상을 늘어놓고 있을까요.
어렸을 때는 내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내 이야기를 관심있게 들어주거나 흥미있어 하질 않았으니까요. 언제나 상대가 불편해하는데 굳이 내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하나, 싶어서 입을 다물곤 했지요. 
그래서 늘 남의 이야기에도 그냥 시큰둥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지요. 모두가 당연하게 늘어놓는 소소한 이야기, 잡다한 자기 신변의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한테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만 들었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내가 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사소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이곳에 와서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 샌가 상대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정보를 교환하지만, 어쩌면 이런 정보를 교환하는 와중에 상대에 대해 사소하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친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게시판은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내 이야기를 써 두고 보고 싶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면 되니까요. 나는 나대로 듣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수다를 늘어놓는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되어서 좋고...
참 다행입니다.


6.
아소를 휩쓸었던 수해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국도 57호선은 거의 복구되었습니다. 아직 아소산을 보면 무너진 곳이 눈에 띄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너진 곳도 초록빛이 덮이겠지요.
아소는 물이 굉장히 깨끗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수도물에서 약품 냄새가 나지 않긴 하는데 사람들은 그 물을 그냥 그대로 마십니다. 으음? 괜찮은 걸까요. 저는 세균 같은 게 좀 걱정이 되긴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전혀 문제없어! 라고 하더라구요... 지하수나 산간의 물을 그대로 쓴다는데... 흐음.

아무튼 물이 많다는 것은 정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비도 많이 오거든요.(...) 비구경 하고 싶은 분, 천둥번개가 좋아! 하시는 분은 아소에 놀러오세요(....) 오후가 되면 때때로 소나기가 내리는데 정말 굉장합니다. 번개가 한 3초간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오오오, 하고 감탄했습니다. 직원 여러분들과 번개가 치는 날 실컷 농담을 했네요. 지금 나가면 한 3초 후에 모모 씨가 쓰러져 있는 거 아냐?, 내가 골프채를 쥐어줄 테니 얼른 나가라구! 등등... 히히히.
뭐어 아무튼, 수해 이후로 손님이 많이 줄어서 좀 걱정입니다. 

날씨가 썩 시원해졌으니 더위에 지친 분들 많이 놀러오세욥. 긴팔옷 지참하시고. 헤헤헤.

그럼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