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학을 마친 지금까지 시위나 집회에 한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생 모르고 철없이 자란 아이의 첫 집회 참여기라는 것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희망버스를 알게 된 것은 인터넷 뉴스였습니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희망버스에 동참하길 호소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1일에 울산에서 대학 동기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희망버스를 타고 함께 출발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좀 귀찮았습니다. 결혼식과 희망버스 두 곳에 입고 갈 복장이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었고 대학 동기가 서울로 관광버스를 보내줘서 그것 타고 울산 갔다가 다시 타고 서울로 돌아와버리면 주말은 그럭저럭 편히 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희망버스를 타야했던 것은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에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 당시 홍대 재학생이었습니다.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이 타결되기까지 49일 동안 한번도 농성장에 가보지 않아서 부끄러웠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 규탄하는 글을 올리고 청소노동자를 후원하는 계좌에 약간의 돈을 보내기는 했지만 파업이 끝나고 생각해보니 진정 제가 그 분들을 위해서 했던 행동이 아니라 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이기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부산 영도에 있는 한진중공업에 가기까지 마음 속으로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컴퓨터 앞에서 계속 부산 영도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습니다. 머리 속에는 최악의 상황만 떠올렸습니다. 그런데도 가야만 했던 것은 김진숙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도 추웠던 겨울에 왜 85호 크레인에 올라야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전후 상황이 뭔진 잘 몰라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카페에 참가 신청하고 참가비 송금하고 나니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6 11일 울산에서 동기의 결혼식을 마치고 나니 오후 3시였습니다. 이 때까지도 갈등이 되었습니다. 저 같은 애 한 명쯤은 동기들과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타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부산에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던 것은 만약 부산에 가지 않으면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보다 더 큰 후회를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하니까 5, 서울에서 희망버스가 11시쯤 부산대교에 도착해서 촛불 행진을 한다고 했으니 6시간은 어디선가 보내야 했습니다. 혼자 보수동 헌책방에서 책도 둘러보고 부산 거리를 그냥 걷기도 하고 태종대에도 다녀왔습니다. 멍청하게도 이 때 체력을 다 써버렸습니다ㅠㅠ 9시쯤 부산대교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사복경찰들이 하나 둘씩 왔습니다. 역시 형사님들이라 그런지 눈에서 레이저를 쏘시더군요. 제가 빙긋이 웃어드렸더니 외면하셨습니다. 기다려도 희망버스가 안 오길래 난데없이낙타를(이하 낙타로 줄임)님께 연락해보았더니 버스가 2시 넘어서 도착하실 거라고 하셔서 혼자 한진중공업 정문으로 갔습니다. 한진중공업 사측에서 정문을 봉쇄하였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정말 꼼꼼하게도 막으셨더군요. 그런 꼼꼼함으로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챙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새벽 한 시쯤이었을까 희망버스 촛불 행렬의 선두가 보였습니다. 기존의 정문 앞 집회 세력과 합류하여 도로를 점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희망버스 팀은 한진중공업 회사 쪽 인도로 부산 지역 팀은 도로 쪽으로 나누라는 신호가 있었습니다(두 팀 사이에 경찰버스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의경들이 버스에 올라타는 것으로 보아 제 생각에는 경찰에서 집회 세력이 한진중공업 진입을 포기하고 도로 한 쪽에서 집회를 할 것으로 착각하고 버스를 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한진중공업 담 쪽에서 사다리가 내려왔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들어간 저희는 집회도 하고 공연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새벽 6시가 다되어서야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의 가족들이 사내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희망버스 팀은 다 들여보내주었으면서도 가족들만은 그 시간까지 못 들어가게 했던 것입니다. 사측과 경찰이 해고 노동자를 괴롭히는 방법은 정말 치졸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이 쓰는 숙소 화장실에는 이런 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조남호(한진중공업 회장)가 휴지를 안 준다. 아껴 쓰자 그리고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해고 노동자 아내 분께서 사내에 들어오셨을 때 다른 가족들에게 하셨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정사정해서 겨우 (사내로) 들어왔는데 어떻게 다시 나가냐. 못 나간다

낙타님과 저는 잠을 청했습니다. 일어났을 때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습니다. 창문 밖을 내려다보니 해고 노동자 분들이 저희가 지나간 자리의 쓰레기를 줍고 있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조선소 내부를 둘러보았습니다. 해고 노동자 두 분이 용접할 때 쓰는 가스 공급 장치를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회사를 사랑하고 일하고 싶어하는 이 분들은 왜 해고된 걸까요?

점심을 먹고 김진숙님의 마지막 발언을 듣고 해고 노동자들의 가족들이 나눠 주신 양말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정말 여러 번 울컥하는 것을 참았습니다. 아이들이 아빠 힘내세요 노래 부를 때, 해고 노동자 아내의 편지를 읽을 때, 김진숙님의 마지막 발언 때, 진보신당 부대표님 발언 때, 진보신당 당원인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가는 길에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이 길 양쪽에 서서 배웅할 때... 그리고 저는 이 분들이 왜 해고되었고 복직되지 못하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악덕자본가 조남호 때문이 아닙니다. 이명박 때문도, 노무현 때문도 아닙니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저 때문이었습니다. 김진숙님 말씀대로 연대하지 않은 우리 때문입니다.

토요일에 울산에서 결혼했다는 제 대학 동기는 작년에 입사한 현대자동차 정규직, 사무직 근로자입니다. 천장이 반투명 유리로 되어서 자연 채광이 되는 멋진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저도 대학동기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50가지가 넘는 뷔페 음식들은 하나같이 다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는 한진중공업 집회에서 먹었던 시래기된장국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동기들보다는 춤을 추던 날라리 외부세력과 손을 흔들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더 생각이 납니다. 결혼한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결혼식에서보다 집회에서 더 많이 웃었습니다. 집회에서 마음이 더 편했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투쟁하는 모든 분들 승리하기 바랍니다.

 

1)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낙타님과 의외로 얘기가 잘 통해서 좋았습니다.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 제가 폰으로 찍었던 사진 몇 장을 올립니다.

 

 - 희망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열린 집회. 컨테이너로 막은 정문과 용역들이 보입니다.

 

 -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합류 

 

 - 담을 넘어 회사로 진입 

 

 - 사내로 들어와서 정문 뒤쪽에 자리하였습니다. 첫번째 사진의 컨테이너 2개 여기서도 보이시지요. 

 

 - 85호 크레인. 사내에 있는 여러 크레인들 중 하나지만 김주익 열사가 목을 매었고 곽재규 열사가 몸을 던졌던 바로 그 크레인입니다. 올해 1월 6일 그 추운 겨울에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 크레인에 올라 아직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 돌아가는 희망버스 행렬을 배웅하는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

 

덧3)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330104351&section=02 송경동 시인이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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